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190화 (190/316)

190화

“뭐야, 날 빼두고 둘이서만 만난 일이 있었어?”

“하하, 사업상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 번 만난 게 다입니다.”

평우가 짐짓 서운한 척을 하자, 석호는 넉살 좋게 웃어넘겼다.

“수혁아, 원래 너랑 나 둘이서만 볼 줄 알았는데 이 녀석까지 같이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오랜만에 다 같이 담소도 나누고, 따로 여쭤볼 것도 있어서요.”

수혁은 석호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우를 통해 만나기로 결정했었다.

“이제 보니 나보다는 내 아들을 보러 연락한 거였구먼.”

“그렇긴 하지만 보는 김에 할아버지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드린 거예요. 서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희들끼리 서로 잘 지내면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그래,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평우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준비라도 하고 왔을 텐데…… 답변을 못 드릴까 봐 괜한 걱정이 드는군요.”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근에 이명학을 만났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수혁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모임의 목적을 솔직하게 밝혔다.

“이 상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군요.”

“보통 때라면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넘길 일이긴 한데 최근 회사 상황이 녹록치 않으니까 괜히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무덤덤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수혁이 계속 뜸을 들이자, 석호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일송유통이 우리와 척을 지는 바람에 지오쇼핑은 유통 업체들과 원만한 관계를 못 맺고 있는 실정입니다.”

“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병섭 회장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일송이 주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엘마트도 그렇고, 제일물류에서 지원을 해 준 덕에 몇몇 업체들과 어렵게나마 계약을 맺고 상품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혁은 석호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매출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경욱 그 양반이 다혈질이긴 해도 꽁하거나 쪼잔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참 의외구나?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 그릇이 고작 그 정도라니, 쯧쯧…….”

이야기를 듣던 평우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이경욱 회장보다는 주변 측근들이 나서서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만 해도 일송유통의 이정수 회장이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유통 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업이라면 그 명성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텐데 소인배 같이 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평우는 얼굴을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다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회장님, 유통 업계에서 지오쇼핑을 은근히 따돌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점이 회사가 성장하는 데 치명적으로 작용할까요?”

수혁은 석호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대표님이 운영하는 지오쇼핑의 경우 유통할 수 있는 상품의 수가 늘어야 경쟁력이 강해지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활로가 모두 막혀 있으니까요.”

“어째서 그럴까요? 제조업체들이 유통 업체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도 엄연히 이득을 추구하는 기업인데 어째서 우리를 외면하는 거죠?”

그는 제조업체들이 온라인 판매를 통해 크든 작든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온적인 반응만 보이는 게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일송이 관심을 갖지 않는 회사들은 지오쇼핑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겠죠.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업체들의 경우에는 눈치가 보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네, 현재 업계 내에 공공연하게 지오쇼핑을 비난하는 여론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계약을 맺었다가는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후, 짐작은 했지만 참 황당한 일이네요. 특정 기업의 알력으로 이 지경이 되다니…….”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송을 중심으로 한 대형 유통 업체들은 중견 기업들과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 기업들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 제조 업체들 입장에서는 지오쇼핑과 관계를 맺는 게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인에게 우연히 들었는데 일송유통의 이명학 상무가 지오쇼핑이 마트와 백화점과 같은 유통 기업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며 끊임없이 음해를 한다고 합니다.”

“협회 모임 때 충분히 해명한 것 같은데…… 여전히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군요.”

석호의 말을 들은 수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지오쇼핑이 실제로 유통업계에 해악을 끼치냐 안 끼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업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여론을 뒤집을 만한 대책을 찾지 못한다면 지오쇼핑의 앞날은 밝다고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는 평소 직언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방금 하신 말씀들 잘 새겨듣겠습니다. 사실 주변의 시선이나 말들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고 지냈는데 생각보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군요.”

수혁은 턱에 손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수혁아, 이럴 땐 정보가 중요한 법이다. 나한테 믿을 만한 정보통이 몇 있는데 일송유통에 대해서 한번 알아봐 주랴? 수세에 몰렸을 땐 가만히 있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는 게 무척 중요하거든.”

평우는 수혁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긴 한데, 웬만큼 믿을 만한 분이 아니고서는 일송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일송의 기밀 사안을 알 정도의 자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저도 대표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행여나 뒷조사하셨다는 걸 걸리게 되는 날에는 일송그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석우는 아버지가 무모한 행동을 하실까 걱정스러웠다.

“일송 놈들은 한 트럭을 가져다 놓아도 아무렇지 않다. 이미 다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무서울 게 뭐냐?”

“일송을 뒷조사하는 건 하면 제가 했지, 할아버지한테 위험한 일을 맡길 순 없어요. 직원들과 함께 나름대로 전략을 짜 볼 계획이니까 이번 일은 믿고 지켜봐 주세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께 바로 말씀드릴게요.”

이야기를 하는 수혁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흠, 다들 이리 걱정하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일단 알겠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라.”

“네, 우리 이제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즐거운 이야기 좀 해요. 조금 전에 뵀던 사장님들과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수혁은 침울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인사동에서 오래전부터 고서랑 골동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는 애들인데 나랑은 아주 막역한 사이지.”

“아, 어르신들은 잘 지내십니까?”

석호는 찻집 앞에 있던 노인들을 아는 눈치였다.

“걔들이 벌써 어르신 소리를 들을 나이인가? 하긴, 우리가 안지 벌써 50년이 다 돼가니 그럴 만도 하겠어. 처음 만났을 때가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평우는 신이 나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날 수혁과 일행들은 저녁이 다 되도록 대화를 나누었고 근처에서 식사까지 한 뒤 헤어졌다.

* * *

‘후,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적어도 물류센터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 되는데…….’

명학의 공작으로 인해 큰 낭패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수혁은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뚜렷한 해법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똑똑 노크와 함께 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죠? 제가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데 나중에 오시면 안 될까요? 혹시 급한 용무인가요?”

수혁은 그가 왜 방문했는지 궁금했지만,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이제 막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터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 급한 건 아닙니다. 엘마트 관련으로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서……. 조금 이따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유신은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방 안에서 수혁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이거야 원, 안 들을 수가 없잖아.’

엘마트와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지오쇼핑의 초반 명운을 가름할 수 있는 중요 사안이기 때문에 이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바쁘신데 괜히 방해를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 긴급한 내용은 아니라 있다 들으셔도 무방한 사안입니다.”

문을 열고 고개를 삐쭉 내민 유신은 수혁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엘마트와 관계된 일이라면 바쁘더라도 들어야지요.”

수혁은 손을 저으며 이야기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유신은 곧장 방안으로 들어와 보고를 시작했다.

“비록 급하게 진행된 작업이었지만 지난 7월 31일을 기점으로 공중파에 광고를 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잘됐군요.”

그는 티비를 잘 보지 않은 탓에 광고가 오픈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용을 마련하는 게 여의치 않았는데 회장님께서 사비를 제공해 주신 덕분에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신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SH의 일이 곧 제 일입니다. 오너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수혁은 사비를 털어 지원한 사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혜미 씨의 영향력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직원의 보고에 따르면 광고가 나간 이후 매출이 10배 이상 증가했다고 합니다.”

“고객들이 온라인 구매가 편리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거 아니겠습니까?”

40초짜리로 제작된 광고는 사이트에서 물건을 주문한 고객이 1시간 이내로 배달받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마트에 직접 가지 않아도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었다.

“회장님이 의도하신 대로 광고를 통해 서비스의 효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점이 크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에 공감했다.

“지오쇼핑은 대중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낮기 때문에 타 업체와 협력을 하는 프로젝트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를 내야 합니다. 아직 완전한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수혁은 평소 이 정도의 성과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지오쇼핑의 경우 다른 사업과 달리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오늘 아침에 엘마트에서 연락이 왔는데 임원들을 중심으로 온라인 판매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한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앞으로 2주간 매출 추이를 더 살펴본 후 결정하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혹평 일색이었던 이전과 달리 긍정적인 기류가 조금씩 흐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유신은 협업을 하면서 친해진 엘마트 관계자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해 주었다.

- 19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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