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184화 (184/316)

184화

멘토 모임이 있은 지 2주의 시간이 지났다.

‘훗, 얼마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이랑 이렇게 정이 들다니. 이런 경우가 얼마 만이야?’

멘티들은 프로그램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수혁에게 종종 문자를 보내며 안부를 물었다.

‘김지섭 그 사람, 불쌍하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정말 진상이었지.’

수혁은 프로그램 내내 의기소침해하던 김지섭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모임이 흘러가지 않자 급기야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에게 갔던 멘티들은 그로 인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들어오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혁은 노크 소리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회장님, 급하게 보고 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좋은 일로 온 거 같진 않은데…….’

회장실로 들어오는 유신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네, 조금 전 제일물류의 이영섭 전무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조만간 사업에 차질이 발생할 것 같습니다. 휴, 정말 큰일입니다.”

이영섭은 석호가 지오쇼핑을 도와주기 위해 선택한 인물로, 유신은 수시로 그와 연락을 취하며 회사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설명해 보세요.”

수혁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네.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물류센터 프로젝트나 택배 유통망 구축의 경우 대부분이 정석호 회장님이 지원해 주신 자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이죠. 수천억 이상 투여되는 프로젝트인데 제가 모를 리가 있나요?”

“그런데 최근 정 회장님을 두고, 회사 내에서 잡음이 발생하는 모양입니다.”

“잡음이요?”

“네, 우리 회사와 지분을 7:3으로 양분하는 조건 아래 수천억 규모의 투자를 약속하셨는데, 회사 내의 대주주들의 반발이 극심하다고 합니다.”

“흠…….”

보고를 들은 수혁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연초에 받은 천억 원 가량의 투자금은 사업 착수금으로 이미 다 쓰였고, 조만간 중간 정산을 해야 하는데…… 회사 내의 자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공사가 완료될 때 대금을 지급해 준다고 하면 안 될까요?”

“그게, 건설사들 입장에서도 자재비와 인건비가 지속적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중도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일을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겠네요. 방안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수혁은 골치가 아팠지만, 심한 좌절감을 느끼는 유신의 앞에서는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 SH그룹에서 돈을 융통할 수 있을까요? 같은 그룹 내에서 투자 명목으로 지원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한번 알아봤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SH에듀케이션의 경우 한 번에 많은 브랜드를 론칭하는 바람에 여유 자금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SH커뮤니케이션은 판교 쪽에 본사를 건설하느라 우리를 지원할 형편은 못 되는 상황이고요.”

“그렇군요…….”

SH에듀케이션의 경우 작년에 이어 올해도 SH중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공인 중개사 시장까지 진출한 탓에 자금을 융통해 줄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제일물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룹 계열사 중에서 희생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찾으면 있기야 하겠지만,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하긴 자회사라고 해도 타 계열사의 대출자금을 마음대로 쓰면 언론의 심한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으니까요.”

자금 사정이 비교적 좋은 대기업들도 특정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거나 자금을 임의적으로 운용하는 건 법적인 제재와 심한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는 행위였다.

“대주주들이 정석호 회장님을 비판하는 이유는 뭐라고 합니까?”

수혁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지오쇼핑의 5월 매출이 20억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대주주들을 크게 자극한 것 같습니다. 정 회장님이 우리 회사에 투자한 금액을 고려해 봤을 때 터무니없는 실적이라는 거지요.”

“아무래도 우리가 좀 성급했나 봅니다. 제가 투자자의 입장이라도 지오쇼핑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오쇼핑을 론칭한 것에 대해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후, 저도 최소한 물류센터가 완공될 때까지는 참고 기다릴 줄 알았지만…… 이렇게 급히 우리를 평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유신도 한숨을 쉬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정석호 회장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십니까?”

“대주주들 중에서 정 회장님께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지오쇼핑의 저조한 매출을 근거로 끊임없이 공격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처는요?”

“다행히도 제일물류의 최고 주주가 정석호 회장님이고, 우호 세력도 있기 때문에 경영권에는 흔들림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회사 내에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염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영섭에게 들은 정보를 수혁에게 전달했다.

“그 말은, 조금 무리하면 자금 조달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정 회장님 편에 서던 대주주들도 이번 투자 건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표시하진 않는다고 합니다. 워낙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몰아준 터라 그들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거지요.”

“하, 그러게요.”

석호는 수혁에게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수천억 원을 투자한 대가로 30퍼센트의 지분만 가져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엄청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지오쇼핑은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정 회장님의 배려에 보답하는 길이니까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떻게 해결할지 한번 고민해 봅시다.”

수혁과 유신은 결의에 찬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 사장님. 혹시 이영섭 전무님께 회장님과 대주주들 간에 미팅 계획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까?”

방법을 찾기 위해 한참을 고민하던 수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무래도 제가 직접 주주들을 만나 사업 설명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빨라야 내년 이맘때쯤에야 물류창고가 완공되기 때문에 대금이 밀려 공사 기간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이영섭 전무보단 정석호 회장님께 직접 연락을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정 회장님한테 보고될 사안이니까요.”

유신은 수혁이 석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싶긴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 회사의 사업성을 정식으로 증명해야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처럼 다이렉트로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다가는 내부에서도 말이 나올 겁니다.”

그는 석호의 추천을 받고 대주주 모임에 가는 것보다 제일물류 내부에서 어느 정도 논의가 이루어진 뒤에 참석해야 잡음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 이영섭 전무님한테 일단 연락을 드려 보겠습니다.”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일정이 잡히면 저한테 바로 알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보고를 마친 유신은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갔다.

‘후, 주주들이 내가 오는 걸 받아 줄까? 아니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수혁은 오랜만에 지오쇼핑 기획안을 꺼낸 다음 예상 질문과 보완해야 할 점에 대해 궁리했다.

‘스마트폰 대중화랑 물류창고 완공 전까지는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 주주들을 기다릴 수 있게 할 만한 방안을 모색해 보자.’

이날, 수혁은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서 고민하다가 새벽이 다 돼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7월이 되었다. 삼성동에 위치한 제일물류 본사에서는 한 남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주들이 올 때까지 10분 정도 남았군.’

정석호 회장은 예정에 없었던 주주 미팅을 위해 건물 2층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괜히 대표님을 수고스럽게 만든 거 같아서 미안하네. 내가 알아서 정리해야 하는 문제인데…… 이 전무가 주제넘은 행동을 했어.’

이영섭 전무는 수혁이 주주들을 설득하게 만들어 회사 내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석호는 회사의 내부 사정을 지오쇼핑에 알린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 강 대표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능력만큼은 최고니까 잘하실 거야.’

석호는 지금 같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심 수혁이 어떤 방식으로 대주주들의 공감을 얻어낼지 궁금하기도 했다.

“회장님, 강수혁 회장 측에서 11시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먼저 대주주들과 대화를 나눠야겠군요.”

수혁은 SH그룹 대표로서가 아니라 지오쇼핑의 회장 자격으로 회사에 방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회장의 호칭을 쓰고 있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김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10시 30분이 되자 사람들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석호는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보통 회사들의 경우에는 주주들이 소집권을 발동해서 모임이나 총회를 여는데, 회장님께서 친히 연락을 주시니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석호에게 말을 건네는 남자는 황현석이라는 자였는데, 지분의 1퍼센트 이상을 소유한 대주주를 넘어 주요 주주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다른 분들도 오시는데 황 사장님을 어떻게 안 부를 수 있겠습니까?”

“대주주들이 참석하는 모임이라고 하셨는데, 보아하니 대주주들이 아니라 주요 주주분들에게만 연락을 돌리셨네요?”

현석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회사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참석하는 구성원의 수가 너무 적으면 소액 주주들의 비판이 거셀 거 같아서 포장을 좀 했습니다. 주요 주주도 어쨌든 대주주의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대주주 요건을 충족하는 주주들은 족히 10명 이상은 되었으나 석호는 이날 3명의 주요 주주들만 불러 지오쇼핑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했다. 주요 주주는 주식 총액 중 10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가진 자를 일컫는 말로, 대주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연락을 받지 못한 대주주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텐데요?”

“뭐,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황 사장님은 그저 편하게 이야기를 듣고 제일물류를 위해서 조언을 해 주시면 됩니다.”

석호는 현석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터라 점잖게 선을 그었다.

“회장님, 이제 회의를 시작하셔도 됩니다.”

“알았네. 좀 있다 시간 맞춰서 강 회장님만 잘 모시고 오게.”

“네, 회장님.”

석호의 지시를 받은 비서는 회의실을 나갔고 방 안에는 주요 주주들과 정 회장만 덩그러니 남았다.

“급하게 연락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지오쇼핑 투자 건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석호는 테이블에 설치된 마이크에 입을 대고 모두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 18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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