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지금까지 프로그램에 대한 짧은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출발 멘토단’의 초대 단장을 맡아 주실 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임기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다음 프로그램까지 직위가 자동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정 소개를 마친 직원은 이름뿐이긴 하지만 나름 리더라 할 수 있는 첫 단장을 호명하려고 했다.
‘단장 자리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나겠지? 뭐 주변에 인물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를 능가할 정도는 아니잖아?’
멘토단에는 행시, 외시 합격자들뿐만 아니라 입사하기 어려운 글로벌 기업의 사원, 이제 막 부임한 교수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사법연수원 수석 수료는 공부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어려웠던 것이었기 때문에, 김지섭은 확신에 차있었다.
“초대 단장에는…… 현재 SH그룹 대표로 역임하고 계신 강수혁 대표님이 선정되셨습니다. 괜찮으시면 나오셔서 짧은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수혁 대표가 우리 학교 출신이었어?’
대기실에서 떠드느라 수혁을 미처 보지 못했던 지섭은 화들짝 놀랐다.
그와 반대로, 수혁 또한 생각지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만 단장직을 의무적으로 맡아야 되는 겁니까? 어떤 기준으로 절 뽑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단장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멘티에 지원했고 그 안에서 선호도 조사를 해 보았는데 강수혁 대표님이 1위로 뽑히셔서요. 아무래도 선호도가 높은 멘토분을 선정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단장으로 내정하였습니다.”
직원은 수혁이 뽑힌 이유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실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전 아직 재학생 신분입니다. 여기 많은 선배님들이 계시는데 경험이 짧은 제가 단장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수혁은 단장직을 수행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멘토단의 멤버 선정은 우리 학교 출신의 원로 선배님들이 직접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단장직을 맡는 것에 대해서 총장님을 비롯한 어떤 교직원도 이견을 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학교 구성원과 대선배들이 모두 인정했다는 말이죠.”
직원은 학생처에서 근무하고 있는 행정실장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내막들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저를 좋게 봐주신 점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저보다 단장직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분들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주 동안의 프로그램 이후에도 단원들끼리 모임이 있을 수 있는데, 현재 단장으로 거론된 대표님도 괜찮지만 사회경험도 있고 나이도 적당한 사람이 장을 맡는 게 원활한 교류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섭과 친하게 지내는 검사는 그가 서운해 하는 것을 캐치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저는 강수혁 대표님도 괜찮습니다.”
“저도요.”
“물론 저라고 강 대표님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대표님이 나이가 어리셔서 부담이 되실까 싶어 말씀드린 겁니다.”
주변에서 새 단장 선출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검사는 한 발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단장이 뭐라고 저러는 거야?’
‘빨리 가서 후배들을 만나고 싶은데 여기서 왜 이러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혁이 단장이 된 것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매스컴에 종종 나온 수혁이 학교 후배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하는 자들이 다수였다.
“저도 선배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나이가 어린 저보단 연륜이 있는 선배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게 훨씬 유익할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강수혁 대표님은 단장직을 맡을 의향이 없으신 것 같은데 혹시 멘토단을 위해 단장을 맡아 주실 분 있으실까요?”
수혁의 거듭되는 사양에 실장은 아쉬운 내색을 숨기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바쁘실 텐데 괜찮다면 제가 단장을 해보겠습니다.”
어느 무리에 가든 주인공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지섭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름뿐인 직함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번 기회에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문들과 인맥을 쌓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드네? 판사라는 양반이 한가한가?’
‘혹시 내가 해야 될까 봐 걱정됐는데, 나서 주면 나야 땡큐지.’
사람들은 지섭의 행동에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지만 토를 달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원래 제가 해야 할 일을 선배님께 전가한 것 같네요.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옆에서 잘 돕겠습니다.”
단장 역할을 살짝 귀찮게 여겼던 수혁은 지섭에게 다가가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유명 회사 오너라서 그런지,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저는 모두를 위한 사명감을 갖고 하는 거지, 누가 남긴 일을 떠맡은 게 아닙니다.”
“네? 아, 예…….”
‘미안해서 말을 건넨 거뿐인데 뭐지?’
수혁은 지섭이 경직된 얼굴로 묘한 반응을 보이자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장사꾼 주제에…… 뭐? 제가 해야 할 일?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이래서 돈만 쫓는 놈들은 상종하기 싫다니까?’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짐처럼 여기는 수혁의 태도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자, 그럼 세미나실로 이동하겠습니다. 다들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대기실에서 나온 사람들은 실장의 안내에 따라 세미나실로 향했다.
‘말만 세미나실이지, 거의 소강당 수준의 규모잖아?’
방 안으로 들어간 수혁은 외국 대학에서나 봤던 웅장한 세미나실을 보고 감탄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내 대학에도 계단식 배열의 대형 강의실이 곳곳에 생기긴 했지만, 2002년 당시에는 흔치 않은 형태였다.
“많이 기다리셨죠? 지금 막 여러분들의 진로 상담을 도와줄 7명의 멘토님들이 도착했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아 주시길 바랍니다.”
어림잡아 50여 명의 학생들은 세미나실에 들어오는 멘토들을 위해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들어 보니까 다들 쟁쟁한 분이시라는데?”
“뭐, 고시 합격한 분들이거나 회사 임원들 아닐까?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우리 학교에 더 잘나가는 선배님들도 많이 계시잖아?”
“내가 듣기로 SH스터디랑 지오닷컴 대표도 이 자리에 온다는데?”
“나도 들었어. SH면 완전 핫한 기업인데 얼른 뵙고 싶다.”
학생들은 무대 위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선배들을 보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IMF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는 극적으로 회생했긴 했지만 예전과 달리 취업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이끌 한국대 학우 여러분들을 위해 고심하시던 총장님께선 현장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출발 멘토단을 기획하셨습니다.”
사회자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대기업 사장, 전직 장관 등 쟁쟁한 선배님들께서 후배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셨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취업 환경에 적합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젊은 선배님들로 첫 멘토단을 꾸려 봤습니다. 행사 진행에 앞서, 멘토님들의 자기소개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박민영 멘토님, 앞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호명을 받은 박민영은 마이크가 있는 단상에 서서 자신의 약력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한국대학교 의류학과 89학번 박민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운 좋게 23살의 나이에 일송모직에 입사했고, 평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기획 파트에서 근무를 하였고…….”
졸업하자마자 국내 최고의 패션 회사에 취직한 민영은 기획팀에서 일하면서 여러 의류 브랜드를 론칭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30살을 조금 넘긴 나이에 상무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파에스타를 만든 사람이 우리 학교 선배라니…… 충격이다.”
“난 가격도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외국 브랜드인 줄 알았어.”
학생들은 민영의 화려한 이력을 두고 소곤거렸다. 이후에도 다른 멘토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는데, 뒷사람들의 약력은 그녀의 것에 뒤지지 않았다.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취를 거둔 사람들이 뽑힌 거구나.’
수혁은 청중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거둔 단원들의 성취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김지섭 멘토님의 소개 시간이 있겠습니다.”
‘단장이 마지막에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되면 저 자식이 맨 나중이라는 소리잖아?’
사회를 맡은 직원은 단장을 수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순서를 마지막에 넣어 둔 상태였다.
“저 죄송한데…… 제가 그래도 단장인데 남은 단원이 먼저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수혁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지섭은 행정실장에게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그게 맞지만…… 사회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만 그냥 가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소개 시간이 끝나면 단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공지하겠습니다.”
“후, 아닙니다. 제가 가서 직접 이야기하죠.”
멘티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됐던 지섭은 한숨을 쉬며 단상 앞에 섰다.
‘별 걸 다 집착하네? 맨 마지막에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난리야? 이 사람은 피해야겠다. 가까이하면 피곤해질 거야.’
옆에서 이를 엿듣던 수혁은 지섭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출발 멘토단을 이끌게 된 김지섭 단장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2주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수혁 대표가 단장 아니었나?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섭의 말을 들은 사회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으니, 저에 관해선 간략하게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전 한국대 법학과 2학년 때 행정고시에 응시했고,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법조인이 되길 희망하셨던 부모님의 열화에 졸업을 앞두고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됩니다.”
공부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지섭의 경력은 최고의 인재들만 모인 한국대 안에서도 독보적인 것이었다.
“한국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저는 시험을 준비한 지 1년 2개월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비록 수석 합격은 아니었지만 짧았던 수험 기간을 고려해보면 나쁘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공부에 관해서는 강한 자부심과 경쟁심을 갖고 있는 한국대 학생들이었지만 그의 이력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기 어려웠다.
“말이 되냐? 재학 중에 행시 수석도 엄청난데 한국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다고?”
“그러게, 고시 준비만 해도 벅찼을 텐데 완전 괴물이다.”
“난 졸업하고 1년 2개월 만에 사시 합격한 게 더 대박인데?”
학생들은 앞에 나온 어떤 멘토들 때보다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훗,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 정도로 놀라면 섭섭하지.’
지섭은 학생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렸지만 그의 성과에 경탄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이가 없네. 저 정도로 잘난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날 견제하는 거야?’
수혁은 매사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듯한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대를 전역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저는 다시한번 제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밤잠을 줄이며 노력했고…….”
간략하게 말한다는 처음 말과 다르게, 김지섭의 자기 자랑은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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