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한국의 색깔을 지우는 게 일견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현지에 잘 적응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자세를 낮춰 실리를 취하고 후에 인정을 받는 편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겠지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석훈 원장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한정길 사장님과 의논하여 일본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 커리큘럼을 구축하고 양질의 강사들을 영입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김소현 씨라고 일본에서 유학을 하시는 분인데, 알고 지낸 기간이 길지 않지만 우리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연락처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수혁은 멘토단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던 김소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일본 방문 이후에도 그녀와 종종 연락을 취했고, SH가 일본에 진출할 때 중책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한정길 사장님.”
“네, 말씀하시죠.”
“정석훈 원장님과 김소현 씨가 아무리 일본에 대해 잘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 회사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의 자리에서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혹시 일본 사업부를 관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혁은 다소 무리한 제안일 수 있음을 알았기에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흠, 가족들과 상의해 봐야겠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본 시장은 우리나라보다 3배 이상의 큰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총괄 자리를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맡아만 주신다면 섭섭지 않은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 들어가던 차에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군요…….”
“아닙니다. SH에듀케이션이 국내 시장을 어느 정도 석권한 상황에서 스스로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활기도 찾을 겸 해외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길은 손을 저으며 개의치 않아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어제 매출 현황 보고서를 읽었는데, 굉장히 고무적이었습니다.”
수혁은 유신을 보며 말했다. 그는 지오쇼핑 경영 외에 계열사에서 오는 각종 보고를 전달해 주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SH에듀케이션의 경우 상승 폭이 크진 않지만 올해 2조 5천억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기타 경쟁사들과 비교해 봤을 땐 엄청난 성과지요.”
“내년에 해외 법인을 세우면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는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될 겁니다.”
“대표님께서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SH커뮤니케이션의 약진도 정말 놀랍던데요?”
“맞습니다. 우리 포털은 지오라이브 사업을 접은 후에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출 총합이 3조 원에 달하고 있습니다.”
유신은 수혁의 의견에 동의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비록 대표님이 구상하신 틀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서비스의 질을 크게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포털에 가입한 회원 수는 2,000만 명을 돌파했고 기존에 카페와 블로그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푸른닷컴을 제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차분히 이야기를 듣던 김용민 본부장은 자칫 직원들의 노력이 퇴색될까 염려되어 설명을 첨부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전에 벌여놓은 판이 작지 않아서 내실을 다져야 했던 참이었는데 잘해 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수혁은 용민의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쓴소리를 하기보단 격려를 해 주었다.
“본부장님 말씀대로 포털 자체의 경쟁력이 강해진 게 매출 향상의 가장 큰 이유지만 인터넷 시장의 규모가 날이 갈수록 확대되는 현상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요?”
용민의 반응에 유신은 아차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보고를 이어 갔다.
“푸른닷컴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1조 원 정도였지만 올해는 히트한 상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조 7천억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SH커뮤니케이션은 날이 갈수록 그 규모가 확대될 것입니다. 판교에 짓고 있는 본사는 언제 완공된다고 합니까?”
“건설사 측에 따르면 내년 3월쯤에 완공될 것 같습니다.”
“지오쇼핑이 안착되면 지금 집무실로 다시 돌아올 텐데 하루빨리 새로운 본사로 출근하고 싶군요.”
수혁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대표님, 차라리 그룹 사옥을 하나 더 짓는 건 어떻습니까? 매년 자회사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데 그때마다 사무실을 얻기보단 그룹 건물에 입주를 시키는 거지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찬명 사장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종로에 그룹 사옥을 하나 지을까 고민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적지 않게 드는 만큼 효율적인 방안을 고민해봐야겠지요. 아, 그리고 사장님께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대표님.”
“한정길 사장님께서 일본으로 파견 나가시면, SH에듀케이션 총괄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SH스터디에 애정이 많으셔서 그동안은 새 업무를 드리지 않았지만, 이젠 회사의 주요 간부로서 역할을 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혁은 찬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향후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박찬명 사장님께 업무를 인계하겠습니다.”
“인계와 더불어 ANA로부터 받는 투자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짜 보세요.”
“알겠습니다.”
정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한정길 사장님과 김용민 본부장님. 내년 중에 회사를 상장시킬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잘 진행하고 계십니까?”
“네, 안 그래도 업체에 평가 작업을 맡겼는데 재정 상태가 좋고 매출이 매년 큰 폭으로 늘은 탓에 한 주당 시작 가를 높게 잡아도 무방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용민은 정길과 시간이 날 때면 주식 상장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했기에, 관련 질문에 즉각 즉각 답변할 수 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구체적인 상장 시기는 나중에 업체와 따로 조율해 보도록 하고, 최필재 팀장님. 작업은 잘 되고 계십니까?”
수혁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스마트 폰 소프트웨어 제작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WG와 함께하는 스마트 폰 사업은 극비 사안이었기 때문에 상세한 사안은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아직도 모르고 있는 임원들이 상당한 것 같네. 소수의 임원들만 안다고 하셨는데 말씀대로 보안 관리가 철저하시구나.’
SH커뮤니케이션에 프로그램 개발의 총 책임자인 최필재 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12월 말이면 개발을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은 과정은 협력사에서 생산한 제품에 시연해 보는 것이 전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2월 말이라....... 늦어도 내년 초에는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프로그램이 완성되는 대로 잊지 말고 보고해 주세요.”
“네, 대표님.”
수혁은 작년 가을부터 시작한 소스코드 작업을 11월 초까지 계속했고 지난 주말에서야 끝마칠 수 있었다.
‘현명길 회장님께서 종종 묻곤 하셨는데…… 이제야 면이 서겠어.’
WG의 현명길 회장은 스마트 폰 생산 프로세스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가끔이라도 알려 줬지만, 수혁은 코드만 해석해서 제공할 뿐 컴퓨터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어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시기상조일 수도 있겠지만, 내년 상반기는 우리 회사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분기가 될 겁니다. 그러니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말씀을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기대가 되는군요.”
“힘이 닿는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마트 폰 사업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임원들은 수혁에게 질문을 던지기보단 그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최필재 팀장님께서는 현재 우리 그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주고 계시지만, 그동안 정당한 직급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아닙니다. 비록 팀장이긴 하지만 여러 임원님들께서 제 영역을 존중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업무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최필재 팀장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수혁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내년 초에 인사 개편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섭섭지 않게 대우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재는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저, 대표님 회의 시작부터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
“네, 말씀하세요.”
수혁은 박찬명 사장이 손을 들려다가 내리려는 제스처를 취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임원들이 알아서 추진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중국 진출에 대한 대표님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찬명은 수혁이 일본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중국을 잊은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회의 말미 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잘 말씀하셨습니다.”
수혁은 테이블에 배치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대화를 재개했다.
“그룹 결산 회의는 작년의 기억을 더듬어 봤을 때, 연말에 열리는 게 정상입니다. 아마, 이 시기에 회의를 연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신 분들도 적지 않게 계시겠지요.”
‘대표님 말씀이 맞아. 연간 일정에는 12월 말에 열린다고 적혀 있었는데 별 사유 없이 계획이 조정되긴 했지.’
‘소집하셔서 말없이 나오긴 했지만 어떤 사유로 변경됐는지 궁금하긴 했어.’
임원들은 수혁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차분히 기다렸다.
‘원래는 김정우 회장님과 세부적인 논의를 마친 후에 말해야 하지만…… 미리 이야기한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수혁은 입을 열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없어 정확한 시점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12월 중순이나 말경에 중국에 다녀올까 합니다. 가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사업 파트너도 구해 올 생각이거든요.”
“아, 대표님께선 이미 계획이 다 있으셨군요.”
박찬명 사장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습니다. 현재 중국의 시장 규모는 일본 시장보단 크진 않지만, 엄청난 인구와 제조업을 기반으로 머지않은 미래에는 미국과 더불어 초강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보내기보단 제가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수혁은 SH가 중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흠, 일본의 경우에는 ANA의 김정우 회장님께서 케어를 해 주시지만, 중국은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군요. 아무래도 중국 법인 설립은 일본에 비해 많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일단은 일본에 집중하고 중국 진출은 추후에 고려해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대표님께서 알아서 잘하실 거니 미리 예단하지 맙시다.”
임원들은 중국 진출에 관해 설왕설래하였다.
“많은 임원들께서 걱정하는 거와 달리 일만 잘 풀린다면 일본보다 빠르게 작업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한번 지켜봐 주세요.”
수혁은 주변의 우려가 무색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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