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뜨거웠던 8월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9월이 되었다. 열기로 가득했던 여름의 공기는 한풀 꺾여 아침저녁에는 청량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중요한 하루가 되겠어.’
수혁은 오랜만에 그룹 총회의를 하기 위해 강남에 있는 SH에듀케이션 본사에 와 있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정길은 회의실에 들어오는 수혁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저야 항상 똑같지요. 그것보다 회의 장소를 갑자기 바꾸셨던데?”
“지난번처럼 SH커뮤니케이션에서 회의를 열려고 했지만 나날이 커져 가는 회사를 생각하면 그나마 본사다운 건물을 가진 이곳이 제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선릉에 있는 임시 본사가 회사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급하게 장소를 변경했다.
“회의까지 이제 5분 정도 남았는데 들어가시겠습니까?”
“네, 들어가시죠.”
수혁은 정길과 함께 회의실에 안에 들어가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금일 회의의 사회를 맡은 SH에듀케이션의 박찬명 사장입니다. 회의 시작에 앞서 대표님 말씀을 짧게 듣고 가겠습니다.”
찬명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회의실에 한쪽에 설치된 단상에 서서 진행을 했다.
“작년 연말 이후 정말 오랜만에 그룹 회의를 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 우연한 기회로 일본에 다녀왔고 ANA그룹의 김정우 회장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1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SH의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보고 왔습니다.”
‘김정우 회장이면 재일교포 출신 기업인 아닌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시게 된 거지?’
‘ANA그룹이면 일송도 한 수 접어주는 회사인데…… 그런 거대 기업과 어떤 논의를 하신 걸까?’
수혁이 정우의 이름을 언급하자 방 안에 있는 임원들은 눈을 크게 뜨며,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했다.
“김정우 회장님께서는 이전부터 SH에듀케이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고, 급기야 지난 만남에서는 해외진출을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진지한 논의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자리에서 투자 계약을 맺었습니다.”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이제 우리 SH는 더 잘될 일만 남았군요?”
“그렇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만 해도 국내 시장보다 3배 이상 큰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잘 살리면 SH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수혁이 해외 진출을 언급하자 임원들은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님, 축하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 한정길 부대표는 들떠 있는 다른 임원들과 달리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물론입니다. 일단 이와 같은 결정을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점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전 그저 해야 할 일을 빨리 파악하려는 마음에 여쭤본 겁니다.”
수혁은 문득 임원들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정길을 비롯한 측근들은 그가 여태까지 보여 준 통찰력과 사업적 혜안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계약 내용의 골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정우 회장님은 SH에듀케이션이 일본과 중국에 진출할 때 드는 모든 비용을 대주신다고 하셨고, 그 대가로 일본에 세울 법인 지분의 40퍼센트를 양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음,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조건이긴 하지만 40퍼센트면 조금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온라인 교육 시장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지 않고, 그나마 강사를 영입할 때나 분점을 개설할 때만 돈이 들어가는데…… 넉넉히 계산해도 2천억 안팎 정도지, 40퍼센트의 지분을 넘겨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정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도 사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현재 SH에듀케이션의 매출은 1조 5천억에 달하는데 일본 시장에 안착만 하게 되면 적어도 배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ANA에서 매년 배당으로 가져갈 금액을 생각하면 수지에 안 맞습니다.”
보통 때라면 수혁의 말이면 무조건 찬성하는 찬명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사실 금전적인 부분만 생각한다면 ANA의 도움 없이도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여력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국 기업에 배타적인 고객들을 고려해야지요.”
“중국의 경우에는 인적 네트워크 없이 사업을 벌이는 게 어렵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은 자체적으로 진출해도 별 무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SH에듀케이션이 국내 사교육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손해를 않으면서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찬명은 SH의 역량이라면 ANA의 도움 없이도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사장님, 제가 하나만 묻겠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한국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음, 아무래도 자신들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일본에서 먹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일본 국민들은 한국 기업이라고 하면 낮게 평가하는 기류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수혁은 SH가 국내에서나 높은 위상을 지닐 뿐, 일본에 가면 평범한 한국 기업이라는 것을 주지시켰다.
“하지만 ANA와 같이 협력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지요. 일본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자 회사들과 자동차 회사들이 있는데 ANA의 인지도는 그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거든요.”
“흠, 확실히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이 직접 투자한 회사라는 소문이 돌면 신뢰도 구축 면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겠군요.”
대화를 듣던 정길은 처음으로 수혁의 말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뿐이 아닙니다. 협력사를 찾는 것부터 인력을 채용하는 부분까지 ANA와 함께하면 훨씬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분을 준 대가로 해외 진출에 들어가는 비용 외에 받아온 것이 더 있습니다.”
‘생각보다 반발이 심해 놀랐는데, 이제야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네.’
수혁은 정길과 찬명의 태도가 점차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애당초 김정우 회장님께서는 SH에듀케이션만을 고려하고 투자를 제안하셨지만, 저는 SH 내의 다른 자회사들도 적극적으로 도와달라는 부탁을 드렸고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오, 그럼 지오닷컴과 지오쇼핑도 일본과 중국에 론칭할 수 있는 겁니까?”
회의 내내 조용히 있던 유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중국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김용민 본부장님은 최필재 팀장과 상의해서 메신저 사업의 해외 진출을 검토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혹시, 포털 쪽은 아직 시기상조인 겁니까?”
용민은 수혁이 주력 사업인 지오닷컴을 언급하지 않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일본의 포털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고, 중국은 포털 사업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내린 결정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SH에듀케이션뿐 아니라 다른 자회사들까지 협상안에 포함시켰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찬명은 수혁의 협상 능력에 감탄했다.
“SH에듀케이션만을 위한 계약이었다면 그룹 회의를 왜 열었겠습니까? 임원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내년 상반기 중에 중국과 일본에 법인을 론칭할 계획이니,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만반의 준비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대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각 계열사 임원들은 저마다 굳은 각오를 다졌다.
“우선 일본을 중심으로 시장 조사를 먼저 시작하세요. 우리의 서비스가 현재 국내에서는 잘 먹히고 있다곤 하나, 취향이나 선호 분야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중국은 일본을 먼저 공략하신 다음에 진출할 계획이십니까?”
찬명은 수혁이 중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요. 비슷한 시기에 법인을 설립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제가 확실히 해 둬야 할 것이 있어 잠시 보류하는 것뿐입니다.”
수혁은 중국으로의 진출은 왕첸과 만나고 나서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해외 법인 설립에 맞춰 주식을 상장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전 찬성입니다. 회사가 커지다 보니 투자자들의 문의도 점차 늘고 있고, 상장을 하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작지 않기 때문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
“저도 찬성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것, 미리 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고 봅니다.”
첫 안건 때와 달리 상장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은 임원은 없었다.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이르면 내년 상반기 늦어도 하반기 초쯤에 주식을 상장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참고로 지오쇼핑은 아직 신생회사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네, 대표님.”
유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준비해 온 안건을 모두 처리한 수혁은 이후에도 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룹 차원에서 조율해야 할 문제들을 처리했고, 회의가 끝난 후에는 오찬 자리를 열어 친목을 다졌다.
* * *
9월의 어느 오후, 수혁은 수업을 마치고 찬식과 함께 강의동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찬식아, 요즘 바빠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 얼굴 보기가 힘드네?”
“어? 그건 원래 내가 너한테 많이 하던 말인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난 대학 3년 내내 네 얼굴 보기 힘들었으니까 조금만 이해해 줘라.”
수혁은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때는 주로 찬식과 함께 먹었는데 이번 학기에는 함께 식사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좀 쉬어가면서 해라. 얼굴이 되게 피곤해 보이는데?”
“최근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느라 정신이 없기는 해.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수혁아 난 가 볼 데가 있어서 먼저 갈게. 나중에 보자!”
찬식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갔다.
‘뭐 때문에 저러지? 궁금한데 한번 물어볼까? ……아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수혁은 내심 그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고 싶었으나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박유신 사장이 웬일이지?’
이날, 수혁은 일본에서 함께했던 단원들이 뒤풀이를 한다는 말에 들를까 고민하다가 유신의 연락을 받고 회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네, 저 왔다고 사장님께 알려 주세요.”
그는 직원에게 지시를 내린 뒤 회장실에 들어가 유신을 기다렸다.
“회장님, 접니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수혁은 책상에서 일어나 응접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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