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대표님께서 그동안 고생하신 것들이 결실을 맺나 봅니다. 임원들 사이에도 점점 호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앞으로는 아낌없이 지원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 올 연말까지 해서 사업을 정리해야 되는데 이리 좋아하시니…… 말을 꺼내기가 힘들군.’
수혁은 만면에 화색을 띠며 덕담을 건네는 병섭을 착잡한 심정으로 쳐다봤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
병섭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불편한 건 전혀 없습니다. 단지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잠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신 겁니까?”
“사실, 오늘 회장님을 찾아뵙게 된 이유가 바로 그 사업 건 때문입니다.”
수혁은 말을 돌리기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본 병섭은 수혁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올 거라는 걸 직감했다.
“네. 저는 빠르면 11월, 늦으면 연말 중으로 온라인 마트 사업에서 손을 떼려고 합니다.”
“아니, 지금 잘 돼 가고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 수수료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안 그래도 오늘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던 참이었습니다.”
병섭은 매출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업을 중단하려고 하는 수혁의 선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설사 큰 수익이 기대된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엘마트에 피해를 줄 생각은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업에서 철수하시면서 생길 수 있는 피해야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뭣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혁의 의도가 가늠이 되지 않았던 이병섭 회장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일전에 회장님께서 여론을 반전시켜야 지오쇼핑이 살 수 있다고 조언해 주신 것을 참고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엘마트와 협업을 포기하는 것과 여론을 뒤집는 것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저는 타사들과의 상생은 고려하지 않고 혼자 이익을 추구한다는 편견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과 별도로 타인이 그렇게 여긴다면 억울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더군요.”
수혁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저는 다소 피해가 따르긴 하겠지만 유통 업체들에게 온라인 마트의 경영 방식과 노하우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는 회장님의 회사에 민폐를 끼치는 행동임이 분명하나 제가 갖고 있는 선택지가 많이 없더라고요.”
“흠, 잠시 고민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대표님의 입장은 이해가 되나 저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약을 중간에 깨는 것도 모자라 타 회사에 영업기밀을 넘겨준다는 말이 회장님께 불쾌하게 들리는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수혁은 고개를 숙이고 침울하게 말했다. 10여 분의 시간이 지났다. 병섭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빠져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중이었다.
“저는 대표님을 단순히 사업적 파트너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마냥 정으로 사안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입니다. 제 의견을 그냥 받아들이셨다가는 내부의 반발이 만만치 않겠지요.”
“그것뿐이겠습니까? 지오쇼핑은 든든한 우군을 잃어 더 큰 손해를 입게 될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유감이지만 좀 더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말을 마친 병섭은 속이 답답한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엘마트에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나름대로 생각을 해두었습니다. 온라인 마트를 운영하실 지점에 대한 사이트를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회사 내에 엘마트 카테고리를 두어 고객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만들겠습니다.”
수혁은 찾아오기 전에 엘마트를 위한 포석을 다 세워 둔 상태였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내부의 반발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는요, 당연히 해 드려야 되는 거였는데요.”
수혁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온라인 마트가 활성화되면 다른 업체들도 덩달아 사업에 뛰어들 겁니다. 그 전에 먼저 앞길을 다져 두시면, 다른 업체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건 물론, 온라인 마트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장담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11월 중으로 철수하려 했지만 12월까지 기한을 연장한 건 엘마트에서 인수인계를 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설명을 들은 병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어차피 업체들이 다 따라 할 거라면 기왕 포기하는 거, 타 회사들에게 선심을 쓰자는 마음이 컸습니다.”
“처음엔 의구심이 든 건 사실이지만 말씀을 들어 보니 탁월한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엘마트는 대표님의 계획을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업체들에 공개할 자료들 외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영업 아이디어는 엘마트에만 따로 드리고 떠나겠습니다.”
“이거야 원, 도리어 대표님께서 너무 큰 희생을 하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요.”
이야기 초반엔 실망스러운 감정이 역력해 보였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미안해하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보아하니, 회장님은 내 뜻을 밀어주실 거 같아. 후, 이젠 정석호 회장님만 따로 찾아뵈면 되겠어.’
대화가 수월하게 풀린 것을 확인한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좀 이른데 양주 한잔하시겠습니까? 출장을 다녀오면서 귀한 술을 하나 구해 왔거든요.”
병섭은 뭐라도 대접하려는 마음에 선반에서 술을 꺼냈다.
“가볍게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차후 일정이 딱히 없던 수혁은 흔쾌히 승낙했고 저녁이 될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 * *
8월 11일 일요일 아침, 수혁은 차를 몰고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휴일에 총장님께서 무슨 일이시지?’
수혁은 한국대 총장 이경률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여긴가?’
적당한 곳에 주차를 마친 수혁은 대학 본부에 있는 총장실 앞에 도착했다.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혁이 문을 노크하고 얼마 있지 않아 머리가 희끗하고 금테 안경을 쓴 노인이 수혁을 반갑게 맞았다.
‘방이 상당히 크네?’
방에 들어서자 손님들이 대기할 수 있는 의자와 참모들이 사용하는 책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왼편에는 총장실로 통하는 문이 하나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어젯밤에 갑자기 전화를 받으셔서 많이 놀라셨죠? 저에게 절친한 동생이 하나 있는데 강수혁 학생을 꼭 보고 싶다고 해서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부르게 됐습니다.”
‘총장이라는 분께서 사적인 용무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다니 조금 당황스러운데?’
“지인께선 어디 계십니까?”
“지금 총장실에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수혁 군 입장에서도 이번 만남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총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혁을 안내했다. 이날은 휴일이었던 탓에 비서가 없어 그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이보게 아우, 자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강수혁 대표가 왔네.”
“아! 안녕하십니까? 현재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정우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마사토모로 불리고 있지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김정우면…… 설마 그 사람인가?’
중년의 신사를 본 수혁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정우는 ANA그룹의 대표였는데, 대표적인 자회사로는 일본 최대의 통신사인 ANA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경욱 회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자라던데, 이런 거물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김정우가 경영하는 ANA그룹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으로 재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했고, 지오쇼핑을 설립할 때 참고했던 회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저, 뭐라도 한 말씀 하시죠.”
이경률 총장은 정우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는 수혁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SH그룹의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에 올 때면 종종 형님네 집에서 하룻밤 묵곤 하는데 우연히 대표님의 이야기를 듣게 돼서 만남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수혁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이 친구랑 저는 2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김 회장이 먼저 대표님의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소파에 앉은 경률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진행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한·중·일을 오가며 인상적인 기업이 있는지 살펴보곤 했습니다. 한동안 눈에 띄는 회사가 없어 실망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미래지향적인 회사를 발견했지요.”
“저희 SH그룹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군요.”
수혁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대번에 알아챘다.
“맞습니다. 교육 사업으로 시작했던 SH가 얼마 안 가 포털시장에 진출하고, 유통 계통까지 손을 뻗는 것을 보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사들을 면밀히 살펴봤는데 놀라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더군요.”
정우는 SH스터디가 안착한 2001년부터 수혁의 행보를 지켜봤기 때문에, SH그룹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대표님께서 오늘 안 오셨으면 아쉬울 뻔했습니다. 이 친구가 이렇게 열중하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요.”
경률은 이들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수혁을 대표로 호칭하며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옆에 형님도 계시는데 나중에 따로 뵐 수 있을까요? 대표님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아니야, 난 개의치 말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이 자리는 셋을 위한 자리이니 둘 간의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거 참, 알겠네. 편한 대로 하게.
김정우는 더 대화를 나누어도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단둘이 만났을 때 나누고 싶었다.
“제가 대표님을 이 자리에 부른 건 김 회장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7월 말에 멘토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 멘티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대표님께서 최고의 멘토로 선정되셨습니다.”
“멘티분들이 저를 좋게 봐줬다니....... 참 감사한 일이네요.”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조만간 경영대 행정실에서 표창장과 소정의 상품을 드릴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대표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
“네, 말씀 하세요 총장님.”
경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지?’
수혁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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