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휴, 화가 많이 나셨겠지? 애당초 정수 말을 너무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성명서 발표가 있은 지 하루가 지난 이른 아침, 만평일보 부사장 장형욱은 어두운 얼굴로 대표실에 도착했다.
“대표님, 접니다.”
“들어와라.”
형욱이 말함과 동시에 방 안에서는 장동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앉지 마라.”
“네……”
아버지가 있는 소파에 앉으려던 형욱은 멈칫하더니 제자리에 섰다.
“동생 도와준답시고 어설프게 일을 벌여 놓더니 수습도 하지 못했더구나.”
“면목 없습니다.”
장형욱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 임학규 협회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
“학규는 내 대학 동기인데 이번 일로 친구를 잃게 됐어. 멍청한 녀석,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손을 내밀어줄 친구였는데 잔챙이들에게 일을 시키니 그 모양이지. 쯧쯧.”
장동주는 아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혀를 찼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만회해 보겠습니다.”
“만회한다고? 어떻게?”
“어제, 강수혁 대표의 발언들을 분석했는데 실언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국대와 우리가 마치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묘사한 건 역풍을 맞기 딱 좋은 언행이었죠.”
형욱은 기회가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억울하다 광고라도 하려고 그러냐? 이럴 땐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야. 뭔가 기발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고 기대한 내가 바보지.”
동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넋 놓고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타 언론사 기자들과 대중들이 한국대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 우리만 손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만약 이 사안에 네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땐 걷잡을 수 없을 거다.”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십니까?”
형욱은 다소 반항적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평생 누구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적이 없는 탓에, 장형욱은 그저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 외에는 머리를 굴릴 줄 몰랐다.
“그건 나중에 뉴스를 통해서 보든가 해라. 굳이 너한테 말해서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다. 것보다, 부사장직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야겠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동주 대표의 말에 형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널 희생하고 우리 회사를 살려야겠어. 한 2년만 푹 쉬어. 가족이랑 여행이라도 다녀오든가.”
“아버지!”
“이 자식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그동안 널 신뢰해서 중책을 맡겼지만 시기상조였다. 당분간 모든 걸 내려놓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라.”
형욱이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자, 장동주는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이런 젠장, 동생 한번 도와줬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그는 아버지의 단호한 태도에 크게 낙심하여 고개를 떨궜다.
* * *
강남에 위치한 지오쇼핑 본사, 수혁은 회장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딴 것들에 신경 쓰느라 본업에 소홀히 하고 말았어. 휴, 당분간은 일에만 열중해야겠어.’
수혁은 스마트 폰에 들어갈 소프트웨어 개발부터 SH에듀케이션의 해외 진출 사업까지 하나하나 검토하고 있었다. 한창 작업을 하고 있던 그때, 인터폰이 울려댔다.
“대표님, 박유신 사장입니다.”
“네, 사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시간 괜찮으시면 티비를 한번 틀어 보시겠습니까? 현재 만평일보의 장동주 대표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수혁은 탁상 위에 있는 리모컨으로 티비를 켰다.
“……세간에서 만평일보를 두고 여러 비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국민의 비판과 부족함을 솔직히 시인하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겠습니다.”
‘사주가 직접 사과를 할 줄이야.’
단상 위에 선 장동주 대표를 본 수혁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만평일보를 이끌던 장형욱 부사장은 오늘부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며, 그동안 대표라는 직함 뒤에서 편하게 안주하던 과오를 반성하고 신뢰받는 언론사가 될 수 있도록 철저히 쇄신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폐간이라도 시키고 싶지만…… 저들의 힘이 아직 막강하니 이쯤에서 만족해야겠지?’
수혁은 이번 일로 만평일보라는 철옹성에 흠집만 났을 뿐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표님, 보고 계십니까?”
“네, 보고 있습니다.”
“거대 언론사 사주가 고개를 조아리다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군요.”
유신은 티비에 나오는 동주의 모습에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형식적인 사과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저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저도 대표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괴롭혔던 걸 고려하면, 사과로 끝내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래도 거대 언론사 사주가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 의사를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치밀었던 화가 조금씩 풀림을 느꼈다.
“선대 때부터 기득권의 삶을 살았던 만평일보 집안사람들은 엄청난 굴욕감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저놈들이 느끼는 굴욕감은 가짜 뉴스로 피해를 본 당사자들의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됩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언론사의 공세에 내내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던 수혁이지만 내심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었기에 그들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큰 상태였다.
“저도 힘이 닿는 대로 대표님을 돕겠습니다.”
“한동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 일단은 일에 집중합시다. 사장님, 계열사들에 연락을 돌려 다음 주 토요일에 그룹 회의를 연다고 공지하세요.”
“알겠습니다. 임원들에게 따로 지시할 사항은 있으십니까?”
“일전에 지시했던 부분들이 잘 이행됐는지 점검한다고 일러두세요. 그리고 그룹 발전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신년에 회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될지 생각해 오라고 전해 주시고요.”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유신은 수혁의 말을 차분히 메모했다.
“지오쇼핑 관련해서 논의할 사안이 있기는 하지만 나중에 얼굴 보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급한 불을 껐으니 저도 회사 경영에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용건을 마친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표면적으로는 만평일보와 우리의 싸움이었지만 결국 일송이 뒤에서 수작을 벌여서 생긴 일들이야. 예전에는 가벼운 도발로 무시하고 넘겼지만 이제는 마냥 두고 볼 수 없겠어.’
일송이 망하지 않는 한 SH를 끊임없이 괴롭힐 거란 생각에, 수혁은 굳은 결심을 했다.
* * *
장동주 대표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 어느덧 1주일이 지났다. 공중파에선 만평일보가 언론의 힘을 남용한 사례들을 한데 모아 특집 방송을 하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다양한 혐의로 고발도 했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민들은 여전히 분노하고 있지만 다들 쉬쉬하며 넘기자는 분위기군.’
수혁은 집무실에서 잠시 후 있을 그룹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틈이 나는 대로 지인들과 뉴스를 통해 만평일보의 만행들이 어떻게 처리될지 관심 있게 지켜봤지만, 예상대로 관계자 한둘만 입건됐을 뿐 수뇌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김형석 변호사님이 기소가 어려울 거라고 하신 걸 보면 이명학 때랑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법에 기대는 것보단 돈이든 권력이든 힘으로 짓눌러 버리는 게 더 빠르겠어. 음, 누구지?’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수혁은 노크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들어오세요.”
“대표님, 김용민 본부장입니다. 5분 후면 회의 시작인데 방에 계신 것 같아서 들렸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나갈게요.”
수혁은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들고 방문을 나섰다.
“다들 도착했습니까?”
“네, 저를 제외한 모든 임원들이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부지런들 하시네요. 어서 가시죠, 이러다 늦겠습니다.”
유신은 수혁의 지시에 따라 토요일 오전 10시에 그룹 회의가 있음을 공지했고, 이사급 이상의 인력들은 SH커뮤니케이션 본사에 집결한 상태였다.
“대표님 오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사회를 맡은 박찬식 사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혁과 용민을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SH랭귀지 부사장을 맡은 전상현이라고 합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회사를 위해 수고해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임원들은 저마다 인사를 건넸고 수혁은 능숙하게 대답하며 회의실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정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계를 확인한 찬식은 회의 개시까지 얼마 안 남았음을 알렸다.
‘다들 준비가 된 것 같네.’
수혁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사다난했던 2002년도 어느새 1달이 채 안 남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첫 그룹 회의를 하면서 다짐했던 것과 달리, 야심 차게 추진한 사업들이 계획대로 풀리진 않았습니다.”
수혁은 지오쇼핑을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게다가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많은 임직원들이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오닷컴이 포털 시장을 석권하고 SH에듀케이션의 매출이 2배 이상 증가하는 등 인상적인 성과가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며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은 서류철에서 문서들을 꺼낸 뒤 발언을 이어 갔다.
“한정길 사장님, 일전에 일본 진출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마침 SH에듀케이션에서 일본어 교육을 총괄하는 정석훈 원장이 일본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수시로 만나 상의하고 있습니다.”
정길은 이야기와 동시에 화면을 띄워, 구체적으로 일본 시장에 어떻게 안착할 것인지 상세히 보여 줬다.
“여기 보이는 자료처럼 일본이 우리나라 못지않게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내와 일본 현지 분위기의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할 겁니다. 정석훈 원장님.”
“네, 대표님.”
수혁이 호명하자 중년의 남성이 공손히 대답했다.
“ANA 김정우 회장님께 따로 연락을 드려 사람을 연결시켜 주겠습니다. 제가 일본에 대해선 원장님만큼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지 마시고 일본 현지 직원과 상의해서 사업을 진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대표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아무리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한 수 아래로 보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자국 시장을 약탈하려 드는 침입자로 여길 것을 고려하면, 첫 론칭 때부터 최대한 한국의 색깔은 지우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석훈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의견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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