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SH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지오쇼핑이 지난 5월에 론칭한 이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SH그룹의 강수혁 대표님께서 지오쇼핑 회장직을 맡음으로서 조금은 기대해도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석호는 의례적인 형식들은 모두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뭘 기대해도 된다는 거죠? 월 매출 20억이 지오쇼핑의 현실인데 애써 포장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현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공격적으로 말했다.
“SH에는 지오닷컴, SH스터디 외에도 여러 개의 계열사가 있습니다. 그룹의 오너인 강수혁 대표께서 특정 계열사의 회장에 취임하셨다는 이야기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지오쇼핑을 각별히 살피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받은 돈이 있으면 그 정도 성의를 보이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강 대표님은 평범한 분이 아닙니다. 비록 제일물류의 자금이 수천억 이상 들어갔지만 대부분의 비용은 인프라 건축에 들어간 것으로 지금 상황으로만 함부로 재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석호는 은근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현석의 언행에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저도 그 점은 이해합니다. 현재 지오쇼핑 측에서 전국에 유통망을 구축하느라 엄청난 비용을 투입하고 있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김 사장님 말씀대로 지오쇼핑은 현재 토대를 다지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봐야지 이렇게 급하게 평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발언을 한 남자는 문영식이라는 사람으로, 석호와는 십 수년동안 친하게 지낸 우군과도 같은 자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국내 최고의 유통 업체에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기업에 투자한 행위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장님, 그건…….”
영식은 석호가 사업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뭔가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정 회장님의 안목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강수혁 대표에 대해 알아본 결과 회사를 운영하는 능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더군요. SH스터디와 지오닷컴을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업계 최고의 회사로 성장시킨 건 순전히 강수혁 대표의 실력 때문이겠지요.”
“사장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비록 지오쇼핑이 동종업계의 회사라고는 하나 강수혁 대표라면 거액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석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훗날 제일물류와 경쟁할 수도 있는 회사를 우리 돈으로 키워 준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 투자의 대가로 일정량의 지분을 받았다던데 그 수치가 어떻게 됩니까?”
“후…… 현재 제일물류는 지오쇼핑의 지분 중 30퍼센트를 양도받은 상태입니다.”
“뭐요? 수천억을 건네준 대가로 고작 30퍼센트를 받아왔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형석은 터무니없다는 얼굴을 하며 석호를 쳐다봤다.
“그 부분은 차차 해명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을 느낀 석호는 주주들을 설득하기보다는 그들의 분노를 달래 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회장님, 지오쇼핑의 기업 가치는 잘 쳐 줘 봐야 100억 남짓 하는 회사일 뿐입니다. 물론 물류창고들이 완성되고 사업이 확장되면 자산이 큰 폭으로 증가하겠지만 우리한테는 여전히 손해일 겁니다.”
“면목 없습니다.”
석호를 신뢰했던 영식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회사 지분의 40퍼센트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의견을 듣지 않고 지오쇼핑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셔도 될 겁니다. 하지만 납득할 만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시에는 주주총회 때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석호를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명학 상무의 말이 맞았어. 정 회장은 회사보다는 인간적 의리로 강 대표를 지원해 줬던 거야.’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석호를 보며 생각했다.
* * *
지금으로부터 3주 전, 명학은 현석에게 접근하여 제일물류에서 거액의 자금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려 주었다.
“황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일송유통에서 일하고 있는 이명학 상무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제가 아는 그분이 맞습니까?”
“네, 저의 할아버지가 일송그룹의 이경욱 회장님이십니다.”
명학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귀한 집 자제분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듣기로 황 사장님께서 보이지 않는 큰 손이라고 들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굴지의 기업들 중에 사장님의 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더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입니다.”
현석은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최근에 제일물류의 정석호 회장이 거액의 돈을 융통했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정 회장이야, 원래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과 상의도 없이 불쑥불쑥 일을 벌이고는 하지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정 회장은 사업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회사와 형편없는 조건으로 투자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세히 말해 보세요.”
느긋하게 대화를 듣던 현석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최근에 제일물류에서 천억 원 가량의 자금이 빠져나갔는데…….”
명학은 물 만난 고기마냥 지오쇼핑과 제일물류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일전에 입수한 내부문건 덕분에 이들 간에 벌어졌던 계약 내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정 회장 이 사람,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먼.”
“사장님께서 갖고 계신 제일물류의 지분이 상당한 것으로 압니다. 황 회장이 사장님과 어떤 상의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요.”
“흠,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그는 현석의 감정을 교묘하게 격동시키고 있었다.
“저한테 이런 중요한 사안을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당장 주주들에게 연락을 돌려 정 회장의 횡포를 말해 줘야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 이번 기회에 사장님과 친분도 쌓을 겸 해서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우리 일송을 한 번만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 은혜는 어떤 식으로든 갚겠습니다.”
명학은 삼촌인 정수가 지오쇼핑에 대해 경계심을 보이지 않자 홀로 행동에 나선 것이었는데, 우연히도 주요 주주 중 하나인 현석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날 이용하려는 게 훤히 보이지만 정석호 회장을 견제할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현석은 명학이 순수한 의도에서 접근한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유용한 정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 * *
“회장님, 대답을 해 보세요. 전망도 밝지 않는 회사에 무리하게 투자를 한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지금, 그는 명학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석호를 문책하고 있었다.
“…….”
“계속 말 안 하실 겁니까? 오늘 납득이 갈 만한 답변을 듣기 전까지 저는 이 자리에 계속 있을 겁니다. 다른 주주님들은 몰라도 저는 다릅니다.”
“잠시만, 전화 좀 받겠습니다.”
벨이 울리는 것을 들은 석호는 테이블에 부착된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저, 회장님 강수혁 대표님께서 막 도착하셨습니다.”
“이쪽으로 모셔오세요.”
‘후, 일단은 한숨 돌릴 수 있겠어.’
현석의 끊임없는 질타에 스트레스를 받던 석호는 직원의 보고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 앞에 도착한 수혁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주주분들께서 지오쇼핑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와서 설명을 드려야지요.”
수혁은 석호와 악수를 하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회장님께서 꽤나 고생하신 모양이야.’
수혁은 석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소개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SH그룹의 강수혁 대표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수혁입니다. 오늘은 그룹의 대표가 아닌 지오쇼핑의 회장으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면 마음껏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혁은 주주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강 대표가 온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았습니까?”
현석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회사 내부의 일이라 우리끼리 일을 처리하려고 했으나 대표님께서 주주님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셔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석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대표님이 오셨으니 대화가 더 쉬워지겠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비록 내부에서 처리할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투입된 자금이 적지 않기 때문에 대표님에게 직접 설명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석을 제외한 두 주주들은 수혁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크흠, 저도 강 대표의 방문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았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다음부터는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호는 현석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딱 봐도 저 사람이 가장 까탈스러워 보이네.’
서류 가방에서 자료들을 꺼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수혁은 황현석을 예의주시하며 생각했다.
“회장님, 주주님들께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석호는 마이크를 수혁에게 넘겼다.
“이 종이들을 보고 몇몇 분은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 사안들을 모두 정리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들을 쭉 말하기보다는 질문이 들어온 것들 위주로 답변을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는 편이 더 효율적일 거 같군요.”
“맞습니다. 핵심만 들으면 되지 굳이 모든 걸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주주들은 대체적으로 수혁의 의견에 찬성하는 듯 보였다.
‘저 둘에게서는 설득의 여지가 좀 보이네. 다행이다.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
수혁은 현석을 제외한 다른 주주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편하게 질문받겠습니다. 누구부터 말씀하시겠습니까?”
“저부터 질문하겠습니다.”
현석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을 번쩍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실례일 수도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정 회장님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저하고 회장님은 사업상 파트너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수혁은 석호와의 관계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믿을 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회장님께서 대표님과의 친분 때문에 투자를 결정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지금 말장난합니까? 대표님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이 자리에서 투자가 철회될 수도 있습니다. 신중하게 답변하세요.”
현석은 언성을 높이며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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