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14화 (214/316)

214화

“회장님, 고민이 많으신 것 같은데 다음에 대화를 나누심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잠시 아이디어를 구상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답변을 못 드렸습니다. 계열사별로 자선 사업을 추진하기보단, 그룹 차원에서 재단을 꾸릴까 하는데…….”

“아, 일송재단처럼 기부나 장학 사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을 하나 만들자는 이야기군요.”

“일송재단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그들과는 차별화되는 방식으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수혁은 그의 말을 부분적으로만 동의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세부적인 계획도 어느 정도 세우신 듯 합니다만?”

“네, 일단 예산의 경우에는 매월 창출되는 수익 중 일부를 SH재단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충당할 겁니다. 기부 명목으로 비용이 처리될 것이기 때문에 세금 혜택도 작게나마 받을 수 있을 거고요.”

“재단 이사장으로 염두에 두신 분은 계십니까?”

유신은 계열사 임원진들에게 내용을 알려 주기 위해 메모를 하며 경청했다.

“오래된 지인 중에 이사장으로 적격인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연말 그룹 결산 회의 때 임원들에게 소개해 줄 생각입니다.”

수혁은 유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조금 전, 일송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단을 꾸려나가실 거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구체적인 건 이사장이 결정할 사안이라 따로 드릴 말씀은 없고, 설립 취지와 기본 운영방침에서 저들과 차이가 있을 겁니다.”

“방금 하신 말씀들을 잘 정리해서 계열사 사장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신은 추상적인 답변으로 인해 그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딴 건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에만 전념하게 만들면 돼.’

수혁은 일송 장학생이라 불리는 자들이 법조계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여 일송을 물심양면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SH재단을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재단 설립 작업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정길 사장님께 연락해서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에 대해 신속히 대응하라고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넵, 회장님.”

이들은 이후에도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 * *

“수혁아, 이쪽이야.”

“응.”

중간고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수혁은 한국대 캠퍼스에서 유리를 만났다.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거야?”

“그냥, 예전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거 있잖아? 그거 관련해서 네 의견을 묻고 싶어서 급하게 연락했어. 공부하고 있었을 텐데 괜히 방해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니야, 이번이 마지막 학기라 4과목만 수강하면 돼서 여유가 있는 상황이거든. 조기 졸업 기준도 이미 다 채워 놨고.”

유리는 손을 저으며 개의치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역시, 부지런하네.”

“예전에 이야기한 거라면 봉사활동 때 약속했던 걸 말하는 거 같은데 원래는 내년 초에 논의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맞아, 하지만 회사 사정상 시기가 좀 앞당겨졌어. 정확한 날짜는 아직 안 정해졌지만 늦어도 올 연말에 재단을 발족할 것 같아.”

“그렇게 빨리?”

“우리 회사가 제법 커지다 보니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더라고.”

“회사 이미지를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네?”

“응, 고객들로부터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만큼 수익 중 일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거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려우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는 거야.”

“옳은 말이야.”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날 너와 대화한 후로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재단 이사장 자리는 나에겐 좀 버거운 것 같아. 차라리 일반 직원으로 취직하는 건 어떨까?”

“갑자기 요직을 맡게 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널 재단 이사장으로 선택한 건 단순히 친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보여 줬던 모습들을 토대로 결정한 거야.”

“공부만 했지, 보여줄 만한 것도 없었는데 뭘.”

“틈틈이 봉사활동도 하고, NGO나 시민단체에서 인턴 생활도 몇 번 했었잖아. 아무리 둘러봐도 너만 한 적임자는 없으니까 자신감을 가져.”

수혁은 단순히 권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그녀가 저격이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기존 직원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직원들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면 오너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뒤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 수혁아. 일하다가 부족한 부분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너한테 피해가 안 가게 최선을 다할게. 그럼 뭐부터 준비하면 될까?”

유리는 처음으로 본인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질문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며칠 안으로 우리 직원이 연락할 거고, 이사장이 해야 할 업무는 그때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거야.”

“혹시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도 있을까? 미리 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음, 취임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자선 사업을 벌일지에 대한 구상을 해 보면 어떨까? 난 너에게 재단 정관을 만드는 작업부터 세부적인 사안들까지 모두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생각이거든.”

수혁은 재단 경영에 있어서 유리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해 주려고 했다.

“네 말을 들으니까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감이 잡힌다.”

“응,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유리는 참고할 만한 단체를 찾아 어떤 방식으로 운영이 되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SH재단에 어울리는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세부적인 경영방침도 고민해 보기로 했다.

‘평소의 유리라면 내 도움은 필요 없을 거야.’

유리와 함께 봉사활동을 했던 수혁은 오랜 시간 자선 사업을 두고 대화를 나누었고, 많은 부분에서 견해가 일치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조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더 이야기해 줄 건 없어?”

“응,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아.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따뜻하게 다니고. 나중에 또 보자.”

“알았어, 수혁아.”

용건을 마친 수혁은 유리와 인사를 나눈 뒤 다시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강남에 있는 지오쇼핑 사옥, 수혁은 오랜만에 임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10월 들어 제휴를 맺은 업체의 수가 1,000개를 돌파했습니다. 이는 9월과 비교해 보면 500퍼센트 이상 증가한 것으로, 고무적인 수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희소식을 전하는 유신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사이트에 올라간 제품 가지 수는 얼마나 됩니까?”

“금일 자로 2,800개의 상품이 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매출도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고요.”

“고객들의 반응이 뜨거운 만큼 직원들도 많이 바쁘겠군요?”

수혁은 기뻐하기에 앞서, 점거해야 할 사안들을 하나씩 짚었다.

“그렇습니다. 주문량이 늘어나다 보니 현장 인력이 더 필요해졌습니다. 그리고 당일 배송 서비스와 익일 배송 서비스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왜죠?”

“전달해야 하는 물품의 수는 늘어만 가는데 물류 창고를 제일물류 측과 같이 쓰다 보니, 들어오는 주문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주문량을 당일이나 다음 날 바로 처리하기 힘들어졌다는 말씀이시군요.”

수혁은 유신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맞습니다. 대신 말씀드린 것처럼 매출액은 급증하여 10월 예상 매출이 150억에 육박할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리고 방금 언급하신 문제들은 지금 당장 해결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관하지 마시고 직원들과 논의해서 고객들의 불편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보세요.”

“네, 회장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회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총무팀장님.”

“네, 듣고 있습니다.”

총무팀장은 수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르게 대답했다.

“본사로 쓸 매물을 알아보세요. 현재 재정 상태로는 좋은 건물을 매입하기 어려우니 계약 시기를 11월 말이나 12월 초로 잡으시고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회장님. 지오쇼핑과 관련된 사안은 아닌데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유신은 활기가 넘치던 좀 전과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여러 언론사에서 SH에듀케이션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써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자 보도를 보니,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우리 회사를 거론하며 유심히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수혁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누군가 SH에듀케이션이 시장 내 우월한 지위를 남용하여 다른 학원들을 방해하고 불공정경쟁행위를 했다는 진정서를 넣었다고 합니다.”

“……박유신 사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모두 나가 주시길 바랍니다. 처리하지 못한 안건은 추후 일정을 다시 잡겠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혁은 회사 내에서 명학과 내통하는 직원을 발견한 이후로 중요한 이야기는 믿을 만한 사람과 나누는 버릇이 생겼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자, 수혁은 다시 유신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참 이상하군요? 공정위 안에 법률을 검토하는 인력이 있다면 쓸데없는 흠집 잡기라는 것을 눈치챘을 텐데 말입니다.”

수혁은 정길에게 지시하여, SH에듀케이션이 타 학원의 스타 강사들을 가로채거나 불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지만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

“만평일보를 필두로 언론에서 연일 비판을 하다 보니 공정위 입장에서도 가만히 있기 힘들었나 봅니다.”

“대중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잘못이 있든 없든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흠, 조금 더 지켜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언론사들에 연락을 취해 기자회견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수혁은 유신에게 의견을 구했다.

“애당초 우리 회사를 공격하려고 작심한 자들인데 해명 자리를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반박 자료를 공개하고 결백함을 증명해도, 기자들이 있는 대로 써 주지 않으면 별 효과가 없겠네요. 한정길 사장님께서는 이 사안에 대해 따로 언급은 없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지오쇼핑을 경영하느라 바쁘신데 심려를 끼쳐 드리기 싫다며, 최대한 본인 선에서 해결하겠다는 말만 남기셨습니다.”

“타인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거지요. 사장님 성격에 스트레스가 극심하실 텐데 참 걱정입니다.”

“틀림없이 혼자 끙끙 앓고 계실 겁니다.”

수혁은 책임감이 유독 강한 정길이 큰 심적 부담을 느낄 거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 21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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