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공모전의 심사 방식이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건 들으셨습니까?”
“네. 기존에는 과학기술부에서만 자체적으로 판단했지만 이번에는 현장에서 근무하는 업계 종사자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명의 물음에 답변했다.
“맞습니다. 정부에서 이례적으로 IT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투표를 할 수 있게 해서 심사의 공정성을 갖추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반영 비율은 과학기술부 자체 평가가 3이라면 외부 평가가 7로, 일종의 경연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지요.”
“그렇게 진행된 이유가 있을까요?”
“대상에 입상한 기업의 경우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어 있는데, 세금이 많이 쓰이다 보니 로비를 방지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정명은 본인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 봤다.
“하긴 대한민국의 IT 산업에 관한 주제였기 때문에 국책사업으로도 다뤄질 수 있는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겠지요. 우리만 해도 정부의 도움이 없으면 사업을 추진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네, 국내에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이고 통신과 연계된 거라 개인 기업이 독자적으로 시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죠.”
SH와 WG는 전국에 무선 인터넷망을 설치하는 사업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일송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대상 수상 기업이 저희 외에도 한 곳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애당초 대상으로 선정되는 아이디어는 하나 아니었습니까? 설마 일송이 우리와 함께 시상대에 오르는 겁니까?”
이쯤 되자 수혁도 정명이 일송을 언급한 이유에 관한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습니다. 회장님과 친하게 지내는 과학기술부 공무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리가 내놓은 기획안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막판에 결과가 뒤집혔다고 합니다.”
“일송에서 손을 쓴 모양이군요.”
“저도 들은 이야기라 확실하다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렇게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정명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원래 우리가 유일한 대상 수상 기업이어야 하는데…… 좀 속상하긴 하네요.”
“아닙니다. 내막을 알아보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정명의 입에서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우리는 최초 평가 때 1등이었지만 일송의 입김으로 인해 2등으로 내려갔었습니다.”
“흠, 그 말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힘을 써줬다는 이야기군요.”
수혁은 ‘일송이 어떤 방식으로 꼼수를 썼는가’보다는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네. 저에게 정보를 준 사람은 과학기술부 측 공무원인데, 거물 정치인이 막후에서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신원은 밝힐 수 없다고 해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요.”
“대충 짐작이 갑니다.”
“아시는 분이라도 있습니까?”
“네, 최근에 안면을 튼 분이 계십니다. 이번에 큰 신세를 지게 됐네요.”
수혁은 현재 집권당의 대표 강현제를 떠올렸다. 그는 여당의 대표임과 동시에 과학기술부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있어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조금 이따 행사장에 가면 보시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정명은 그 사람의 정체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수혁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의 질문은 자제했다.
* * *
“안녕하십니까? 과학기술부 장관 박경수입니다. 우리 부처에서는 매년 새로운 비전을 세우기 위해 개인 공모전을 실시했으나 올해는 특별히 ‘미래 IT 산업의 발전 방향’이라는 주제로 아이디어를 모아 봤습니다. 기업들을 대상으로 열린 이번 공모전은…….”
박경수는 시상식에 앞서 공모전의 목적과 자리에 참석한 주요 관계자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쁜 와중에도 참석해 주신 강현제 위원장님을 비롯한 귀빈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학 기술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상을 받은 기업에는 제안해 주신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의 협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인사말을 마친 그는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넘겼다.
“다음으로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호명된 사람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동상입니다.”
사회를 맡은 남자는 수상자들을 순서대로 호명했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대상입니다. 올해 2002년 과학기술부에서 주관하는 특별공모전의 대상 수상자는 SH커뮤니케이션의 강수혁 대표와 일송전자의 이정찬 부회장으로 공동 수상입니다.”
‘부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공동 수상이네.’
수혁은 SH와 WG의 대리 수상자 자격으로 단상에 올라갔다. 그는 반대쪽에 걸어오고 있는 정찬을 발견했다.
‘저 사람이 이명학네 아버지인가? 아들하곤 완전 딴판인데?’
큰 키에 껄렁껄렁해 보이는 명학과 달리, 정찬은 단정한 외모에 학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IT는 여러 과학 기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전도유망한 분야입니다. 부디 두 분이 합심해서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박경수 장관은 이들에게 상패를 수여하며 덕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찬과 수혁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오찬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바쁘지 않으신 분들은 식사를 하고 가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자리를 옮기기에 앞서 축하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귀빈분들께서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얼마 있지 않아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무대를 관람했다.
‘강현제 대표님께 인사를 드리고 와야겠다.’
오찬 자리에서는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고 생각한 수혁은 마침 자리에서 일어난 현제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오, 강 대표. 잘 지내셨습니까?”
화장실에 가기 위해 강당을 빠져나오던 현제는 뒤따라온 수혁을 보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명색이 회사 대표신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현제는 일전에 수혁을 반말로 대했지만 공적인 자리인 만큼 예의를 지키려고 했다.
“아, 제가 길을 가로막았네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현제는 수혁을 데리고 강당 밖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예전에 회관에서 봤을 때 자신 있어 보이긴 했지만 대상까지 거머쥘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덕담을 건네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게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사실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따라 나온 겁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네요?”
“네, 원래 일송에서 받기로 했던 것을 대표님께서 신경을 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수혁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솔직히 강 대표를 좋아하긴 하지만 특정 누구에게 혜택을 주는 성격은 아닙니다. 전 신경을 써 준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뿐입니다.”
현제는 그때만 생각하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이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직 내부의 일이라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과 관련돼서인지 언급하는 데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멀리서 이들을 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거기, 강수혁 대표님이랑 위원장님 아니십니까?”
비대한 몸을 가진 남자의 이름은 정문호로, 현제와 같은 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회의원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와 안면이 없었던 수혁이 물었다.
“전 강현제 대표님이랑 같은 당 소속인 정문호 의원이라고 합니다. 두 분이서 워낙 즐겁게 대화를 나누셔서 셈이 나 따라 나왔습니다.”
문호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둘이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나중에 따로 인사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 대표님이 왜 저러시지? 저 사람이랑 사이가 안 좋나?’
수혁은 굳은 얼굴로 말하는 현제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가 방해를 했나 봅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이 어떤 모의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들 나누세요.”
“어이, 정 의원.”
문호의 뼈 있는 말에 기분이 상한 현제는 목소리를 깔고 그를 불렀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당 대표라고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겁니까?”
“자네가 먼저 헛소리를 하지 않았나? 할 일 없으면 분위기 흐리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
“참 무섭습니다. 대표님.”
“정문호!!”
현제는 비아냥거림이 계속되자 버럭 화를 냈다. 그는 보통 때라면 한없이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불의를 보거나 무례한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옆에 청년도 있는데 너무 그러지 마시죠.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청년이 아니라 기업의 대표로서 참가하신 분이야. 언행에 주의하게.”
“알겠습니다.”
문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괜찮으십니까?”
“놀라셨죠? 의원들끼리는 이러다가도 술 한잔하면서 풀고 그럽니다.”
석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왠지 사이가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는데 기우였네요.”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 의원을 중심으로 몇몇 의원들이 노골적으로 일송을 밀어주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수혁은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국회에 일송과 연이 있는 의원들이 정말 많습니다. 제 경우에는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기 때문에 재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말입니다.”
“의원들이 부당하게 일송을 밀어줘서 대표님이 힘을 쓰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과학기술부 위원장 신분이라 망정이지, 하마터면 대표님께서 큰 피해를 보실 뻔했습니다.”
과학기술부 소속이었던 강현제는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대상 수상 기업이 바뀐 것에 의문을 가졌고 상황을 알아본 뒤 적절하게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 잘못된 것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 놓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 안 되었지만요.”
현제는 일송을 제외하고 SH와 WG가 단독으로 수상할 수 있게 하려했지만 거센 반발로 인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송이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인 건 맞지만 이런 점은 참 아쉽습니다. 실력으로 승부를 봐도 되는데 굳이 왜 뒤에서 힘을 쓰는지 참…….”
“그래도 대표님 같은 분이 계셔서 일송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수혁은 안타까워하는 현제를 달래주었다.
“허허, 제가 그럴 깜냥은 되는지 모르겠군요. 그만 들어가시죠, 곧 공연이 끝날 시간입니다.”
“네, 대표님.”
간단히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17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