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다들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수혁은 기자단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태도로 녹음기를 계속 틀었다.
“만평일보에서요?”
“자세히는 말해 주기 어려우니 더 이상 묻지 말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높은 사람들이 자네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거야.”
“후, 만평일보 같은 거대 언론이 움직였다면 제가 계속하려고 해도 저희 사장님께서 알아서 지시가 내려오겠네요.”
“마침 말 나왔으니 충고 하나 하겠는데, 이혜선 사장은 이전에 만평일보에 밉보여서 언론사에서 쫓겨난 사람이야. 디지털데일리에 계속 있어서 뭐 하겠나? 퇴사하고 나에게 연락 주면 좋은 자리 알아봐 줄 테니, 일단은 방송을 중지하게.”
도균이 미끼를 던지자 박진욱 이사는 물 만난 고기마냥 말을 술술 풀어냈다.
“이건 모함입니다!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협회와 우리 회사가 모종의 관계인 것으로 몰아간다면 회사 차원에서 강력히 항의하겠습니다!”
진욱의 자진폭로에 배석현 기자는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부협회장님, 당장 저 녹음기를 끄라고 말씀하세요. 협회장님 말씀대로 사전 합의가 이루어지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강 대표, 그만 내려오세요!”
만평일보의 사주를 받은 협회 관계자들도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왜 이러십니까? 사전 동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저를 타박하시는데 전 분명 오늘 자리는 화해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에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싶다고 언급했을 텐데요?”
수혁은 고성을 지르는 기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조용히들 하세요. 대표님, 계속하세요.”
임학규 협회장은 굳은 얼굴로 수혁에게 계속 진행할 것을 권했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의외네? 갑자기 왜 저러지? 됐어, 난 그냥 내 할 일이나 하자.’
수혁은 예상치 못한 협회장의 반응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문제될 건 딱히 없는 상황이라 차분하게 계획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만평일보에서 협회 사람들을 매수하다니. 장동주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임학규 협회장은 원래대로라면 수혁의 돌발 발언을 제지할 생각이었지만 협회 이사가 자신 몰래 만평일보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력 일간지의 대표만큼은 아니었지만 언론계에서 나름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만평일보가 은밀하게 작업을 한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었던 것이다.
“협회장님, 저대로 두시면 만평일보 측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봐요. 제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이사들 중 하나가 만평일보의 편을 들고 나섰지만, 임학규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협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수혁은 태연하게 녹음기를 다시 틀었고, 사람들은 박진욱 이사와 만평일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앞선 기자님께서 언론사에 제보해도 될 일을 왜 굳이 직접 알리려 드느냐고 물으셨지만, 저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습니다. 뒤에서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데 누굴 믿고 사실을 말한단 말입니까?”
“대표님, 녹음 파일은 어떤 경로로 얻게 되었습니까? 혹 디지털 데일리와 모종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배석현 기자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다.
“조금 전에도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사과 성명의 진정성을 의심하시더니, 이번에도 물타기를 시전 하시는군요. 국민들이 보고 계십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대표님이나 질문에 똑바로 답변하세요!”
수혁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질타하자 발끈한 석현은 언성을 높였다.
“하하, 세상 무서울 거 없는 만평일보 소속 기자께서 물으시니 답변 드리겠습니다. 이혜선 사장님은 저와 함께 한국대에서 벌어진 비리를 취재하다가 투데이 서울에서 잘리셨습니다. 당시 상당히 큰 이슈였음에도 불구하고 모 언론사에서 압력을 넣어 타 신문사들의 입을 틀어막은 탓에 쉬쉬하고 지나간 사건이었죠.”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답변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말 끊지 마세요.”
‘뭐, 뭐야 갑자기…….’
수혁의 단호한 태도에 석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수혁은 몰아붙일 때는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실직자가 된 이혜선 사장님은 언론사에서 또 압력을 넣는다는 것을 알자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저와 상의하셨습니다. 참고로 전 이 사실을 오늘 밝힐 생각은 없으니 질문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요,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아니요, 전 할 말을 다 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한국대 비리 사건에 대해 아십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신문사에 근무한다고 모든 사건을 꿰고 있는 건 아닙니다.”
석현은 만평일보에서 타 언론사의 협조를 구해 사건을 은폐한 것을 알았으나 능청을 떨었다.
“이경욱 회장님의 손자가 학생회의 공금으로 룸살롱을 차렸던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후, 저는 모른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르는 게 자랑입니까? 사회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재벌가에서 엄청난 비리에 연루되었는데, 언론사에서 쉬쉬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유일하게 기사를 작성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이혜선 사장님입니다. 그리고 만평일보는 일송과 사돈 관계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고요.”
수혁은 석현을 한심하다는듯이 쳐다보며 작심 발언을 했다.
“저, 방송을 계속 보내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만평일보에서 문제라도 삼으면…….”
“시청률이 1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는데 그게 대수야? 그냥 해.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회사 창립 이래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을 확인한 현장 책임자는 손을 저으며 계속 촬영할 것을 지시했다.
“자, 자. 분위기가 너무 과열됐으니 대담 자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직,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강수혁 대표님, 일송그룹 자제가 한국대 비리 사건에 연루된 게 사실입니까?”
“신문사들에 압력을 넣었다는 모 언론사가 어디입니까?”
김진석 부협회장이 급하게 대담 자리를 끝내려 했지만 특종을 잡은 기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언론사의 정체가 궁금하시다면, 회사로 돌아가셔서 편집장이나 간부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SH가 논란의 중심에 있게 된 것에 대해 국민들 앞에 사죄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혁은 무대 앞에 나와 인사를 한 뒤 퇴장했다.
‘큰일이다. 대표님께서 장형욱 부사장님이 벌인 일을 아신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배석현 기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호텔을 빠져나온 수혁은 강남에 위치한 SH커뮤니케이션 본사에 도착했다.
“대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내 당하다가 대표님 말씀을 들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한정길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수혁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상태였다.
“후, 계획했던 것보다 발언 수위가 훨씬 강하게 나갔습니다. 폭로라는 건 정제된 언어로 했을 때 효과적인 법인데 조금 실수한 것 같습니다.”
수혁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긍정적인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대표님께서 만평일보의 기자와 설전을 벌였을 때 순간 시청률이 10퍼센트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통상적으로 케이블 방송에서 5퍼센트의 시청률도 대박이라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성과입니다.”
박유신 사장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수혁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맞습니다. 처음 사과 성명을 발표하실 때의 정중한 태도보다 거침없이 말씀하셨을 때가 훨씬 집중도 잘 되고 좋았습니다.”
“어차피 예의를 갖춰 봤자 우리를 공격할 놈들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박찬식과 김용민 본부장도 유신의 말에 공감하고 나섰다.
“이혜선 사장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만평일보에 밉보일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들긴 하지만 오늘 대표님 덕분에 통쾌해서 좋았습니다.”
혜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디지털 데일리의 미래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김용민 본부장님.”
“네, 대표님.”
“디지털 데일리의 기사 비중을 주요 언론사와 똑같이 취급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가장 노출을 많이 시키고 싶지만 괜한 시비는 피해야겠지요.”
수혁은 용민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표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이제까지 사장님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어차피 언론사들도 제 성향을 알았기 때문에 지오닷컴에 압력을 넣는 일도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수혁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마 오늘 이후로는 우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건수만 잡히면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놈들이니까 긴장의 끈은 놓지 마세요.”
“네, 대표님.”
“앞으로 책잡힐만한 거리는 만들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임원들은 진지하게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후,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한고비 넘겼다. 상대가 우리가 의도한 대로 행동해 준 덕분에 운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어. 이제는 사업에만 집중해야겠어.’
수혁은 사태가 끝난 것에 감사해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9시 뉴스입니다. 오늘 SH그룹의 강수혁 대표가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동안의 논란에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을 밝혔던 강수혁 대표는 기자와의 대담 시간에서 예상치 못한 발언들을 했는데요.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만평일보 본사,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범죄 사실을 고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노인은 대담 중 오갔던 주요 대화들과 녹음기를 통해 공개된 내용들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아들놈이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구나. 다 늙은 애비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다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소파에 앉아 티비를 시청하는 사람의 정체는 만평일보의 장동주 대표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알아서 잘할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은 게 큰 실수였어. 강수혁 대표라고 했나? 주변에서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하군. 본인이 의도한 대로 판을 만드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이야.’
장동주 대표는 기자들을 다루는 수혁의 솜씨에 탄복했다. 잠시 후, 그는 티비를 끈 뒤 핸드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비서,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장형욱 부사장에게 내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표실로 오라고 좀 해.”
“마침 밤 산책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부사장님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밤 10시가 넘은 시각, 장동주 대표는 비서와의 전화를 끊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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