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중국 진출 사안은 출장을 다녀온 뒤 관련 임원들을 호출하여 따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는 여러분의 결산보고를 듣겠습니다.”
수혁은 준비해 온 발언을 모두 마친 뒤 임원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다음으로 결산보고 시간이 있겠습니다. 먼저 SH에듀케이션입니다. 한정길 사장님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SH에듀케이션의 한정길 사장입니다. 저희는 지난해에 SH토익, SH랭귀지 등 다양한 학원을 설립하여 영역 확대에 집중했다면, 올해는 도서 출판과 제조 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문구 사업으로 사업 분야를 넓혔습니다. 이 그래프를 보시면…….”
SH에듀케이션의 한정길을 필두로, 각 계열사 책임자들은 한 해 동안의 활동으로 거둔 성과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고, 수혁은 차분히 앉아 이들의 말을 경청했다.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한 해였어. 폭발적인 성장을 거둔 회사는 없었지만 내년에 있을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할 내실을 다졌다고 생각하자. 우선 당장 내일이라도 김정우 회장님께 전화를 드려야겠어.’
수혁은 머릿속으로 다음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 * *
11월이 지나고 12월이 되었다. 수혁은 지오쇼핑 사옥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유리가 오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야겠다.’
수혁의 퇴근 시간에 맞춰 유리가 회사에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그는 그녀와 함께 SH재단 사무실을 구경하기로 했다.
“회장님, 접니다.”
“들어오세요.”
오후 5시가 넘은 시각, 박유신 사장이 회장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11월 30일부로 온라인 마트 사업 인계 작업을 모두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향후 2년 동안 엘마트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협약도 체결했고요.”
유신은 수혁에게 협약서를 건네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최근에 이병섭 회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지오쇼핑 사이트에 올릴 수 있는 상품이 있는지 검토하신다고 했으니 엘마트와 접촉할 일이 많이 있을 겁니다.”
“말씀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하군요. 추가로 지오쇼핑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수가 오늘을 기점으로 3,000개가 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협약서를 읽으며 대화를 나누던 수혁은 서류를 내려놓고 관심을 보였다.
“10월 이후 취급하는 제품의 수가 3배나 늘어 상승세가 완만해지고 있긴 하지만, 타 업체에서 꾸준히 연락이 오고 있어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매출은요?”
수혁은 상품 수가 늘어난 것에 대한 파생 효과가 궁금했다.
“지난 11월 한 달 동안 올린 매출은 180억가량으로 우리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가장 값싼 가격이라는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수료를 낮게 책정한 탓도 있고, 온라인 시장의 더딘 성장도 한몫했습니다.”
박유신 사장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럴 수밖에요. 물류창고가 완성되지 못한 탓에 빠른 배송 서비스도 못 하고 있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하기엔 품질에 대한 안심도 안 될 겁니다.”
“대표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품질이 균일한 공산품의 경우 꾸준히 매출이 증대되고 있는 반면에 단가가 높거나 희소성이 있는 상품의 경우에는 구매율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상황입니다.”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고객 유입을 늘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회사의 제품들을 단독으로 판매할 수만 있다면 지오쇼핑의 가치는 엄청나게 뛰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명품 회사의 경우 고급스러운 매장 분위기와 제품의 조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온라인 판매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간혹 방문 판매를 하는 업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직수입한 물건으로 마진을 남기는 스타일이어서 우리 회사의 컨셉이랑 맞지도 않고요.”
“당장 어렵다는 건 동의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어찌 됐든 현재는 실현하기 어려운 계획이니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지요.”
수혁은 턱에 손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다른 방안이라면……?”
“별 수 있겠습니까? 스마트 폰이 출시되고 지오쇼핑 어플이 론칭되기 전까지는 기반을 다지는 데 힘쓰는 수밖에요.”
“역시,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는 모양이네요…….”
유신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는 다른 계열사와 달리 성장 폭이 크지 않은 지오쇼핑의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장님, 절 믿고 일단은 지켜보시죠. 치고 나갈 순간이 분명히 올 겁니다.”
“하하, 말씀만 들어도 힘이 납니다.”
수혁의 격려에 유신은 언제 걱정을 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손님 오실 시간이 됐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대표님.”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수혁은 웃옷을 입고 방을 나서려던 그때, 그의 시야에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걸어오는 여성이 한 명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유리야, 왔어?”
수혁은 인솔한 직원에게 감사를 표한 후 유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응, 수혁아. 막 방에서 나오는 것 같던데 바쁜 거 아니야?”
“사장님이랑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까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더라고. 늦어서 미안해.”
“나도 지금 도착했는데 뭘. 그런데 사무실이 엄청 깔끔한데?”
김유리는 수혁과 함께 사옥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오쇼핑은 신생회사라 본사 분위기를 느끼고 싶으면 내년 3월에 완공되는 SH커뮤니케이션 본사로 놀러와.”
“좋아, 초대만 해 주면 방문할게.”
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우리 회사 임원들도 다 소개시켜 줄게.”
“그건 조금 빠르지 않을까? 이달 중순이나 돼야 일을 시작할 텐데?”
“박찬식 사장님이랑 김용민 본부장님도 너처럼 학교에서 만난 분들이야. 그리고 너도 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입사하는 거라 일반 직원들이랑 다르니까 주눅 들지 마.”
수혁은 유리와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쌀쌀한 날씨에 겉옷을 단단히 여미며 대화를 이어갔다.
“확실히 겨울은 겨울이다. 이렇게 추울 줄 몰랐네.”
“어? 차로 이동하는 거 아니었어?”
회사를 빠져나온 수혁이 주차장과 정반대인 곳으로 이동하자 유리가 물었다.
“정관에 기재된 회사 주소 확인해 봤어?”
“강남역 부근인 건 알겠는데 정확히는 어딘지 모르겠어.”
“바로 여기야.”
수혁은 지오쇼핑 사옥에서 5분 거리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아, 여기가 내가 다닐 사무실이구나.”
유리는 건물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앞으로 SH 계열사에서 나오는 매출 중 0.5퍼센트는 SH재단의 운영자금으로 들어갈 거야. 즉,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SH재단의 규모도 커진다는 말이지.”
“수혁아 미안한데 난 재단을 키우는 것보다, 그냥 어려운 분들을 도와드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에만 열중하고 싶어.”
그녀는 경영학과 출신이긴 했지만, 사업가적인 마인드를 갖추는 것보다 소외계층을 돕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널 이사장으로 선임한 거야. 수익을 내려는 사람들은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거든.”
수혁은 오히려 유리의 그런 모습에 신뢰가 갔다.
“잠깐만.”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수혁은 건물 열쇠를 꺼낸 후 문을 열어젖혔다.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다.”
“업무를 보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난 바로 옆에 있으니까 가끔 밥도 먹고 그러자.”
“나야 좋지. 아, 참. 난 내년 2월에 졸업하는데 넌 졸업을 언제 할 거야?”
유리는 3학년 2학기를 끝으로 졸업에 필요한 모든 요건을 채운 상태였다.
“잘 모르겠어. 난 너랑 달리 군대에 가야 해서 빨리 졸업한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더라고. 봐서 대학원을 알아보든가 해야 할 것 같아.”
수혁은 대학을 졸업하면 곧바로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내심 고민이 많았다.
“너한텐 군대 2년 2개월이 엄청 아까운 시간일 텐데……. 고민이 많겠다.”
2002년의 군대는 2021년의 1년 6개월보다 복무기간이 훨씬 긴 시절이었다.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뭐. 자, 이 방이 네 집무실이야. 한번 둘러봐.”
“와, 명패를 보니까 진짜 실감 난다.”
그녀는 탁상 위에 놓인 이사장 명패를 보고 감탄했다.
“사람 시켜서 이사장실에 도어락을 다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회사 정문도 번호키로 바꾸는 걸 추천하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대표님.”
“훗, 잘 부탁드립니다.”
수혁은 유리의 넉살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날 저녁, 이들은 회사를 충분히 둘러본 후 밖에 나와 저녁 식사를 했고, 재단 운영 방향에 대해 짧게 논의하다 헤어졌다.
* * *
12월 중순의 어느 날, 한국대 기말시험을 모두 마친 수혁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장 회사로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리 전화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혁은 집무실에서 ANA의 김정우 회장과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조만간 중국에 방문할 예정인데 일전에 회장님께서 아시는 분이 계신다고…….”
“아, 왕첸 이사장님 말씀이군요. 안 그래도 최근에 연락이 닿아 대표님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수혁은 다소 긴장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관심 있어 하시진 않았습니다. 2년 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사람들과 교류는 지속하고는 있지만, 세상일에 조금 무관심해진 듯 보였습니다.”
“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회장님께 투자를 받은 입장에서 조언을 구하는 게 염치가 없긴 하지만 중국에 대해 잘 모르는 터라 방향을 잡기 어렵네요.”
시원스럽지 못한 답변에 답답함을 느낀 수혁은 자신의 심정을 가감 없이 밝혔다.
“텐진 허베이에 중국문화연구재단 본사가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왕첸 씨가 이사장으로 계시는 곳 말입니까?”
“네, 밑져야 본전이니 직접 보고 담판을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기준이 까다로운 분이시긴 하지만, 한번 마음을 연 상대에겐 한없이 후한 분이시니까요.”
김정우 회장은 왠지 수혁이라면 충분히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수혁 대표는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 친해지고 싶은 타입이야. 어쩌면 나보다 더 돈독한 관계를 맺을지도 몰라.’
수혁의 매력 스텟과 운 스텟을 고려했을 때, 정우의 생각은 그리 허황된 것도 아니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당장 다음 주에라도 중국으로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일이 잘 풀리시도록 멀리서나마 기도하겠습니다.”
결정적인 도움을 못 준 정우는 다소 미안한 어조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저, 회장님. 혹시 이사장님을 뵐 때 알아둬야 할 점이 있습니까? 워낙 정보가 없다 보니 조금 불안해서요.”
‘음, 그분의 성격에 대해선 말씀을 드렸고…… 뭐가 있으려나? 아, 맞다. 하마터면 이걸 말씀드리지 못할 뻔했구나. 지금이라도 생각나서 다행이야.’
수혁의 질문에 정우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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