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기본 틀은 갖춰져 있으니까 원하시는 문구만 생각하시고 기입하시면 됩니다.”
정우는 서류 한 장을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네, 신중하게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 종이에다 원하는 조항을 적을 건데 각자 완성이 되면 의견을 나누고 종합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혁과 정우는 계약에 들어갈 세부적인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중간중간에 의견을 나누며 수정, 보완했다.
“이 정도면 계약서로 충분해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추후 약간의 검토만 있으면 계약서로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수혁은 완성된 계약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저는 계약서를 쓰면 따로 복사해 두고 관리를 철저히 하는 편입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인이 남았군요. 저 먼저 하겠습니다.”
정우는 계약서 하단에 서명을 했고, 뒤이어 수혁도 사인을 마쳤다.
“하하, 계약서를 많이 써 보신 모양입니다? 우리 측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소송을 당할 수도 있겠는데요?”
“아는 변호사님과 작업을 몇 번 한 뒤로 요령이 생겨서 그런 거지, 별건 아닙니다.”
수혁은 정우의 능청에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우린 벌써 용건이 끝났는데 학생들은 아직도 돌아다니는 중인가 보군요. 시간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나가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김정우 회장은 나가토모에게 본사 탐방이 끝나면 바로 알려 달라고 말했지만,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는 상황이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전에 회장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일본의 경우 회장님이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이 안 되지만 중국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혹시 조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수혁은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콴시’라 일컬어지는 비공식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일본도 인맥이 중요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중국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흠, 안 그래도 사람을 한 명 소개시켜 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왕첸 씨라고, 현재는 중국문화연구재단의 이사장으로 계신 분이 있는데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그냥 연락을 드리면 되는 건가요?”
수혁은 핸드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보며 물었다.
“제가 나중에 따로 언질을 해놓을 테니 1달 정도 기다리셨다가 연락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중국의 유력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정우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 주어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은혜는 무슨요. 제가 두 분이 만나는 건 어떻게든 주선해 볼 수는 있지만, 이후는 오롯이 대표님이 어떻게 하냐에 달렸습니다.”
“죄송하지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왕첸 씨는 공산당에서 주요 자리를 맡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시고 원로당원 겸 재단 이사장으로 계시지만, 지금도 당내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하십니다.”
정우는 말을 하던 중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대화를 이어 갔다.
“높은 자리에 오래 계셨던 만큼 사람을 보는 안목도 까다로운 분이십니다. 특히 대표님의 경우에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 잣대가 더 엄격할 거고요.”
“회장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을 얻으셨습니까?”
“저와 이사장님의 인연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알고 지내던 중국인 기업가를 통해 우연히 소개를 받은 후 지금까지 연이 이어졌는데 마음을 사기까지 2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2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인데 흠…….”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저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왕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걸렸던 겁니다. 대표님께서는 이보다는 훨씬 빨리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이사장님께서는 능력 있고 유능한 사람보다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다.”
“그 기준이 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부터 절 가족처럼 대해 주셔서 마음이 열리신 걸 알아차렸을 뿐, 무엇을 계기로 그렇게 됐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정우는 정확한 답변을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해했다.
“마음이 열렸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저를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부를 때 이전보다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분 주변의 측근들만큼의 신뢰는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정우는 앞선 말과 충돌되는 이야기에 조금 민망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는 왕첸과 안면이 트이고 서로 친한 사이는 맞았으나 사업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말씀을 들어 보니 회장님도 왕첸 이사장의 사람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시기는 어려운 모양이네요. 올해가 지나기 전에 연락을 할 생각인데…… 긴장해야겠는데요?”
“허허, 차라리 이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죠. 제가 이사장님과 그 정도로 친했으면 중국 법인의 지분도 요구했을 겁니다.”
수혁이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농담을 던지자 그는 유연하게 이를 받아쳤다.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말 안에 뼈가 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누군가의 도움으로 관계를 맺기보다는 내 힘으로 개척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더 나으니까.’
은연중에 드러난 정우의 본심을 느낀 수혁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주눅이 들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연락처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의 일들은 스스로 고민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사안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저, 대표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조언이 있는데…….”
“네, 회장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계약도 했고, 중요한 논의도 대충 다 한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또 남으신 건가?’
수혁은 정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대표님은 회사를 상장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일전에 회사 내부에서 상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회사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고, 외부 투기 세력의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해서 좀 더 두고 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오쇼핑을 제외한 SH에듀케이션과 SH커뮤니케이션은 지금이라도 당장 코스피에 상장할 수 있는 기업들이고 그렇게 되면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될 텐데 자제력이 대단하시군요.”
“우리가 비록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생기업인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음, 저는 대표님께 SH에듀케이션을 상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는데 괜히 대표님의 경영 방침에 간섭을 하는 것 같아 조심하게 되네요.”
정우는 수혁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먼저 물어보시는 바람에 제 의견을 이야기한 것 일뿐, 충고를 받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마저 말씀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사실 굳이 상장을 하지 않아도 해외에 진출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넘어 평정하려는 욕심이 있다면 상장을 시켜 외부 기관과 투자자들에게 기업 정보를 어느 정도 공개해야 합니다.”
“제가 봐도 그렇게 하는 게 회사의 규모를 키우기에도 좋고, 외국 고객들의 신뢰를 얻기에도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 그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아마 SH 내부에서도 충언을 하는 직원이 있었을 겁니다.”
수혁이 고마운 마음을 표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계획에도 없던 일본행이었는데 뜻밖의 수확을 얻고 갑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충분히 준비하신 다음에 일을 진행하세요. 몇 달 늦는다고 잘될 사업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좋은 말씀, 거듭 감사드립니다.”
수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누가 보면 제가 대단한 거라도 준 줄 알겠습니다. 슬슬 일어날까요? 학생들이 막 탐방을 끝내고 1층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정우는 나가토모에게서 온 문자를 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두 사람은 회장실을 나와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많은 것을 얻어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여러분들이 한국과 일본을 이끄는 차세대 리더로 성장하길 기원하며, 이틀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층에 도착한 정우는 학생들 앞에서 마무리 발언을 했다.
“단장님, 혹시 식사는 하셨어요? 저희는 중간에 사내식당에 가서 점심을 해결했거든요.”
“아침을 많이 먹고 와서 배가 별로 안 고프네요.”
수혁은 소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뭘 드시면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는 거죠?”
“네, 그런데 남은 시간 동안은 뭘 할/하는/ 건가요?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까 내일 아침 10시 30분까지 공항에 도착하는 것 외에는 딱히 정해진 게 없더라고요.”
“오늘이 그래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아사쿠사 근방의 유적들을 구경하는 건 어떨까요? 저녁도 근사한 데서 먹으면 더 좋고요.”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어요? 원래 호텔에 남아 있는 걸 좋아하셨잖아요.”
“별 이유는 아니고, 첫 일본 여행인데 추억 하나는 남기고 싶어서요. 아, 그리고 저 대신 3일 동안 수고해 주셔서 조금 챙겨 드렸습니다.”
수혁은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낸 뒤 그녀에게 건넸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맡긴 것 같아 가슴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단장님.”
소현은 수혁이 주는 돈이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지만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처지라 마다하기 어려웠다.
“제가 더 감사하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네, 천천히 하고 오세요.”
수혁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정우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저희는 이만 호텔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먼 길 오셨는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됩니다. 다음에 뵙게 되면 같이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배려해 주신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나중에 또 연락드릴 테니 건강히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작별인사를 마친 수혁은 학생들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 수혁은 단원들과 함께 아사쿠사 곳곳을 관광했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20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