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07화 (207/316)

207화

“어제 대학가에 있는 여러 사장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고석현 씨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학생회 임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협박을 가했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협박이 아니라 그분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폰을 제공한 겁니다. 학생회 일을 안 해 보셔서 모르시는 모양인데, 모임이나 회식을 특정 식당에서 하는 대신 술이나 음료를 무료로 제공받는 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관습 같은 거예요.”

석현은 인상을 쓰며 혜선에게 반박했다.

“자영업자분들이 학생회에 스폰을 제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스폰은 대부분 학교 행사를 지원하는 명목으로 제공되는 거지, 지금의 학생회처럼 사적으로 방문해서 무전취식 하는 걸 스폰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수혁은 그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짚었다.

“……사적으로 방문했는지, 중요한 논의를 했는지 어떻게 단정하십니까? 사장님들의 입장만 듣고 와서 저를 겁박하시는 것 같은데,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한국대에 오신 걸 보면 나름 열심히 사셨을 거 같은데 기본적인 사리 분별도 못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참 실망이네요. 국내 제일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답변치고는 참 옹색하군요. 쯧쯧......”

혜선은 혀를 차며 석현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기자라는 분이 증거도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꼴이 더 우스워 보인다는 건 생각 못 하십니까? 할 말이 없어서 괜히 상대나 모욕하는 걸 보니, 기자로서의 소양을 더 키우셔야 할 것 같네요.”

“누가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까? 어제 CCTV를 확인했는데 석현 씨가 여자친구와 함께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그냥 가는 것도 그대로 찍혔더군요. 그것도 스폰입니까? 그리고 학생회의 갑질 행위에 대해 증언을 서 주시겠다는 사장님만 족히 다섯 이상은 됩니다. 설마 이분들이 서로 작당해서 학생회를 모함한다는 허튼소리를 하고 싶으신 거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석현 씨 외에도, 몇몇 임원들이 상인들을 갈취한 모습들이 CCTV에 모두 찍혔으니까 더 이상의 변명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상과 녹음, 그리고 여러 정황들을 분석한 결과 현재 학생회는 횡령죄, 뇌물죄, 공갈죄, 배임죄 등 다양한 죄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배임죄는 뭡니까?”

박정철이 대화에 개입하여 사안에서 다뤄질 수 있는 법적인 쟁점들을 열거하자, 주눅이 든 석현은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물었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때 성립이 됩니다.”

“그럼…… 학생회가 배임 행위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옆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수혁이 물었다.

“유사 사례에 대한 판례를 살펴봐야겠지만, 축제에 배정된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한 건 학생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대 학생들은 사무를 위임한 자이자 손해를 받은 본인이고 학생회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조직이라는 말씀이군요.”

수혁은 정철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하…….”

‘많이 힘든 모양이네? 슬슬 이야기를 꺼내 볼까?’

수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석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 우리가 석현 씨를 찾아온 이유에는 사태의 심각성과 본인이 처한 상황을 알려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기회를 주기 위함도 있습니다.”

“기회요?”

고개를 숙이고 연신 한숨을 내쉬던 석현이 수혁을 보며 물었다.

“우리는 조만간 현 학생회에 관한 특집 기사를 냄과 동시에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 조치를 취할 겁니다. 혐의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서류 작업에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법률적인 문제는 신평 법무법인에서 전담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신평이면 국내에서 제일 높은 승소율을 자랑하는 법무법인이잖아?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석현은 수혁의 입에서 신평이 거론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 살길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한테 뭘 원하시죠?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끝까지 뻔뻔하게 나오셨으면 꽤나 곤욕을 치렀을 겁니다. 부탁하기에 앞서 조건이 있는데 잠시 논의하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협조에 대한 대가로 뭐가 좋을지 일행들과 논의했다.

“일단, 이 정도면 저 사람도 거부는 안 할 거예요.”

“좋습니다. 가서 이야기를 나눠 보죠.”

5분간의 대화 끝에 결론을 내린 수혁은 석현에게 돌아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자님께서는 비위 사실을 조사하는 데 도움을 주면 양심 고발자로 포장을 해 주신다고 그러셨습니다. 물론, 실명이 거론되지 않는 건 당연하고요. 그리고 변호사님은 고발 후 이루어지는 고발인 조사에서 석현 씨가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혐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될 수는 없는 건가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석현은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유감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학생회장과 다른 임원들이 석현 씨가 가담한 사실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저희가 해 줄 수 있는 배려는 이게 다니 신중하게 답변해 주시길 바랍니다.”

“……후, 제가 어떤 것부터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처벌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석현은 모든 걸 체념한 채 해야 할 일을 물었다.

“일단, 학생회에서 저지른 비리를 알고 있는 선에서 모두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이명학과 학생회 사이의 관계도 설명해 주시고요.”

“흠, 공금을 유용한 건 대부분 알고 계신 것 같으니, 학생처장과 교무처장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석현 씨, 잠시만요. 지금부터 하시는 발언들을 녹음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이 판국에 뭔들 못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하세요.”

석현은 순순히 녹음을 허락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거예요. 학생회 간부들과 학생처장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성우가 우연한 기회에 처장님이 통화하신 것을 엿들은 적이 있어요.”

‘성우라면…… 현재 학생회장을 말하는 거겠군.’

수혁은 찬식을 통해 학생회장의 이름이 정성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성우가 저를 불러 말하길, 학생처장에게 두 딸이 있는데 모두 유학을 떠났고 매년 교육비로만 엄청난 비용이 든다더라고요. 그런데 주식이 망하는 바람에 돈이 부족해서 이곳저곳으로 금전을 빌리고 다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처장에게 접근했는지 짐작이 가네요. 계속 말씀하세요.”

수혁은 학생회에서 곤궁한 지경에 빠진 처장을 돈으로 매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우는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논의하자는 핑계로 수시로 처장을 찾아갔고, 구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석현은 학생처장 외에도 교무처장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었는지 또한 상세히 설명했다.

“그럼, 학생회와 이명학은 서로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성우랑 명학이는 1학년 때 같은 수업을 들은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전에 여쭤볼 게 있는데…… 혹시 SH그룹의 오너로 계시지 않으세요?”

교내에서는 수혁의 존재가 이미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맞기는 한데 그걸 왜 갑자기 물으시는 거죠?”

뜬금없는 질문에 수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알기로, 수혁 씨가 명학이가 하던 사업을 인수하셨다고 하던데…….”

“그런데요?”

“명학이가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으로부터 받던 지원이 싹 끊겨서 일송유통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우가 명학이에게 1억 원 상당의 자금을 제공하면서 샤인스타를 차릴 수 있게 도와줬고요.”

‘흠, 이명학은 내가 회사를 인수해서 망한 게 아닌데…… 소문이 이상하게 난 것 같네. 후,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자.’

수혁은 석현의 말 안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말씀은 바로 하세요. 학생회장이 자금을 제공해 준 게 아니라, 학생들의 돈을 멋대로 사용한 겁니다.”

“죄, 죄송합니다…….”

혜선의 질책에 석현은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과는 나중에 학생들에게 하시고, 대가로 뭘 받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학생회장이 꽁으로 돈을 주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학생회 간부들은 일송유통에 꽂아 준다고 했고, 성우의 정치 입문을 돕겠다고도 약속했어요.”

“정치 입문을 돕는다고요?”

“네, 친하게 지내는 의원들이 몇 명 있다면서 나중에 청년비례대표로 공천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후, 참 순진들 하시네요. 이제 보니 이명학의 헛소리에 다들 놀아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녹음기를 잠시 중지시킨 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명학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일송의 힘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죠. 하지만 집안에서 골칫덩어리 취급이나 받는 이명학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거 같습니까? 재벌 집 자제들이라고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수혁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쯤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죠. 혜선 씨,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죠?”

“진태 씨 말로는 임원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 있대요.”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까 바로 출발하시죠. 석현 씨, 추우니까 어디라도 들어가세요.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를 만난 건 큰 행운이니까 자책하지 마시고요.”

수혁은 말없이 서 있는 석현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진태가 알려 준 장소로 이동했다. 잠시 후 한 식당 앞에 도착한 일행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슬쩍 살펴보고 왔는데 학생회 임원 둘이 식사를 하고 있네요.”

“잘됐군요. 어차피 둘 다 만날 사람들이었는데 한 번에 일을 끝낼 수 있겠어요.”

수혁과 일행들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이들을 붙잡았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증언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고석현 씨 덕분에 일이 아주 쉬워졌어.’

초반에 거짓말을 하던 임원들은 기자와 변호사가 사건에 개입했다는 사실에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석현의 발언이 녹음된 파일을 들려주자 끝내 죄를 이실직고하였다. 두 번째 인터뷰를 무사히 마친 수혁과 일행들은 쉬지 않고 조사를 계속했고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밤 9시가 되었다.

“오늘 수집한 증언과 증거들로 사건을 충분히 이슈화할 수 있겠어요. 더 이상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게 무의미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동의합니다. 이 정도면 학생회와 학교 측의 비리 사실을 증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혜선과 정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수혁의 의사를 물었다.

“좋습니다. 조사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죠.”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20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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