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안녕하십니까? SH그룹의 대표, 강수혁입니다.”
오후 두 시 정각, 수혁은 무대 앞에 나와 정중히 인사했다.
“금일 기자회견에는 강수혁 대표님이 직접 나서 주셨습니다. 이는 국민들과 소통하겠다는 강력한 의사표현으로…….”
준비한 원고를 읽던 찬명은 수혁의 손짓에 발언을 중단했다.
“사회자님, 죄송합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기자님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혁은 찬명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낸 뒤 대화를 이어 나갔다.
“9월 말경부터 SH에듀케이션에 대한 기사가 적어도 3만 건 이상 쏟아져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저를 비롯한 임직원들은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았고 회사의 행적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하였습니다. 기자님들께서 지적해 주신 덕분에 회사의 내실을 다시 한 번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혁은 허리를 숙이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생쇼하고 자빠졌네.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기사를 좋게 써 줄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참 불쌍하게 됐어.’
배석현 기자는 수혁을 동정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사실관계가 완전히 왜곡된 몇몇 기사들 또한 발견했는데 저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 시원하게 해명하고자 합니다.”
인사를 마친 수혁은 마이크가 설치된 테이블에 앉은 후 피피티 화면을 켰다.
그때, 기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기자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찬명은 갑작스럽게 손을 든 박종구 기자를 보고 물었다.
“네, 성동일보의 박종구 기자입니다. 대표님, 모두 발언에 앞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기자님들은 SH그룹에 쌓인 의혹들에 대해 알고 싶어 온 것 일뿐, 해명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기자님, 대표님이 짧은 발표 시간을 갖는 건 이미 공지가 된 사안입니다.”
“사회자님, 저는 괜찮습니다. 박종구 기자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으니 모두 발언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은 모두발언에서 각종 통계 자료를 소개하며 ‘SH에듀케이션은 항간의 소문과 달리 사회에 유익한 측면이 있다’라는 것을 전하려 했으나, 이곳에 모인 기자 대부분이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기에 종구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엄청 까칠할 줄 알았는데 소문이랑 영 딴판이네?’
‘생각보다 융통성도 있고 매너도 좋잖아?’
기자들은 일송과 대립각을 세운 수혁의 성격이 거침없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의외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자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말씀대로 모두발언은 생략하고 바로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가운데에 계신 분, 아니요, 그 옆에요. 네, 맞습니다. 질문은 딱 하나씩만 허용되니 신중하게 말씀해 주세요.”
수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자들은 손을 들었고, 찬명은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을 지목하여 발언권을 줬다.
“안녕하십니까, 경기일보의 김미선 기자입니다. 모두발언에서 해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기사에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사들 중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9월 24일, 만평일보에서 보도된 강사 빼돌리기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저는 직원의 보고를 받고 곧장 내부 감사를 실시했고, 강사 영입 과정 중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는지 철저히 알아보았습니다.”
이야기를 하던 수혁은 곧바로 컴퓨터를 조작하여 스크린에 화면을 띄웠다. 어떤 질문이 나오든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덕분이었다.
“도표를 보시면, SH에듀케이션은 2000년에 설립된 이래로 500명이 넘는 강사를 영입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중 타 학원에서 넘어온 강사는 10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90퍼센트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강사 플랫폼에서 수급해 왔습니다.”
“아무리 10퍼센트라 해도 타사에서 넘어온 인력은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50명에 가까운 숫자는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명확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기자님, 지금은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지, 토론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질문을 건네신 분에 한해선 궁금하신 부분을 언제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찬명은 규칙을 지키지 않는 기자에게 쓴 소리를 했지만, 수혁은 개의치 않아 했다.
“10퍼센트라고 해서 감사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을 보시면 타 학원에서 건너온 강사님들이 계약을 맺은 시기와 이전 학원과 맺었던 계약 기간을 비교해 보실 수 있습니다.”
수혁은 계속 PPT 화면을 넘기며, 10퍼센트의 기존 강사들 계약 또한 문제될 부분이 없음을 설명했다.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저 자료가 정확하다면…… 정정 보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만평일보의 보도를 토대로 2차 기사를 쓴 기자들은 속이 뜨끔했다.
“보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계약 기간이 만료되지 않은 강사를 중간에 데려간 적이 없습니다. 만평일보 측에 해당 기사에 대한 정정 보도를 요구하고 싶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수혁은 만평일보의 배석현 기자가 있는 쪽을 지그시 바라보며 답변을 마쳤다.
‘훗,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기사를 수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판례를 보더라도 정정 보도가 이루어진 경우가 극히 드물고, 우린 의혹만 제시했을 뿐이니까. 제아무리 날뛰어 봤자 소용없어.’
석현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다음은, 네, 앞줄에 계신 기자님. 말씀하세요.”
“성동일보 박종구 기자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하신 것 외에도 여러 의혹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 제가 궁금한 건, 사교육 시장을 독점하려 든다는 대중들의 시선에 대한 대표님의 의견입니다.”
“만약 시장을 압도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점으로 해석하신다면,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며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목이 탔던 수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PPT 화면을 넘겼다.
“하지만 전 독점에도 착한 독점과 악한 독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그래프를 보시면, SH스터디가 설립된 이후 강의 단가가 점진적으로 하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강의 서비스 덕택에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 사는 학생들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설문 결과도 있었고요.”
“안 그래도 그 지점을 지적하려고 했는데 잘됐군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학부모들만 있습니까? 학원 관계자들과 강사들의 부담이 커졌다는 생각은 못 하십니까?”
“전 오히려 학부모들의 부담을 더 덜어드릴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데 업계 사람들을 걱정해 주시다니…… 참 놀랍군요.”
수혁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종구를 쳐다봤다.
“SH에듀케이션과 같은 거대 기업은 박리다매로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지만, 동네에 있는 군소 학원들은 피해를 본다는 건 자명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기자님의 말씀대로라면 학원 숫자는 줄어들고 사교육 시장은 위축되어야 하는데, 왜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지출은 날이 갈수록 늘어날까요?”
“후, 눈에 보이는 통계가 현상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현장의 목소리를 대표님께 전해 드린 것일 뿐, 말싸움을 하자는 건 아닙니다.”
수혁이 화면에 띄워진 수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반박하자, 종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기자님과 말싸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하실 땐 팩트에 기반해서 하셔야지, 입소문만 듣고 말씀하시는 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SH에듀케이션이 온라인 교육 시장을 개척한 덕분에 학원 숫자는 더 늘어나고 있고, 학부모님들의 교육비 지출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교육비 지출이 늘었다고 판단하신 근거는 뭡니까? 보여 주신 자료만으로는 한 가구당 교육비를 얼마나 썼는지 알 수 없을 텐데요?”
종구는 수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중상위권 학생들이 점점 상향 평준화되니, 격차를 만들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쏟아 붓는 거지요. 혹시, 이 부분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십니까?”
“……괜찮습니다. 답변 잘 들었습니다.”
“자,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드니 참…….’
수혁은 회견이 끝날 때까지 기자들을 매너 있게 대하려고 했으나, 속내가 훤히 보이는 종구의 물음에 살짝 흥분하고 말았다.
“저는 민국일보의 이명준 기자입니다. SH에듀케이션을 운영하시면서…….”
이후 기자들은 다소 무난한 질문들을 던졌고, 수혁은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다음은 네, 맨 앞줄 가운데에 계신 기자님, 말씀하시죠.”
“안녕하세요, 만평일보의 배석현 기자입니다. 저는 악조건 속에서도 대중들과 교감하려는 강수혁 대표님께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기자회견에 직접 나오시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와 같은 결정에는 어떤 배경이 있으셨을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전 현재 상황이 악조건이라 생각한 적도 없고, 기자회견 자리에 대한 어떤 거부감도 없었습니다. 그저, 갈수록 악화되는 여론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고객님들과 기자님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수혁은 악의적인 루머를 생성한 만평일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제가 쭉 지켜봤는데 대표님 말씀에 따르면 SH에듀케이션이 저지른 잘못은 하나도 없고 결국 우리 기자들과 대중들이 오해했다는 걸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의하시나요?”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SH그룹의 오너가 국민을 무시하고 잘못된 언론관을 갖고 있다며 트집을 잡겠지?’
질문 의도를 알아챈 수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석현 기자님, 전 여기 계신 대다수의 기자님들이 거짓 기사를 양산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기자회견을 연 이유도, 고객님들이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답변은 그게 전부인가요?”
“굳이 덧붙이자면 특정 언론사에서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우리 회사를 깎아내리려고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그 회사가 어딘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모두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미꾸라지같이 잘도 빠져나가네.’
석현은 수혁이 말실수하기를 기대하고 질문을 던졌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명확한 답변이 아니라 판단하기 어렵지만, 제가 볼 땐 대표님께선 SH에듀케이션의 잘못이 없다고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지난주, 한 리서치 회사에서 SH에 관한 설문 조사를 벌였는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시민이 40퍼센트가 넘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
“설문 조사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지만, 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하여 고객님들을 불편하게 만든 점이 있는지 살펴본 다음 문제점을 발견하면 즉시 개선하는 태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수혁은 논란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히 답변을 내놓았다.
‘영악한 놈, 불리한 질문에는 원론적인 대답만 하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군. 안 되겠다, 좀 더 파고들어서 실수를 유발시켜야겠어.’
답답함을 느낀 석현은 눈을 번뜩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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