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대표님,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황현석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문영식도 점잖게 요청했다.
“정확하게 말하려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왔을 뿐입니다. 사장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잠시만요, 왜죠?”
영식은 화를 내려는 현석을 제지하고 재차 질문했다.
“회장님께서는 투자를 하시기 전에 우리가 제공한 사업 기획안을 꼼꼼히 검토하셨습니다. 즉, 황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친분 때문에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절반이 맞은 건 어떤 의미입니까?”
“만약 두 사람이 똑같은 기획안을 제출했다면 회장님께서 절 선택하셨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주님들께서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제일물류 정도 되는 기업에서 금융투자를 하는 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수혁은 그들의 질문에 여유롭게 대처했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묻습니까? 지분의 비율이 7 대 3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혹시 대표님께서 회장님의 약점이라도 갖고 계신 거 아닙니까?”
현석은 본격적으로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7 대 3이라는 비율이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말이죠.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지오쇼핑이 도약할 것을 고려하면 투자하신 원금은 충분히 회수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자신감이 지나치시군요. 7,000억 규모의 금액을 투자받으신 분이 이리 뻔뻔하게 나오시니 할 말이 없습니다.”
“사장님께선 30퍼센트의 지분이 계속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입니다?”
수혁은 현석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했다.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보십쇼. 창립 자본금의 대부분을 투자한 회사가 30퍼센트의 지분을 받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절반은 주셨어야지요.”
“30퍼센트는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닙니다. 지오쇼핑이 비록 자본금이 부족해 제일물류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사업을 주도하는 어느 회사가 투자자에게 50퍼센트의 지분을 양도합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눈여겨봤던 인터넷 쇼핑몰이 하나 있었는데 해당 기업은 지오쇼핑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회사였다.
‘재일교포였던 일본인 자산가가 3조 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하고 40퍼센트의 지분을 가져왔는데 30퍼센트가 적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수혁은 주주들이 던질 수 있는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준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대표님의 말씀이 옳다고 해도 지오쇼핑이 성공할 거라고 어떻게 믿습니까?”
“내년에 물류센터가 완공되고 유통망이 가동되기 시작하면 회사의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될 겁니다. 비록 5월 매출이 20억에 그친 것은 사실이나, 현재 우리는 내년에 있을 사업 확장을 위한 토대를 닦고 있는 거지,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 하나만은 청산유수시네요. 수익을 어떻게 창출할 거냐고 묻는데 계속 추상적인 답변만 하시니 당황스러울 따름입니다.”
현석은 수혁의 대답을 두고 비아냥거렸다.
“안 그래도 대략적인 사업안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대략적인 건 필요 없으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아까부터 왜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립니까?”
‘아예 작정하고 나온 모양인데……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수혁은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대답에 답답함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상세히 말씀드리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죠?”
말없이 대화를 지켜보던 영식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회사의 영업 기밀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영업 기밀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말씀해 보세요.”
“사장님, 왜 이렇게 강 대표에게 호의적입니까? 무슨 꿍꿍인지 제대로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현석은 영식의 발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직 안착하지 못한 회사로부터 구체적인 판매 전략을 밝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황 사장님 못지않게 제일물류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니, 혹여나 지오쇼핑의 편에 서지 않을까와 같은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일단 들어 보도록 하죠.”
영식의 말에 머쓱해진 현석은 손에 턱을 괴고 수혁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지오쇼핑은 물류센터의 완공 시점 전까지는 상품 라인을 갖추는 데만 주력할 겁니다. 우리 회사의 목표는 고객들이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가지 않더라도 물건을 구매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트나 백화점만으로도 물건 판매가 잘 되고 있는데, 업체 입장에서 굳이 온라인으로 물품을 판매하려고 들겠습니까?”
“사업자라면 고객의 취향을 잘 파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오프라인에서의 쇼핑을 선호하긴 하지만, 취향이라는 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지오쇼핑이 온라인 구매에 관한 고객들의 수요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군요.”
영식은 현석과 달리 수혁의 말을 삐딱하게 듣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대화에 임했다.
“그렇습니다. 유통망이 완성되고 여느 매장에 뒤지지 않는 상품 라인을 갖추게 되면 지오쇼핑의 폭발적인 성장을 보시게 될 겁니다.”
수혁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대표님의 말씀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군요. 저에게 여유 자금이 있다면 지오쇼핑에 당장 투자를 하고 싶을 정도예요.”
“하하, 문 사장님도 그렇게 느꼈습니까? 말씀을 어찌나 잘하시는지 저도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어 버렸습니다.”
현석을 제외한 두 명의 주주들은 수혁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대표님이 나서니까 상황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아.’
옆에 있던 석호도 수혁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투자에 대한 주주들의 반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 사업체로 어떻게 다양한 상품을 취급할 겁니까? 기껏 해 봐야 고객들이 올리는 중고 상품을 중개하는 것으로 수익을 내겠지요.”
하지만 한 사람, 황현석만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현재 많은 기업들과 논의를 하고 있고, 유의미한 결과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사안이라 당장은 만족시켜 드릴 수는 없겠지만 실망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세한 과정은 기밀 사안이라 말씀 못 드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죠. 알아서 하세요.”
정중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현석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표님께서 훌륭한 비전을 갖고 계시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오쇼핑과 제일물류 사이에는 커다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수혁을 호평했던 영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양 회사 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간다.’
수혁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지오쇼핑과 제일물류는 공교롭게도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지오쇼핑이 성장하게 되면 투자자의 입장에선 큰 이득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제일물류가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우려하시는 점이 뭔지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수혁은 꽤나 곤란할 만한 질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통계에 따르면, 수없이 많은 유통 업체들과 국민의 대다수는 물건을 보낼 일이 있을 때 제일택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오쇼핑이 커진다 한들 사람들이 택배 업체를 바꾸는 일은 없으리라 장담합니다.”
“과연, 그렇군요.”
영식은 수혁의 말을 단숨에 이해했다.
“그리고 지오쇼핑에서 택배를 하는 것은 맞지만 주된 업무는 주문을 받은 상품을 배달하는 거지, 특정 회사나 사람들의 물건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즉, 지오쇼핑의 성장이 제일물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수혁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데는 전생의 기억이 한몫했다. 2015년 이후로 일본 자본의 투자를 받은 인터넷 쇼핑몰 회사가 커다란 붐을 일으켰지만 유통 업계에서 부동의 1위는 언제나 제일물류의 차지였다.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지오쇼핑과 제일물류는 같은 유통 업체인 건 분명하나 주 분야가 달라 충분히 공존할 수 있을 듯 보입니다.”
“아닙니다. 제일물류의 주주로서 당연히 들 수 있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하려던 부분까지 사장님께서 다 말씀해 주셔서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네요.”
“하하,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어 버렸군요.”
영식은 수혁의 넉살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로 가다간 정 회장의 뜻대로 일이 끝날 거 같은데 어떡하지?’
현석은 주주들과 수혁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 궁금증도 거의 다 해결된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내내 말없이 있던 석호는 투자 건에 대한 이슈를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었다.
‘흐름이 우리한테 나쁘지 않아. 이 기회를 잘 잡아야 돼.’
그는 지오쇼핑과 관련하여 더 이상의 잡음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짧은 만남이라 대표님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오쇼핑을 훌륭히 경영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회장님의 선택을 지지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식을 포함한 두 명의 주주는 지오쇼핑 투자 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황 사장님은 어떤 입장이십니까?”
석호는 현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을 거 괜히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반대 의사를 표현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현재까지 나온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지오쇼핑에 대한 투자를 중단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금일 참석해 주신 주주님들과 강수혁 대표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끝으로 오늘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중에 또 보지요.”
용건을 마친 주주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대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3일 내로 자금이 입금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석호는 수혁에게 말을 건넸다.
“곧 있으면 대금을 납부해야 했는데,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저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석호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장님의 통 큰 결정이 없었다면 지오쇼핑은 설립조차 어려웠을 겁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이번 일로 스트레스가 극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후, 이미 지나간 일, 곱씹어 봤자 뭐 하겠습니까?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근처에 잘 아는 식당이 있는데.”
“저야 좋지요. 가시죠.”
미팅을 잘 마무리한 수혁과 석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 18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