178화
시간은 어느새 11시 35분이 되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벗겨진 장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이런, 기다리시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늦었군요.”
“상관없습니다.”
수혁은 상대를 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하며 서류 가방에서 꺼낸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간단한 일이라도 하는 중이었다.
“점장님이신가요?”
“네, 전 김호철 지점장이라고 합니다.”
그는 느긋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강수혁입니다. 점심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허허,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직원에게 커피를 시켰으니 한잔하고 시작하시죠.”
‘이거 봐라? 그냥 대놓고 도발하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보통 때라면 상대를 조롱하거나 짓누를 수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신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욕적인 언행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전에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뭡니까?”
“부지점장님은 나가 주세요. 점장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요.”
“저 말입니까?”
가만히 앉아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규태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지점장님은 회장님께서 앞으로 자주 마주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어리셔서 잘 모르나본데 회사 간의 비즈니스는 상호 간의 존중이 중요한 법이에요.”
호철은 타이르는 투로 말을 꺼냈다.
“굳이 나이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즈니스라고 말씀하시니 이야기가 편해지겠군요. 전 이 자리에 지오쇼핑의 오너로서 책임자를 만나러 온 겁니다. 애당초 약속을 잡을 때도 독대를 요청했는데 부지점장님이 이 자리에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크흠, 그냥 회장님이 융통성을 발휘하시면 될 문제인데 왜 이렇게 따지고 드십니까?”
“거듭 말하지만 저는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러 왔지, 사교활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수혁은 호철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점장님, 그냥 나가 보겠습니다.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저도 자리에 있는 게 민망하군요.”
“흠…… 알겠습니다.”
규태는 빈정이 상했는지 수혁에겐 인사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자, 이제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논의하려는 사안이 무엇입니까?”
호철은 임원회의 때 지오쇼핑과의 협업을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마트의 운영에 변동이 생기는 것도 귀찮았는데 청량리점이 시범 운영 지점으로 선정된 탓에 기분이 많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협의한 사안을 이행해 주시지 않습니까? 들어 보니 창고만 대충 정리했을 뿐 어떤 진척도 없는 상황이라는데 사실입니까?”
“이봐요. 사업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지오쇼핑과의 협업을 도와줄 인력을 재배치해야 되고 사이트에 올릴 수 있는 물품들도 정리해야 되는데 작업들이 회장님 생각처럼 빨리 될 줄 아십니까?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몰라서야 쯧쯧.”
그는 수혁을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며 혀를 찼다.
“제가 비록 경력은 짧지만 나름 규모 있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점장님이 말씀하시는 건 모두 핑계일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죠. 재고를 관리할 인원을 배치하는 데 2주 이상이 허비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물품 정리가 시급하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셔야 할 텐데 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겁니까?”
“회장님, 전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시간이 넉넉하면 말씀하신 대로 당장 내일이라도 일을 완료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라서 하지 못하고 있는 거뿐입니다.”
호철은 듣기 싫은지 귀를 후비며 성의 없게 대답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책임자라면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추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 SH그룹의 대표임과 동시 지오쇼핑 회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장님과 같은 이유를 대면서 타 회사와의 약속을 어겨 본 적은 없습니다.”
“참 능력자시네요. 부럽습니다.”
“능력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변명은 하지 않는 편입니다.”
수혁은 화를 꾹꾹 누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저는 분명 할 일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요즘 공사가 다망해서요.”
그는 품속에 담배를 꺼낸 다음 불을 붙이며 말했다.
‘대화할 의지가 아예 없는 것 같아. 이병섭 회장님께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
수혁은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우는 호철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엘마트와의 협업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오,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네, 유감스럽게도 점장님께서 협조를 안 해 주시니 어쩔 수 없지요.”
“누가 협조를 안 한다고 했습니까?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지요. 제가 충고 하나 해 드릴까요? 성질 좀 다스리세요. 지금 욱하신 거 같은데, 큰일을 하실 분이 감정에 휘둘려서야 일이 잘되겠습니까?”
“점장님이 협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중단하려고 하는데, 왜 저한테 책임을 전가하십니까? 됐고, 이병섭 회장님께 지금 연락을 드릴 참이니 하실 말씀 있으면 생각해 두세요.”
수혁은 그를 벌레 보듯이 쳐다보다가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협약 내용이 뭐길래 그렇게 자신 있어 하십니까?”
시종일관 갑질을 해대던 호철은 처음으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협약서 안에는 양 회사가 온라인 유통 판매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점장님께선 그 의무 규정을 계속 위반하고 계십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시간과 비용만 무의미하게 소모된다고 판단돼서 회장님과 계약 파기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수혁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말을 이어 나갔다.
“누가, 협조를 안 해 준다고 했습니까?”
“말만 협조해 준다뿐이지, 방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점장님과 논쟁하러 이 자리에 온 게 아닙니다. 차라리 회장님께 판단을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
마땅히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을 지키던 호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우리 임원들은 회장님께서 제시한 사업안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강력하게 밀어주시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미 회장님과 이야기를 다 끝낸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일전에 독대를 한 적은 있지만 최근 몇 주 동안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병섭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수혁은 의외의 이야기에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음, 회장님의 어떤 면모를 보고 사업을 강행하시는지 잘 모르지만…… 저는 지오쇼핑과의 협업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에 나한테 이리 거칠게 굴었던 거구나. 어쩌면 서로 친하게 지낼수도 있겠어.’
호철의 고백을 들은 수혁은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들어 보니 제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엘마트에 헌신하신 점장님께서 회사를 얼마만큼 생각하고 계시는지 고려하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실언을 했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회장님. 말씀하시죠.”
수혁이 따뜻하게 말을 건네자 호철도 안 좋은 마음은 제쳐 두고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회장님께서 저와 함께 일하려고 했을 때는 단순히 친분만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회장님께선 사업적 판단을 하실 때만큼은 누구보다 냉철하시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제가 회장님의 마음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시게 되면 이득이 되면 됐지 손해를 보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장담해 드리기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서 양 회사가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흠…….”
‘업계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이었나? 무례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훨씬 괜찮은 사람이잖아?’
대화가 계속될수록 수혁에 대한 호철의 호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회장님, 개인적인 감정으로 의무를 지키지 않고 사업을 방관한 사실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게 다 회사를 위한 마음에서 일어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당장 직원들을 불러 협약 사항을 이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속 시각을 지키지 않고 기다리게 만든 것에 대해서도 제 잘못을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다 잊었습니다.”
수혁은 불편할 수 있는 호철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회장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제가 아는 데로 모시겠습니다.”
“네, 대신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리자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고, 무사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수혁이 호철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매력 스텟의 영향이 적지 않았지만, 경험을 통해 성숙한 그의 인격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었다.
* * *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회장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연락을 못 받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명함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근처 중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갔고, 수혁은 지갑에서 유신의 명함을 꺼내 호철에게 건넸다.
“아, 박유신 사장님은 잘 지내십니까? 뵌 적은 없지만 전화상으로는 여러 번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호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제가 총책임자이기는 하지만 사장님께서 대부분의 업무를 총괄하시기 때문에 논의하기에는 오히려 더 편할 겁니다.”
수혁의 주도하에 앞으로의 진행에 관해서 논의한 두 사람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며 미팅을 마무리했다.
* * *
5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오랜만에 회사 차를 탄 수혁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과천으로 가고 있었다. 행사는 과학기술부에서 주최했는데 일전에 강현제 대표와 이야기했던 공모전의 결과를 들으러 가는 자리였다.
‘다 왔네.’
잠시 후, 수혁은 종합청사에 있는 대강당에 도착했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WG전자의 황정명 부회장이 수혁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회장님은 안 오신 모양이군요?”
“네, 금일 중요한 일정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참석하게 됐습니다.”
“저희가 대상을 타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다 최필재 팀장님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함께 일한 WG전자의 핵심 인재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두른 것을 보면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SH커뮤니케이션과 WG전자는 ‘IT산업 발전을 위한 미래 전략’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공모전에 공동으로 참여했고, SH의 대표로는 최필재가 나서서 큰 활약을 보였다.
‘그 사람이라면 능히 그럴 만하지.’
필재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수혁은 흐뭇해하며 정명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저, 혹시 일송에 대해 뭔가 들으신 건 없으십니까?”
“일송전자에서 공모전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수혁은 정명의 얼굴이 대번에 굳은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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