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이명학은 재벌그룹 자제라는 신분을 이용해 여자 연예인들과 종종 만나곤 했다. 하지만, 여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기보단 유흥을 즐기기 위한 존재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연예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안 좋았다.
‘정하나 선배가 이명학에게 맞서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명학은 가끔 친분이 있는 연예인들을 술자리에 호출했는데 툭하면 불러대는 그의 행동에 불만을 가진 배우 하나가 직언을 했지만, 취기가 오른 그는 경청하기는커녕 폭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소속사부터 기자들까지 누구 하나 선배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어. 괜히 건드렸다가는 나만 손해야.’
결국, 피해를 본 배우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활동을 중지했고, 명학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건을 넘길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일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권력층 자제들의 잘못에 대해 눈감아주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따라서 평소 자기주장이 강하고 당당한 그녀라도 일송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명학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우리가 부를 때는 다 씹더니 강수혁하고는 잘도 만나네?”
“방금 말 못 들었어? 촬영 끝나고 밥 먹는 거 가지고 웬 트집이야?”
보다 못한 수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넌 좋겠다? 대한민국 톱스타 황혜미랑 식사도 하고, 사업도 탄탄대로니 말이야. 아, 지오쇼핑은 예외지? 들어 보니까 상황이 많이 힘들다던데?”
명학은 지오쇼핑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강의 사정은 파악해 둔 상태였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이정수 회장님은 잘 계시지?”
“물론이지, 삼촌은 너희 회사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더라.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쁘신데 너 같은 걸 신경 쓰겠어?”
“요즘 보니까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때도 너랑 같이 안 다니시던데? 또 사고라도 친 건 아닌지 몰라? 우리가 이래 봐도 동기잖아? 같이 잘돼야지.”
수혁은 6월 말경에 한국기업인연합 모임에서 정수를 만났다. 물론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명학을 대동하지 않은 사실에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너만 잘하면 될 거 같은데? 업계에서 왕따를 당해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아주 파다한 건 알고 있지? 이번 기회에 나한테 잘 보여 봐. 혹시 알아? 내가 도와줄지.”
“풋, 고맙다. 집안에서 머저리 취급을 당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돕는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마음은 잘 받을게.”
수혁은 최대한 매너 있게 대응하려고 마음먹었었지만, 명학과 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자식이…….”
명학은 수혁이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대표님, 그, 그만 하세요.”
혜미는 그의 난폭한 성격이 두려운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수혁을 말렸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지?”
“이봐, 너. 명학이가 이경욱 회장님의 손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거지? 어른들 말씀대로 앞뒤 분별을 잘 못 하는 녀석이네?”
“초면인 거 같은데 반말이나 찍찍 내뱉는 걸 보면, 그쪽도 말 섞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군요.”
수혁은 조형욱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혜미야,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오지?/ 만약 이대로 강 대표랑 계속 있으면 우리가 많이 서운해질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설마 일송과 한국항공이 SH보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수혁의 강한 눈길에 위압감을 느낀 형욱은 방향을 선회하여 혜미를 공략하려고 했다.
“혜미 씨는 SH그룹의 전속 모델입니다. 우리 회사가 비록 일송이나 한국항공보다 더 우수한 기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혜미 씨를 감당할 능력은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와 약속한 시간입니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가세요.”
“그쪽이랑 일하는 거보다 우리랑 함께하는 게 혜미에게 훨씬 이득이지 않을까요?”
반말을 지적받았던 형욱은 은근슬쩍 말을 높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잘 모르겠습니다. 쟤도 그렇고, 당신이 회사 내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아야 판단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만 가 주실래요? 식사를 마저 해야 되거든요.”
“들은 대로 말은 청산유수네요. 알겠습니다.……그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을지 두고 보겠습니다.”
스물두 살에 불과한 형욱은 아직 회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강수혁, 오늘 일은 잊지 않을 거다. 약속 하나 하지. 네 계획이 무엇이든, 지오쇼핑은 절대 클 수 없을 거야.”
“거듭 말하지만 걱정해 줘서 고맙다. 이젠 가서 볼일이나 보지 그래?”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날이 있을 거다. 데이트나 잘해라.”
“데이트가 아니라 가벼운 회식이니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말고.”
수혁은 명학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재수 없는 새끼. 백날 노력해 봐라. 지오닷컴 때처럼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명학은 수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형욱을 데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후, 대단하시네요. 저 둘에게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본인들이 판단할 때 당장은 저를 어쩌지 못하니까 그냥 간 거지, 기본적으로 경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감탄하는 혜미와 달리 수혁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감사드려요, 대표님. 많이 바빠 보이시는데 오늘은 이쯤에서 일어날까요?”
“커피가 아직 남으신 거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저도 내일 가야 하는 행사가 있어서 준비를 좀 해야 되거든요.”
‘어차피 대표님하고는 이루어지기 힘들 거야. 더 이상 부담되게 하지 말자.’
혜미는 수혁의 발언을 통해, 자신을 향한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도록 하죠.”
“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내려가시죠.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닙니다. 숙소가 바로 근처라서 매니저를 불러도 될 거 같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계산 먼저하고 오겠습니다.”
수혁도 굳이 시간을 더 끄는 것보단 지금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시끄러운 일이 있었긴 했지만 오늘 즐거웠습니다.”
“바래다 드리지 못해서 마음에 걸리네요.”
“아니에요. 매니저가 지금 근처까지 왔다고 연락이 왔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네, 혜미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작별인사를 마친 수혁은 라운지를 빠져나와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지오쇼핑이 일송유통 때문에 유통 업체들과 원만히 지내지 못한 건 맞지만…… 뭘 믿고 저렇게 확신하는 거지?’
그는 명학의 말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보면 되니까 일단은 집에 가서 좀 쉬자.’
수혁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 * *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었다. 월드컵의 열기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사동 거리를 돌아다니며 주변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주말을 맞아 아침부터 회사에 있던 수혁은 평우를 만나기 위해 인사동에 위치한 풍월당이라는 찻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수혁아, 여기다.”
“네, 금방 갈게요.”
풍월당 앞에서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평우는 멀리서 수혁을 알아보고는 아는 체를 했다.
“마침 잘 왔다. 내 소개하지, 이쪽은 나중에 내 대신 고서를 대신 맡게 될 아이야. 미리 얼굴들 익혀 놓으라고.”
“안녕하세요.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수혁은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노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일전에 형님께서 말씀하신 손자분이지요? 인물이 훤칠하니 아주 잘생겼네요.”
“앞으로 우리랑 종종 만날 일이 생기겠군요.”
“그래, 잘들 지내라고. 수혁아, 이 사람들은 인사동에서 고서와 골동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오늘 고서들을 살필 겸 잠깐 만났는데…… 이렇게 인사들 하게 돼서 기분이 좋구먼.”
“형님, 손주께서 사업을 하지 않습니까? 예전에 티비에서 이름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절모를 쓴 남자는 수혁을 긴가민가하며 쳐다봤다.
“맞아. 수혁이는 현재 SH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회사 대표야. 자네 SH스터디라고 들어 봤어? 인터넷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회산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하더라고.”
“회사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 손녀가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야, 능력 있는 손자를 두셔서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하하 이 사람, 쑥스럽게 왜 이래?”
평우는 쑥스럽다는 말이 무색하게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자, 이만 들어들 가 보라고. 조금 이따 아들이랑 차 한잔하기로 했거든.”
“네, 형님.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강 대표, 나중에 또 봐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혁은 노인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춥지? 안으로 들어가자. 석호는 아마 10분 내로 도착할 거다.”
“네, 할아버지.”
배웅을 마친 평우는 수혁을 데리고 풍월당 안으로 들어갔다.
“국화차 3잔만 주세요.”
“네. 앉아 계시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뒤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석호한테 들었는데 최근에 쇼핑몰 사업하느라 많이 바쁘다면서?”
“평소보다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건 맞지만 바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수혁은 평우가 행여 걱정할까 봐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사업은 잘되고 있고?”
“회장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회사를 차리긴 했지만 아직은 고전 중이에요.”
“일송 녀석들이 너를 귀찮게 하고 있다는데 사실이냐?”
“대학 동기 중에 이경욱 회장의 손자가 있는데 그 녀석이랑 마찰이 좀 있어서 그렇지, 크게 신경 쓰진 않고 있습니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잘하고 있는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구나.”
평우는 지오쇼핑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주어진 일을 묵묵히 처리하다 보면 언젠간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정도를 걷는 사람은 주변의 모략이나 음해에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하는 것처럼 너의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점점 좋아질 거니까 스트레스 받지 마라. 어, 저기 온 것 같구나.”
그는 찻집 안으로 들어오는 석호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막히는 바람에 조금 늦었습니다.”
“차는 시켜 놨으니까 이리 와서 앉아라.”
“네, 아버지.”
석호는 평우가 있는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번 기회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아야겠어.’
명학과의 만남 이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던 수혁은 석호를 통해 사태를 파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이전에 우리 회사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니까 거의 한 달 만에 뵙게 되는군요.”
석호는 활짝 웃으며 수혁에게 악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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