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대표님, 마저 하시죠.”
“아닙니다. 조금 이따 선배님들에게 기획안을 넘겨드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수혁이 단상에서 물러나자 정석호 회장이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조금 전 불미스러운 일은 잊어버리고, 그간 쌓였던 오해가 풀린 것을 금일 총회의 의의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경쟁할 때도 있지만, 한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돕고 잘 지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강 대표님의 저의를 몰랐을 땐 그저 색안경을 끼고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오늘 발표를 듣고 나서 제가 속이 좁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정수 회장님께서 안 계서서 하는 말인데, 행동에 모순이 있다는 강 대표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이 가더라고요.”
석호가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한마디씩 논평을 하기 시작했다.
“이정수 회장님을 따라간 분들은 일송과 직·간전접으로 크게 연관이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회장에겐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편한 마음으로 석식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협회장님, 선배님들께 짧게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석호는 수혁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저에게 명함 한 장씩 주시면 파일을 메일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 번호를 알려 드릴 테니 사업을 하시다가 궁금하신 사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지오쇼핑이 하는 일이면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수혁의 배려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마지막으로 저를 위해서 어려운 결정을 해 주신 이병섭 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병섭은 회사에 자칫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음에도 선선히 따라 주었고, 수혁은 이에 대해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기에 한 번 더 언급하고 싶었다.
‘이병섭 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중간에 많이 힘들었을 거야.’
수혁은 여러모로 자신을 지원해 준 병섭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고, 그는 손을 흔들며 화답해 주었다.
“이만 이동하시죠. 식사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갑니다.”
석호는 수혁과 사람들이 명함 교환을 마친 것을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오늘 같은 날에는 술도 한잔해야죠.”
“하하, 동감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사람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고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잘 마무리되었다.
* * *
정신없던 9월이 끝나고 10월이 되었다. 학생들은 시험 대비를 위해 카페나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지만, 수혁은 평상시처럼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처리했다.
“회장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유신의 목소리를 들은 수혁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네, 회장님.”
이들은 응접 테이블에 착석한 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타 업체들로부터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까?”
“그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10월에 들어서며 적극적으로 제휴 의사를 밝히는 기업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쪽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며 상세히 설명을 해줘도 성사될까 말까 했는데 한결 수월해진 느낌입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앞으로는 제휴업체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으니 긴장의 끈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혁은 간신히 잡은 기회를 잘 살리고 싶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내동 반응이 없던 기업들이 왜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걸까요?”
“일주일 전에 한국유통협회 임시 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날 오너들과 오해를 풀고 원만한 관계를 맺은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어쩐지…… 타사 관계자들이 이전보다 친절하게 굴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유신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온라인 마트 기획안을 제공하고 일송유통의 공격적 경영을 비판하니, 여론이 우리 쪽으로 돌아오더군요. 게다가 정석호 회장님과 이병섭 회장님이 적절하게 지원을 해 줘서…….”
수혁은 임시 총회 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정말 잘됐습니다. 유통업계의 눈치를 보던 제조업체들이 이젠 아무 망설임 없이 우리와 협약을 맺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회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 문득 생각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이걸 한번 보시죠.”
유신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수혁에게 건넸다.
“흠, 이건…….”
“10월 들어 SH에듀케이션을 대상으로 한 악의적인 기사가 종종 올라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정수 회장과의 마찰이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일송과 우리는 부딪힐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신의 말에 공감했다.
“한정길 사장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따로 연락을 드려 물어봤는데, 현재 언론의 동태를 주시하고 계시긴 하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실 겁니다. 언론이 한번 물어뜯기로 마음을 먹으면 웬만해서는 말릴 수가 없거든요.”
“저야 지오쇼핑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지만, 회장님께서는 SH그룹의 대표시기 때문에 걱정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유신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론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해야겠지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언론사를 통해 반박 보도를 내는 거지만 만평일보와 일송이 동서지간이기 때문에 메이저 신문사를 활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보도 내용이 자극적일 뿐이지 우리 회사가 사교육 시장을 거의 독점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반박하기도 마땅치 않고요.”
수혁은 턱에 손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우리에겐 지오닷컴이 있지 않습니까? 포털을 활용해서 SH에듀케이션의 이미지 개선을 도모하는 건 어떻습니까?”
“포털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네, 최근 보고에 따르면 지오닷컴의 회원 수가 이천만 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이는 푸른닷컴과 비슷한 수치이긴 하지만, 웹툰, 게임, 커뮤니티 등 외적으로 창출되는 수익 덕택에 매출 1위를 달성했다고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포털사이트는 푸른닷컴이 아니라 지오닷컴이라는 이야기죠.”
유신의 얼굴에는 뿌듯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장님의 말씀은 언론사보다 더 강력한 매체인 포털을 활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자는 말씀이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조금 치사할 순 있지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요.”
“생각해 둔 대책은 있으십니까?”
“흠, 제가 알기로 SH에듀케이션 안에 유보금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국내 시장은 평정했고 해외 진출 프로젝트만 남았는데, 그것마저도 ANA그룹에서 모든 비용을 대주는 상황이기에 여유자금이 넘치는 상황입니다.”
“그 돈으로 자선 사업 같은 걸 벌이자는 말씀이시군요.”
수혁은 유신의 의도를 대번에 알아챘다.
“맞습니다. 악의적인 보도이긴 하지만 SH에듀케이션에 대한 비방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이미지를 쇄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독점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 거지요.”
“일견 타당한 방법이긴 하지만 너무 감성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SH에듀케이션의 영업 방식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인가요?”
유신은 수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SH스터디를 설립할 때 세웠던 방침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경쟁 업체에 비해서 저렴해야 하고, 둘째는 가장 우수한 강사진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한정길 사장님 체제로 전환된 후에도 그러한 기조는 유지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SH에듀케이션이 착한 기업이라는 것을 알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무수히 난립하는 학원들 중 가장 저렴하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독점하는 게 뭐가 문제 되겠습니까?”
수혁은 SH에듀케이션이 자체적으로 가진 장점만으로도 대중들의 호감을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대만과 핀란드 사례만 보더라도 한 기업이 국가 경제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어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SH에듀케이션의 고객 친화적인 특성을 잘 홍보하면 이 난국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정길 사장님께 연락해서 대형 학원들의 강의 단가에 관한 조사와 온라인 강의 도입과 학원 수강료의 상관관계를 알아보시라고 전해 주세요.”
수혁은 온라인 강의의 출현이 강의료 인하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SH에듀케이션에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이 외에 추가적으로 지시할 사항이 더 있을까요?”
“한정길 사장님께, 당분간은 강사분들을 영입할 때 조심하시라고 말씀해 주세요. 만평일보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흠집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겁니다.”
“저, 회장님.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강사 영입까지 조심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타 학원의 스타 강사를 영입하는 행위가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혁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한정길 사장님께 강사 계약서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유신은 계약 과정 중 흠 잡힐 만한 일이 있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메모를 적어 두었다.
“회장님, 이 정도면 대책이 어느 정도 세워진 것 같은데…… 바로 작업에 들어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금 전에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활동에 관한 계획도 세워야겠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한 가지 방법보다는 투 트랙으로 대응하면 그 효과가 배가 될 것 같습니다.”
유신은 수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SH에듀케이션뿐만 아니라 다른 자회사들도 사회 활동에 참여시킬까 하는데, 떠오르는 아이디어라도 있습니까?”
수혁은 SH에듀케이션을 포함한 그룹 전체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싶었다.
“음, 회사별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게 하면 어떨까요? 그 후 자체적으로 시행한 다음 연말에 평가를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참신한 아이디어가 생성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효율적인 운영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그렇네요. 음…… 제가 조금 더 고민해 보고 의견을 정리한 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유신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단 다양한 루트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지만 수혁은 묵묵부답이었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수혁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계획이 떠올랐다.
‘유리한테는 내년 초라고 했지만, 길게 끌 거 없어. 올 연말 안까지 재단 설립을 추진해 보자.’
방법을 찾은 수혁은 재단의 목적과 운영 방식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 21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