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아, 미안. 이명학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찬식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후, 그냥 들어간 걸 보면 못 들은 거 같아.”
수혁은 명학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조심하는 거죠?”
“이명학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이정찬 부회장의 아들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혜선은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반문했다.
“맞아요. 저 친구가 일송그룹 이경욱 회장의 손자 이명학입니다. 우리랑 경영대 동기이기도 하고요.”
“재벌집 자제가 룸살롱 가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그녀는 수혁과 달리 명학의 등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일송 집안의 사람이 강남도 아니고 대학가 근처에 있는 룸살롱에 출입한다고요? 격에 안 맞다는 생각 안 드세요?”
“그래. 뭔가 수상해. 아무래도 그냥 막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찬식은 수혁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그렇다고 마냥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잖아? 애써 왔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명학이 있는데 주점에 들어가는 건 섣부른 행동이에요. 차라리 다른 곳에서 증거를 모으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수혁은 답답해하는 진태를 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일일 수도 있겠어. 자칫 잘못 건드려서 일송이 개입하는 날에는 죽도 밥도 안 될지도 몰라. 어떻게 하면 좋지?’
그는 일송의 힘이 얼마나 큰지 사업을 하면서 체감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학생회와 아무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명학이 주점에 나타났다는 건 사안이 우리 예상보다 더 중대하고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단은 대학가에 있는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증인과 증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는 게 어떨까요?”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혁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는 자신의 지인들이 일송의 표적이 되는 것만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시는지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진태 씨, 다음 가게로 이동하시죠.”
“아, 네. 따라오세요.”
혜선의 말에 진태는 대학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혁아 넌 안 와?”
찬식은 전봇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혁을 보며 물었다.
“응, 난 상황을 좀 지켜보다가 합류할게. 다 같이 돌아다닐 필요도 없는 것 같고.”
“그렇게 하세요. 지금이 4시니까 7시쯤에 처음에 봤던 카페에서 보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혜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다른 일행들은 증거를 확보하러 다른 가게로 떠났고, 그는 홀로 남아 주점 근방을 계속 주시했다.
‘이명학이 있는 룸살롱에 들어가면 경계심만 키울 뿐, 어떤 소득도 얻을 수 없을 거야.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보자.’
수혁은 주점 근처를 배회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지하에서 걸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되든 안 되든 시도라도 한번 해 보자.’
수혁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이 씨, 쓰레기는 왜 맨날 나한테 버리라는 거야?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종업원은 인상을 잔뜩 쓴 채 품속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놈들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쪽을 줘?’
그는 샤인스타에서 일한 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고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샤인스타에서 일하시나 봐요?”
“……누구신데 그걸 묻는 거죠?”
남자는 가뜩이나 예민한 상태인데 수혁이 말을 걸어오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주대가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서요.”
“흠, 뭐 대충 다른 가게랑 비슷비슷한 정도입니다. 정 궁금하시면 나중에 가게에 오셔서 확인하세요.”
‘이 사람은 우리 가게에 올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그는 세련된 외양과 부티 나는 차림새를 한 수혁이 가격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인스타는 학생이 즐기기에는 부담이 되는 주점이긴 했지만, 부자들이 오는 유흥주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이었다.
“시간 되면 친구들이랑 한번 가 보려고요. 이런, 날도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수혁은 한쪽에 놓인 쓰레기 더미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봐요. 할 일 없으면 갈 길 가세요. 젠장 누굴 놀리나?”
그는 수혁을 흘겨보며 가게로 들어가려고 했다.
“혹시 명학이를 아십니까?”
“네? 아, 넵. 그렇습니다.”
‘뭐야? 이명학 이야기를 꺼내니까 왜 이렇게 당황하지?’
수혁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대답하는 종업원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저, 죄송하지만 사장님 친구분 되십니까?”
“저랑 서로 잘 아는 사이입니다. 대학 동기거든요.”
“사장님 지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말씀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이명학이 샤인스타 사장이란 말이지? 보아하니 종업원들 군기는 확실히 잡은 모양이네?’
수혁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제가 뭣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네, 사장님. 말씀하세요.”
그는 어느새 수혁을 사장으로 호칭하며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샤인스타에 한국대 학생들이 종종 오는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크흠, 저 죄송하지만 저는 사장님이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라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확실한데 이명학이 무서워서 말을 못 하고 있군. 이럴 땐 또 방법이 있지.’
수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종범이라고 합니다.”
“종범 씨, 명학이가 평소에 잘 대해 주던가요? 아까 보니까 잡일이나 시키는 것 같던데?”
“아,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속내를 들킨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깊게 볼 거 없어. 딱 봐도 의리 있는 스타일은 아니야. 게다가 이명학의 성격상 아랫사람들의 원성을 들을 확률이 높은 걸 고려하면 한번 찔러 봐도 되겠어.’
그는 사업을 하며 쌓은 경험과 통찰력으로 사람을 그런대로 잘 파악하는 편이었다. 수혁은 머릿속에서 잠시 할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현우라고……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죄송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흠,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저는 한국대 학생회에서 샤인스타에 종종 들린다는 것을 다 알고 온 겁니다. 명학이가 해코지할까 봐 말씀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왔는지 여부만 알려주시면 제가 이걸 드릴게요.”
수혁은 지갑에서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냈다.
‘이게 웬 거야?’
종범은 애당초 이명학에게 어떠한 호감도 갖고 있지 않았고 궂은일을 하는 것에 비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았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가게에 온 적이 있는지만 말씀드리면 되는 거죠?”
“그렇다니까요? 이야기 내용에 따라서 더 드릴수도 있으니까 아는 데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수혁은 남자의 눈앞에서 수표를 흔들며 말했다.
“현우가 어떤 단체인지는 모르겠는데…… 종종 가게에 와서 놀고 가는 사람들이 있긴 했습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수혁은 핸드폰의 녹음기를 오래전부터 틀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 했다.
“한 달에 두세 번씩 사장님께서 한국대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즐겼는데, 계산이 끝나고 장부에 뭐라고 적어야 하냐고 물어보니 ‘현우’로 적어 두라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명학은 학생회랑 연관이 있었던 거야. 슬슬 다음 스텝으로 진행해야겠는데?’
“종범 씨. 제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뭔데요? 한번 말씀해 보세요.”
이십만 원을 받은 종범은 이전에 비해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진 상태였다.
“방금 말씀하신 장부에서 현우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수혁은 말을 함과 동시에 지갑에서 100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꺼냈다.
“장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준 걸 걸리면 사장님한테 죽을 수도 있어요. 전 못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저한테 전송만 해 주시면 되는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영수증도 따로 보관하고 계시죠?”
“장부에 다 붙여 놨긴 했지만 영수증은 진짜 안 됩니다. 하루도 안 지나서 사장님이 알아차리실 거예요.”
남자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수증은 재출력하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영수증까지 가져다주시면 100만 원을 더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는 수혁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
수혁은 1시간 가까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룸 세팅하고 청소까지 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남자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수혁이 있는 곳으로 왔다.
“사진은 찍었어요?”
“번호만 알려 주시면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번호가 어떻게 되냐면…….”
수혁은 종업원에게 번호를 알려 줬고, 그는 즉시 사진들을 전송했다.
“좋네요. 일단 100만 원 먼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수증은 가져오셨나요?”
“아, 네 우선 장부에 붙어 있던 것들은 다 챙겨 왔습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영수증 더미를 꺼낸 다음 수혁에게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자, 약속대로 돈을 더 드리죠.”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일을 그만두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뜻밖의 말을 들은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명학이 언젠간 이 사실을 알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종범 씨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이제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안 그래도 불안해 미칠 뻔했는데 안 되겠어요. 이 돈 가져가세요.”
“이명학한테 말하는 건 종범 씨 자유지만, 돈이라도 잘 챙기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어차피 그놈 성격상 저랑 만난 걸 알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수혁은 필요한 것을 모두 얻은 상태라 거리낄 것이 없었다.
“…….”
“약속한 것보다 좀 더 넣어 두었으니까 다른 직장을 알아보세요. 어차피 이명학이랑 같이 있어 봤자 좋을 일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후, 알겠습니다.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수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다음 힘없이 주점으로 돌아갔다.
‘저 사람한테는 미안하게 됐지만, 증거를 확보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거참, 되게 찜찜하네…….’
수혁은 보통 때와 달리 편법을 써서 문제를 해결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 버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만 가 볼까?’
할 일을 마친 수혁은 약속 장소인 카페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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