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답변이 있긴 하지만, 정해진 정답은 없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나가토모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양국의 학생들은 침묵을 지킬 뿐 누구 하나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망신당하면 어떻게 해?’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가, 말하기가 좀 그렇네?’
학생들은 저마다 생각해 놓은 답변이 있었지만 튀어 보이기 싫은 나머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하,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드린 걸까요? 가볍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다들 너무 신중하시네요. 그럼, 대답은 다음에 듣는 거로 하죠.”
방 안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느낀 나가토모는 서둘러 다음 순서를 진행하려고 했다.
“투자를 하는 입장에서, 회사를 선정할 땐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저라면 회사의 발전 가능성과 아이템의 참신성을 가장 먼저 확인할 것 같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수혁은 발언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답변을 내놓았다.
‘간단한 인사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일본어를 제법 잘하잖아? 그런데 학생들도 가만히 있는데 단장이라는 사람이 왜 끼어드는 거야?’
사토는 수혁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투자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두 가지 특성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나가토모는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전무님의 질문을 듣고 제가 투자자라면 어떤 회사를 선호할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투자를 했을 때 가장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위해서는 발전 가능성과 참신성을 가진 회사를 탐색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쳇,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저 정도 대답을 못 하는 사람도 있나? 아무래도 기를 좀 죽여 놔야겠어.’
사토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단장님이 하신 말씀은 얼핏 들었을 때는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허점이 있는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토 상, 미안하지만 제 질문은 정답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의견을 제시하는 건 좋지만 상대의 견해를 공격하는 건 자제해 주세요.”
나가토모는 그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자제시켰다.
“아닙니다. 저는 사토 씨의 생각이 무척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토론을 통해 더 나은 의견이 도출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괜찮으시다면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뭘 믿고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거지? 어디 들어나 보자.’
수혁은 사토의 도발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대화를 나눠 보세요.”
나가토모도 내심 이들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했기 때문에 수혁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투자 기업을 선택할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되는 요소는 수익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발전 가능성과 참신성을 언급하셨는데 도대체 어떤 자료로 그런 특성들을 갖췄는지 판단하실 겁니까?”
‘제법 날카로운 걸?’
수혁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사토를 여유롭게 바라봤다.
“수익성의 경우에는 통계 자료를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예상 수익을 산출하는 방식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참신함, 발전 가능성 같은 이야기는 미래학자나 인문학도들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지 투자하는 입장에서 고려하기엔 너무 추상적인 조건입니다.”
“귀한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전 가능성과 참신성이라는 단어가 수익성보다는 다소 추상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다각도로 분석한다면 해당 특성을 갖췄는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각도로 분석한다고요? 도대체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사토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시간 관계상 전부 나열하긴 어렵기 때문에 가장 간단한 것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신하면서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건, 쉽게 말해 타 기업들과 차별화되고 대중들의 기호에 부합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제가 투자 회사라면 포털 사이트들로부터 자료를 받아 대중들의 관심, 선호 등을 먼저 알아볼 것 같습니다. 즉, 최신 트렌드와 앞으로 유행할 것이 뭔지 미리 알아놓는다는 이야기죠.”
수혁은 평소에도 사업 아이템을 기획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막힘없이 술술 설명할 수 있었다.
“포털 사이트의 어떤 자료로 트렌드를 유추하신다는 거죠”
“대표적으로 검색어 빈도수를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탐색해 보는 습성이 있거든요. 3개월 치를 통계 내면 한 해의 트렌드를 알 수 있고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치의 통계를 내면 대중의 기호가 어떻게 변하고 미래에는 어떤 게 유행할지도 추측할 수 있을 있습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어로 토론이 가능하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
‘양쪽 다 틀린 말은 아닌데, 한국인 단장의 말이 뭔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이네.’
양국의 학생들은 수혁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음……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지만, 어느 기업도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누군가 해보고 효용이 드러날 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혁은 디지털 정보를 모으고 해석하는 빅데이터 분석 기법을 통해 경영상의 결정을 종종 내렸는데, 이는 2002년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지오닷컴에서 매달 분석 보고서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걸 공개하면 괜히 피곤해질 거야. 여기까지만 하자.’
토론에서 이기겠다고 일본 학생들에게 굳이 기업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진 않았기에, 수혁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이쯤 했으면 토론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다른 학생들도 있으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남았으면 나중에 하도록 하죠.”
“정말 잘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상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질의 토론에서 깊이 있는 통찰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회사를 운영하시게 될 때도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가토모는 토론에 대해 호평을 했다.
“단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방금 예시로 드신 키워드를 분석하는 방식은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고, 트렌드를 파악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생각해낸 아이디어입니다.”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들었던 빅데이터에 관한 개념을 차용했지만 이 자리에서는 말할 수 없기에 거짓말을 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네요.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은 우리 회장님께서 최근에 우리에게 지시한 내용과 많이 흡사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우리 부서는 원래 앞서 사토 군이 말한 것처럼 수익성과 각종 경제 통계를 분석하여 기업을 선정했고,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회장님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경제 지표가 괜찮은 곳들은 대부분 우량기업이었기 때문에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 가성비가 좋지 않았거든요.”
“참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저도 투자하는 입장에서 고민을 해보니 회장님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거든요.”
수혁은 정우가 미래에 사용되는 방법을 고안했다는 점에 살짝 놀랐다.
“하지만 투자의 본질은 대박을 노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금융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리는 헤이즈사의 엘빈은 투자를 하는 기본 원칙으로 ‘꾸준한 성장이 기대되고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건전한 기업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대박을 노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 대상을 모색했던 거죠.”
사토는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간다고 느끼자 대화에 끼어들었다. 헤이즈는 세계 최대의 금융투자회사로 수장인 엘빈은 MC소프트 회장 스티브 콜 다음가는 세계적인 부자였다.
“엘빈이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히든 챔피언을 찾아 투자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물론 히든 챔피언을 선정하는 기준에 방금 언급하신 안정성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효율적인 투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말씀이죠.”
‘히든 챔피언’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정 분야를 지배하는 우량 기업을 지칭하는 말로,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만든 개념이었다. 히든 챔피언은 인지도가 높은 기업들에 비해 저평가되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투자 가성비가 좋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끝까지 반박하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저렇게 고집만 세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수혁의 답변을 들은 사토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나가토모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자, 자. 제가 우리 회장님을 언급한 건 다음 순서를 진행하기 위해서였지, 토론이 가열되는 걸 바랐던 건 아닙니다. 다들 이쯤에서 마무리하시고, 설명을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2월 마사토모 회장님은 우리 부서에 데이터 관리팀을 창설하셨습니다.”
소현이 통역하는 동안, 나가토모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설명을 재개했다.
“저는 현재 회장님의 지시 아래 데이터 관리팀을 지휘하고 있는데요. 하는 업무는 방금 단장님이 말씀한 것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빅데이터 개념은 2010년이 지나서야 유행했던 거로 아는데……. 김정우 회장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수혁은 정우의 통찰력과 혜안에 탄복했다.
“우리는 인터넷에 있는 각종 커뮤니티와 포털에서 생성되는 디지털 자료들을 수집하고, 대중들의 취향과 트렌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그러고 나면 회장님과 자산운용팀은 보고서의 내용을 분석하여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데 그 효과가 정말 고무적입니다. 올해 들어 우리 회사의 투자 수익률은 배 이상 상승했고…….”
그는 정우의 기획을 토대로 ANA인베스트먼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다소 지루하셨을 수 있겠지만, 이 설명을 통해 어떤 기업이 매력적인지 알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서 트렌드에 부합하고 참신한 아이템을 가진 기업을 운영하게 되기를 바라며 발표를 이만 마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고, 나가토모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으며 빙긋 웃었다.
‘전무님은 왜 저 한국인 편을 드는 거지? 아무리 저놈 말이 마사토모 회장님의 견해랑 비슷하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면 가만히라도 계시지,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
사토는 나가토모가 대화의 말미를 수혁이 말했던 것들로 장식하자 배알이 틀리기 시작했다.
‘속이 꽤나 쓰린 모양이네? 그냥 단순한 세미나일 뿐인데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 거지?’
수혁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사토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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