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건방진 놈이 누굴 가르치려 들어?’
정찬은 모든 질문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수혁을 보고 있자니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경영인의 상상력은 기업의 장기적 비전에 어울리는 거지, 국가 협력 사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본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정찬은 처음으로 돌려 말하지 않고, 수혁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부회장님께서는 이번 공모전의 주제를 잊으신 듯합니다.”
“이봐요, 강 대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젊은 사람이 혈기가 넘치는 건 이해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다 대표님의 선배들이십니다. 자중하세요.”
수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선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기분이 상한 선배님들과 의원님들께 먼저 사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회장님을 모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공모전의 주제가 ‘국내 IT 산업의 발전을 위한 미래 전략’이라는 점을 비추어 봤을 때 장기비전을 도모한 우리의 의견이 적합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수혁은 무선 인터넷 시장을 선도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작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훗날 3G, 4G 등으로 표현되는 국제통신기술규격의 트렌드를 국내 기업이 주도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IT 강국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합시다. 자리가 너무 과열되는 거 같습니다. 들어 보니 강 대표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으니 한 번 정해진 결정에 대해서 더 이상 분란을 만들지는 맙시다.”
현제는 어수선한 자리를 정리하고자 했다.
“여러분들의 열띤 토론 잘 봤습니다. 상호 간에 예의만 지켜 주신다면, 이런 대화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다만, 오늘은 시간도 다 됐으니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하면 어떨까 합니다.”
무선통신망 기획안에 우려를 표했던 박경수 장관은 수혁의 말을 듣고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일어나시죠.”
장관이 식사를 마무리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사람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덕분에 뜻밖의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정찬은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 안에는 뼈가 있었다.
“깨달음이라니요. 저야말로 선배님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크흠, 그럼 수고하세요.”
그는 수혁의 능청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식당을 빠져나갔다.
‘다혈질이라 들었는데 내가 잘못 판단했던가? 몇 번 건들면 실수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었어. 애석하지만 명학이는 상대가 안 되겠어.’
다음 일정을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던 정찬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혁의 원래 스타일대로라면 상대의 도발에 더 강하게 맞서는 게 어울렸지만 경험이 쌓임에 따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만만하게 볼 녀석이 아니야. 아버지는 애송이라고 무시하고 있지만 언젠간 큰 위협이 되겠어.’
정찬은 수혁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 * *
2002년 6월, 대한민국은 자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으로 인해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축구협회에서는 16강을 목표로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1954년에 역사적인 첫 월드컵 출전 이후로 우리나라는 6번째 월드컵을 맞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월드컵 무대에서 많은 경기를 치렀지만 애석하게도 1승을 거두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말씀은 16강 진출은 어렵다는 이야기군요.”
“국민들께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1승만 거두어도 나쁘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개최국인 만큼 16강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체면이 사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객관적인 전력은…….”
축구 전문가들은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여 대한민국의 월드컵 성적을 예측해 보고 있었다.
‘우리가 4강까지 진출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하겠지? 결과도 다 아는데 도박이나 해 볼까? ……아니야, 내 일에 집중하자.’
수혁은 해외 도박사이트를 이용해서 목돈을 벌까 잠깐 고민을 해 봤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대표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수혁은 노크 소리와 함께 유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티비를 끄고 맞이할 준비를 했다.
“엘마트에 관한 사안을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회장님께서 다녀가신 이후로 엘마트 측의 태도가 협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5월 한 달 동안 온라인 판매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월 첫 달, 20억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비록 낮은 수치이기는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고객들이 더 많이 이용해 주고 있습니다.”
유신은 확신 없이 시작했던 사업이 그런대로 굴러가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운송 인력들은 어떻게 운용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기사님들을 정식으로 고용했고 서비스 개시 시점에 맞춰 엘마트 지점에 항시 대기하도록 지시해 둔 상태입니다.”
“차량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대량 주문이 들어오면 쓸 수 있게 트럭을 몇 대 배치해 두긴 했지만, 대부분 기사님들의 자차로 배달이 이루어 질것 같습니다.”
“배달을 위한 최소 주문 금액은 어느 정도로 설정해 놨습니까?”
수혁은 영업에 있어 핵심이 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현재 직원들과 계속 논의 중입니다. 청량리 근방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수준과 소비자들의 구매 성향을 파악해야 돼서 시간이 좀 걸릴 듯싶습니다.”
“잘하고 계시는군요. 정확한 날짜는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아마 내년에는 소액 주문도 배달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겁니다.”
‘상시 인력을 배치하는 것보다, 필요할 때만 부르고 건수당 비용을 지불하면 돈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거야.’
그는 스마트 폰이 개발되면 전문 라이더를 활용할 수 있는 어플을 제작하여 인건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마케팅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현재 지오쇼핑 게시판에 서비스 개시를 알리는 공지를 띄워 놨습니다.”
“신문이나 티비 광고를 쓰기에는 사업 규모가 작아 수지가 맞지 않겠네요. 어떤 방식으로 홍보해야 할지 고민이 되겠군요?”
수혁은 유신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줬다.
“그렇습니다. 포털을 활용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이번 사업의 주 타켓 층이 주부들이라서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이 접속하는 인터넷으로만 홍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청량리 부근을 중심으로 전단지를 만들어서 돌리세요.”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유신이 생각하기에 SH그룹은 중소기업을 넘어 거의 중견기업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단지를 활용한 홍보는 기업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때가 아닙니다. 전단지 아래에 쿠폰을 부착해서 쿠폰 번호를 기입한 고객들이 할인을 받을 수 있게 하면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겁니다.”
“홍보팀장에게 따로 일러 두겠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수혁의 통찰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는 유신은 그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아날로그적 방식이 더 잘 먹힐 때가 있지.’
이후에도 수혁은 유신에게 몇 가지 주의할 점들을 당부해 준 뒤 대화를 끝마쳤다.
* * *
‘후, 시험 끝나고 좀 쉬려고 했는데 쉬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네.’
마지막 시험을 마친 수혁은 급하게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학교 기말시험은 주로 6월 20일경에 몰려 있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선전하자 교수들은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시험을 생략하거나 일정을 앞당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교수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해 주는 관행 덕분에 한국대에서나 가능했지 정해진 학사 일정을 철저히 지켜야 되는 타 학교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강수혁 멘토님이시죠? 곧 있으면 멘티들이 올 겁니다. 일단은 이쪽에서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한국대 취업관에 도착한 수혁은 행정 직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학생 신분으론 이례적으로 취업 및 창업 멘토에 선정되었는데, 이는 SH그룹의 명성과 지도교수인 길명준 교수가 학교 측에 적극적으로 추천을 해 준 덕분이었다.
‘흠, 뭔가 괜히 민망한데?’
수혁은 대기실에 있는 인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0대의 나이로 보였는데 이들은 대기업 오너나 장관, 국회의원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둔 건 아니었지만 본인들 또래에서는 가장 앞서나가는 자들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바쁘셔서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짬이 나셨나 보군요?”
“어, 미리 이야기해서 시간을 빼놨어. 넌 지검에서 오는 길이야?”
그들 중 선후배 사이로 보이는 두 남자는 한국대 법학과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20대 중반에 군 복무를 마친 이들은 3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법원과 검찰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들어 보니까 대기업, 공무원, 법조계 등 분야별로 멘토를 선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쩐지 직업군들이 다양하다 싶더라니까? 그건 그렇고, 저쪽에 박현정 상무 보여?”
“일송에서 여성으로는 임원 자리에 최연소로 승진했다는 사람을 왜 모르겠어요.”
두 남자는 남들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맞다. 멘티들에게 선호도 조사를 해서 멘토들 사이에서 단장을 뽑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단장? 그게 뭔데?”
“별 권한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식사할 장소를 정하거나 학교에서 주는 예산을 관리하는 거예요.”
‘출발 멘토단’이라는 취업 프로그램에는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프로그램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소정의 예산이 배정되어 있었다.
“아무나 하라고 해라. 난 귀찮아서 관심 없다.”
“그래요? 전 왠지 선배가 될 거 같은데요?”
“내가?”
선배의 이름은 김지섭으로, 명예욕이 강하고 출세 지향적인 성향의 사람이었다. 후배는 그의 이런 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을 맞춰 주는 중이었다.
“말이 선호도지, 누가 단장이 되겠어요? 멘토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이 단장이 될 건데…… 그런 기준이면 선배가 제격이죠.”
“훗, 말이라도 고맙다.”
지섭은 22살의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군 전역 후 연수원 생활을 했는데,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여 34살의 나이에 대전고등법원의 판사로 재직 중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현재 멘티들이 세미나실에 도착했습니다. 10분 후에 이동할 예정이니까 준비해 주세요. 금일 진행되는 ‘출발 멘토단’은 총장님이 특별히 기획하신 프로그램으로, 후배 학우들이 미래를 설계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세미나실에 들어가시게 되면 먼저 멘토분들의 소개 시간이 있을 거고…….”
행정 직원은 대기실에 들어와 프로그램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멘티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려나? 나랑 비슷한 연배거나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있을 텐데…….’
시험 준비와 회사 경영으로 바쁘게 지냈던 수혁은 프로그램을 위해 나름의 준비는 했지만, 떨리는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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