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대표님, 작년에 저랑 식사하기로 약속한 건 언제쯤 지키실 거예요?”
“하하, 회사 일이 워낙 바빠서 짬을 내기가 쉽지가 않네요.”
7월 중순의 어느 오후, 수혁은 광고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스튜디오에 방문해 광고 모델인 황혜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광고를 찍으셔야 한다고 해서 다른 스케줄들을 다 빼고 온 건데…… 너무 아쉽네요.”
“제 딴에는 혜미 씨를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이곳에 왔는데 죄송합니다. 혜미 씨께 불편한 건 없을지만 생각하다 보니, 식사 약속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바쁘다고 하시는데 어쩔 수 없죠. 후, 남은 씬들 촬영하러 가 봐야겠어요. 수고하세요.”
“네, 혜미 씨.”
그녀는 급작스럽게 잡힌 촬영 일정을 아무런 불만 없이 소화했는데, 보통 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때문에 다른 약속을 깨면서까지 와 줬는데 식사라도 해야 되나?’
수혁은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덕분에 촬영이 성사된 것을 알고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아무래도 고마운 마음이 커서 고민되는 면이 있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식사는 좀 그렇고 가볍게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그는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오전부터 스튜디오에 계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전부터 진행된 광고 촬영은 저녁이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촬영 감독, 그리고 광고 업체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홍보팀장은 보고를 하기 위해 수혁에게 다가왔다.
“회장님, 황혜미 씨가 잘 협조해 준 덕분에 무사히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까칠하고 콧대가 높아서 같이 작업하기 까다로운 분이라고 들었는데 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소문은 원래 다 과장되기 마련이지요.”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과 광고회사에서 콘티를 잘 짠 덕분에 촬영이 수월하게 이루어진 거지요.”
“하하, 업체 측에서 광고 컨셉의 대부분이 회장님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면 크게 놀랄 겁니다.”
수혁은 촬영 기법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미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광고 안에 들어갈 연출과 대사와 같은 부분을 상세히 적어 홍보팀에 전달했고, 팀장은 이를 바탕으로 업체와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편집이 아직 덜 되긴 했지만 촬영된 영상을 보니 제가 준 컨셉안보다 훨씬 세련되게 구성을 짜셨던데요?”
“아무래도 업체 측의 의견도 반영하다 보니 약간의 수정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회장님께서 주신 아이디어 덕에 시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방송국과의 광고 계약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사장님께서 긴밀하게 접촉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광고를 촬영하는 사이 유신은 송출 일정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진행하면 7월 말이나 8월 초에는 광고를 보낼 수 있겠습니다.”
“7월이 지나가기 전에 방송을 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팀장은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대로 바로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보통 때라면 회사에 들른 후 퇴근해야 했기에,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촬영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신 줄 알았는데 계속 남아 계셨네요?”
수혁은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혜미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조금 냉담했다.
“식사하기엔 혜미 씨가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가볍게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네? 정말요? 어디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어요?”
촬영하는 동안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해 있던 혜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되찾았다.
‘그냥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딜 가면 좋을까?’
혜미와 같은 톱스타와 일반 카페로 갔다가는 소란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고, 기자들의 눈에 띄어 스캔들 기사라도 나면 그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자주 가시는 카페가 있습니까? 일행 없이 둘이 다니는 거라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고민되네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지인들이랑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거기라면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일단 차로 가시죠. 위치만 알려 주시면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네, 그럼 그전에 미리 연락을 해야겠네요.”
“연락이요?”
“특별한 건 아니고, 자리를 예약하려고요.”
혜미는 핸드폰을 꺼낸 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흐베인? 한남동에 있는 호텔 이름 아닌가?’
“호텔로 가시는 건가요?”
“네. 종종 거기서 식사나 커피를 마셨는데, 분위기도 괜찮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거든요.”
“그렇군요.”
목적지를 확인한 수혁은 혜미를 데리고 차에 탑승한 뒤 바흐베인 호텔로 이동했다.
‘지하로 내려가라는 건가? 지상에 주차 공간이 많은 것 같은데 굳이 왜 저리지?’
호텔 근처에 도착한 수혁은 입구에서 수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발견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 주세요. 내려가면 직원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하죠.”
수혁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진짜네?’
차를 주차하고 내린 수혁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고객님, 이쪽입니다.”
“네?”
“괜찮아요. 저분을 따라서 가면 어딜 가는지 알게 될 거예요.”
수혁은 영문 모를 상황에 당황했지만 태연한 반응을 보이는 혜미의 모습에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었어?’
직원은 주차장 안쪽에 위치한 철제문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카드를 대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금으로 도금이 된 승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카드를 찍고 층을 누르면 되죠?”
“네. 그럼 좋은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직원은 혜미가 안내사항을 숙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문밖으로 나갔다.
“많이 와 보셨나요?”
“그냥 잠깐잠깐 쉬려고 온 게 다예요.”
혜미가 금속판에 카드를 찍은 뒤 ‘VIP’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한동안 잘 안 오시더니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실장님은 잘 지내셨나요? 못 본 사이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이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VIP룸을 관리하는 자로 이름은 박효정이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외모만큼은 황혜미한테 뒤지지 않는 것 같네.’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 위에 롱코트를 걸쳐 입은 효정은 섹시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옆에 있는 잘생긴 청년은 누구신가요? 설마 만나고 계신 분인가요?”
“아, 소개를 드려야겠군요. 이분은 SH그룹의 강수혁 대표님이세요.”
“아! 듣고 보니 뉴스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것 같네요. 반가워요. 전 바흐베인의 VIP라운지를 관리하고 있는 박효정이라고 해요.”
효정은 고혹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강수혁입니다.”
“대표님,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이곳은 보안을 관리하는 곳이라서 게스트들은 방명록을 작성하셔야 해요.”
“그렇군요. 어디에다 적으면 됩니까?”
혜미의 말을 들은 수혁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고객 보안 차원에서 게스트들은 방명록을 작성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강수혁 대표님은 신원이 보증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 제 친구랑 왔을 때 하고는 대접이 다르시네요? 걔도 나름 알려진 애였는데 엄하게 대하셨잖아요.”
“그때는…… 게스트께서 본인을 몰라보냐며 생떼를 쓰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혜미는 약 한 달 전에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걸그룹 멤버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효정은 그녀의 지인에게 방명록 작성을 강제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연예계 쪽에는 관심이 없어, 지인분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따지려고 물은 게 아니라 신기해서 여쭤본 거예요.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렇게 하세요. 김 대리, 고객님들을 잘 모셔 주세요.”
“네, 실장님. 따라오시죠.”
효정은 직원을 시켜 수혁과 혜미를 자리로 안내했다.
‘저 사람이 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강수혁 대표란 말이지? 티비보다 실물이 훨씬 나은데?’
그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혁에게 호감을 느꼈고, 방명록 작성을 건너뛰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었다.
“저 언니가 저럴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왜 그러시죠?”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하는 혜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니에요. 평소랑 좀 다르신 것 같아서요. 어떤 것 드시고 싶으세요?”
그녀는 메뉴판을 집어 수혁에게 건넸다.
“메뉴가 많네요. 온 김에 식사도 같이할까요?”
“훗, 저야 좋죠.”
메뉴판에는 커피와 음료 외에도 스테이크와 파스타 등의 먹을거리도 적혀져 있었다.
수혁은 가볍게 커피만 마시려고 했지만, 긴 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라 이곳에서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저기요.”
“네, 손님.”
메뉴를 정한 수혁과 혜정은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다.
“경치가 예쁘네요.”
“가끔씩 혼자 올 때도 있는데 와인 한잔하면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수혁은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가 훤히 보이는 전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주문하신 음료와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웨이터는 테이블 위에 음식과 음료를 세팅했다.
“자, 드시죠.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마음껏 드세요.”
“감사해요, 대표님.”
수혁과 혜미는 식사를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수혁이 있는 테이블에 멈춰서더니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황혜미랑 강수혁 아니야?”
“어? 진짜네?”
‘휴, 피곤하게 됐네.’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수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명학이었는데 국내 제일의 항공사인 한국항공의 외동아들 조형욱과 술을 마시다가 이들을 발견하곤 다가온 것이었다.
“사람들 이목도 있으니까 조용히 가는 게 어때?”
수혁은 저명한 인사들이 오가는 VIP라운지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명학은 보통 때와 달리 목소리를 낮추고 점잖게 말했다.
“혜미야, 실망이다? 내 연락은 받지도 않더니 수혁이랑 여기서 데이트나 하고 있고 말이야.”
“그러게, 우리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도 않는 애가 웬일이래?”
옆에 있던 형욱은 명학을 거들며 나섰다.
“오늘 촬영이 있었는데 끝나고 식사만 잠깐 하는 거야.”
혜미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서로 불편한 사이인가?’
수혁은 혜미의 표정 속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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