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하하, 답변을 피하려고 했는데 자꾸 물어보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편하게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차라리 재단 운영에 관한 말씀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개인적인 견해로 괜히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 개인적인 견해가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수혁이 너스레를 떠는 것과 달리 박종구 기자는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저의 의중이 궁금하시다니, 속 시원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언론계의 비판을 받아들여 지오라이브 폐쇄를 선언했지만, 비판 내용 중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던 건 사실입니다.”
발언이 시작되기 무섭게 기자들은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타이핑을 했다. 조금 전까지의 사과 성명과는 완전히 다른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데일리 측 기자님이 하신 개인 방송을 품격이 떨어지는 행위라고 평하신 분을 봤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근거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기자가 되기 위해 무슨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언론의 역할을 침해했다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되고요.”
“언론사의 정식 공채를 통해 뽑히고 선배 언론인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난 뒤에야 간신히 기사다운 기사를 쓸 수 있는 법인데, 그저 이슈 하나 가지고 국민들을 선동하면 제대로 된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직업이든 나름의 도제 과정이 있는 법입니다. 특정 사건과 현상에 대해 아무나 떠들어댄다면 정보를 접하는 대중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지요.”
수혁의 대답을 들은 종구는 열을 올리며 반박했다.
“말씀하시는 걸 제지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저는 기자님의 질문에 답했을 뿐 토론을 하려는 건 아니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박종구 기자님, 기분은 알겠지만 형식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도 되도록 분란이 생기지 않도록 답변에 신경을 써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협회장이 마이크를 들며 이들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대답을 드리려다 보니 기자님께 불필요한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기자가 되기 위해 자격증이 필요 없다는 저의 발언은 언론의 역할에 대한 제 나름의 정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기자님들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수혁은 자연스럽게 진석의 말을 받아 답변을 이어 갔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적도 없는 사람이 기자님들 앞에서 언론의 역할에 대해 논하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적은 식견이나마 한 말씀 드린다면, 언론의 역할은 세상에 벌어지고 부조리한 일들을 국민들에게 고함으로써 사회를 자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일반 시민이어도 대중이 알아야 할 사건이라면 누구든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저런 인기영합적인 발언에는 함부로 부딪혀서는 안 돼. 그건 그렇고 내 질문 시간도 다 끝나 가는데 어쩌지?’
생각에 잠긴 종구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음은 평화일보 기자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
진석은 다른 기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일반 시민도 기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대표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개인 방송을 한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기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호, 처음엔 조금 호의적인가 싶더니 본색들을 드러내는군.’
만평일보와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언론사의 기자들은 노골적인 지원에 나섰다.
“협회에서 정하는 언론인 윤리규정에는 개인 방송 금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기자도 시민입니다. 기자와 시민의 경계를 나누는 기자님의 질문 의도를 잘 모르겠군요.”
그동안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수혁은 기자들의 공세에 강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기자가 시민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기자라면 무릇 지켜야 될 선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전 동의도 받지 않고 회견 자리를 녹화한 행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으십니까?”
“그 점에 대해선 앞서 사과를 드렸고, 지오라이브를 폐쇄함으로써 합당한 조치도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녹화 행위를 비판하기 이전에 국민들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것도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상입니다.”
답변을 들은 평화일보 기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후에도 기자들의 공격은 계속됐지만 수혁은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했다.
“현재 시청률이 막 6퍼센트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되나? SH 건이 아무리 이슈가 되었던 거라지만 이렇게까지 많이 보다니…….”
“저도 어안이 벙벙하네요. 아무튼 국장님께서 끝까지 마무리 잘하라며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케이블 방송국 관계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승하는 시청률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강수혁 대표님,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저도요.”
“발언권을 이미 쓰신 분들은 다른 분들을 위해서 양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담은 점점 열기가 더해갔고, 부협회장은 질문자를 고르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강동일보의 한진명입니다. 일반 시민들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사건을 알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말씀에 적극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건 정보전달자가 많아지는 만큼 가짜 뉴스가 난립할 확률도 높다는 겁니다. 차라리 언론사에 제보를 하고 사안에 대한 검증을 마친 뒤 보도하는 시스템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기자님의 소중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하신 시스템은 우리 사회에 이미 정착된 상태입니다. 대중들의 제보를 받아 검증한 뒤 뉴스를 내보낸다. 얼핏 들으면 일견 옳은 말씀이지만 자칫하면 언론사의 입맛대로 이슈를 선정할 수 있는 위험이 적지 않습니다.”
수혁은 한진명 기자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론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언론사라고 가짜 뉴스를 내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까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작은 시민의 가짜 뉴스는 거르면 그만이지만, 언론이 가짜 기사를 만든다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을 겁니다.”
‘훗, 저렇게 대놓고 언론을 비판하다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그나마 회복한 이미지가 말짱 도루묵이 되겠어.’
이야기를 듣던 만평일보의 배석현 기자는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말씀을 들으니 오늘 국민과 언론사를 상대로 사과 성명은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불신이 가득하시다는 걸 느낄 수 있네요.”
“기분이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대다수의 언론사와 기자님들이 정의롭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진 않지만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조금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수혁은 한발 물러서는 척하면서 기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언론사와 관련된 것입니까?”
“저는 이 자리에 사과를 하러 나왔습니다. 괜한 발언으로 지금까지 보여 드렸던 진심이 왜곡될까 말씀 못 드리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우리를 갖고 노는 거야 뭐야? 말을 안 할 거면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를 말던가, 궁금해 죽겠네.’
기자들은 수혁이 말을 던져 놓고 매듭을 짓지 않자 답답해했다.
“여기 계신 기자님들 모두 대표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기왕 말씀 꺼내신 거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 어떻겠습니까?”
“휴,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기자님의 질문에 먼저 답변 드리겠습니다. 디지털 데일리 기자님은 10월에 보도된 기사들과 기자회견 때 오갔던 대화가 다른 점을 지적하며 주요 언론사를 비판했는데요. 제가 예시를 하나 들겠습니다. 세상 어느 누가 범인에게 찾아가서 범죄 사실을 고하겠습니까?”
“말씀 삼가세요!”
“사회자님, 모욕적인 발언에 대해서 제재해 줄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수혁이 다소 강한 멘트를 던지자 만평일보와 성동일보 소속 기자들 중 고성을 지르며 항의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거침이 없네. 하지만 너무 경솔한 것 같아.”
“경솔하기는? 난 속이 다 시원하구만. 말이 투박해서 그렇지 잘못한 놈들에게 잘못을 제보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실시간 중계로 지켜보던 시민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대담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고 시청률도 덩달아 치솟고 있었다.
“대표님, 기자님들께 조금 더 정중히 답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발언으로 자칫 사과 성명이 무색해질 수도 있기에, 김진석 부협회장은 수혁의 답변 태도를 지적했다.
“죄송합니다. 최근 사건을 떠올리다 보니 순간적으로 감정을 못 다스린 것 같습니다. 후, 원래는 좋은 자리에서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들 궁금해 하실 것 같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혁은 한숨을 쉬며 품 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저건 녹음기잖아?’
‘뭔가 엄청난 게 나올 것 같은데?’
사람들은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수혁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저, 강수혁 대표님, 사전에 공지하지 않는 행위는 앞으로 자제하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대담 시간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임학규 협회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수혁을 제지하고 나섰다.
“협회장님,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제 책임만 있는 게 아님을 오늘 보셔서 아실 겁니다. 그리고 녹음 내용을 들어 보시면 같이 분노하실 거고요. 자, 그럼 틀겠습니다.”
수혁은 학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녹음기를 마이크에 갖다 댄 뒤 재생했다.
“이봐, 이도균 기자라고 했나? 당장 방송을 중지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선에선 우리가 어떻게든 덮을 수 있지만 더 하면 수습이 불가능해질 거니까.”
‘아니, 이 목소리는?’
임학규 협회장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박진욱 이사님, 세상 사람들이 이미 진실을 다 알았는데 어떻게 덮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기자가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행위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거죠?”
디지털 데일리의 이도균 기자는 녹음 당시 박진욱 이사의 실언을 끌어내기 위해,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신중한 자세를 취했었다.
“어차피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조용히 지나가게 돼 있어. 하지만 자네가 계속 헛소문을 퍼뜨리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거야. 휴, 이 사람아 잘 들어봐. 잘잘못을 따지려고 전화한 게 아니야, 자네도 어찌 됐든 기자로서 먹고살려면 우리랑 잘 지내는 편이 낫잖아?”
“듣고 보니 이사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저도 엄연한 신문사의 기자인데, 타 언론사의 눈치 때문에 상사의 지시를 거부할 순 없습니다.”
“거, 참. 만평일보와 자네 회사가 상대가 된다고 생각해?”
녹음기에서 처음으로 만평일보에 관한 언급이 나오자 기자단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금 들었어?”
“이 내용 받아 적어도 되는 거야?”
기자들은 뜻밖의 내용에 당황해하며 우왕좌왕했다.
‘……애당초 처음부터 우리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사달이 나기 전에 어떻게든 수습해야 해.’
만평일보의 배석현 기자는 초조한 얼굴로 수혁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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