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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30화 (230/316)

230화

“제가 깜빡하고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네요. 대표님께서 물어봐 주신 덕분에 방금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까?”

수혁은 차분히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해 주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왕첸 이사장님께서 아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끼는 사람이요?”

“우연한 기회에 베이징 자택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을 각별히 챙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김정우 회장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아끼는 사람이야 한둘은 있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제가 왕 이사장님이 까다롭고 엄하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서 조언을 구해 보려는 것이니까요.”

다 아는 이야기에 수혁은 답답함을 느꼈지만,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본인의 친아들에게도 다정함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신데, 그 남성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분위기가 변하더군요.”

“계속 말씀하시죠.”

수혁은 정우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사장님의 베이징 저택에는 일가족들 외에도 집사와 그의 식솔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긴 공산당 원로 간부까지 지낼 정도면 엄청난 부자겠지?’

그는 정원이 딸린 커다란 저택을 상상하며 정우의 말을 경청했다.

“집사로 보이는 노인은 이사장님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들어 보니 젊은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라 친가족처럼 여긴다는군요. 그리고 그 노인의 아들이 제가 주목하는 사람이고요.”

“지금 말씀을 들어 보니 이사장님께서는 자신의 혈육에겐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따뜻하게 대하는 분 같습니다. 방금 주신 조언을 잘 참고해서 좋은 만남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며칠 전에 한정길 사장님과 통화를 나눴습니다.”

그룹 회의 이후 거취를 두고 한동안 고민하던 한정길 사장은 끝내 SH 일본 지부 총괄을 맡기로 했다.

“저보다 연륜도 있으시고 경험도 풍부하셔서 같이 일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1시간가량 통화를 나눴는데, 이미 일본 시장 분석을 어느 정도 끝낸 상태더군요. 확실히 대표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투자를 받는 입장에서 경영은 전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지만 ANA의 지원을 받는다면 훨씬 빠르게 안착할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ANA의 자본으로 세워진 법인이라고 하면 일본 국민들의 반감도 훨씬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직원의 90퍼센트 이상은 일본인으로 채용할 예정이고, 수익 중 일부는 매년 장학금으로 지급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겁니다.”

수혁은 어느 나라든지 타국의 기업이 시장을 점유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년 초에 법인이 설립되자마자 1,500억 엔을 한정길 사장님께 전달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사장님께 사업 기획안 작업을 조속히 완료하여 회장님께 보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업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2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 * *

2002년 12월 23일 월요일 성탄절을 이틀 앞둔 시점, 수혁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들은 크리스마스 때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텐데……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기말시험을 마치고 방학 시즌이 되자, 수혁은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텐진에 있는 중국문화재단을 방문하기로 했다.

‘왕첸 이사장의 아버지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초대 주석의 최측근이었군.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산 탓에 당시에는 드물게 미국 유학도 다녀온 인물이야.’

그는 격무와 시험 준비로 지친 심신을 달랠 틈도 없이 왕첸 이사장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베이징 부근의 도시이긴 하지만 이때는 발전이 안 되어 있었구나.’

텐진공항에 도착한 수혁은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그는 창밖에 보이는 텐진 시내의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중국문화재단으로 가 볼까?’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은 수혁은 중국문화재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단 사무실은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정부의 실세가 이사장으로 역임하고 있어서 그런가 굉장히 화려하군. 사무실 외에도 안에 박물관도 있는 것 같아.’

중국문화재단 건물은 주변의 낙후된 건물에 비해 세련되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왕첸 이사장님을 뵈러 왔는데 혹시 안에 계십니까?”

수혁은 정문에 위치한 경비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신데 이사장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김정우 회장님 소개로 온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하면 알아들으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경비원은 문화재단에 방문하는 손님으로 어울리지 않게 명품 정장과 코트로 치장한 수혁을 경계했지만, 유창한 중국어 실력에 긴장이 다소 풀린 듯 보였다.

‘언어이해 프로그램은 정말 신의 한 수였어. 세계 어디를 가든 불편함이 없잖아.’

수혁은 경비실 안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남성을 보며 생각했다.

“이사장님은 현재 출타 중이시라고 합니다.”

“오늘은 아예 안 오시나요?”

“저 같은 말단이 뭘 알겠습니까? 그저 안에서 기다리라는 것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박물관을 좀 둘러보고 있겠으니 이사장님이 오시면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수혁의 요구를 들어줬다.

‘겉에 보이는 것보다 부지가 훨씬 넓구나…….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들이 많은 탓이겠지.’

중국문화재단에는 보물로 분류될 만한 유물들이 수도 없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혁은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유물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언어 이해 프로그램은 정말 대단해. 갑골문자도 해석할 수 있다니……. 하지만 이런 능력들은 숨기는 편이 좋을 거야.’

수혁은 갈라진 거북이 등에 표시된 알 수 없는 기호들을 해석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전쟁을 앞두고 승패를 점치기 위해 새겼다고 했는데 단순히 그런 의도만 있는 건 아니었어. 황실, 더 나아가 백성들의 안위와 1년의 행복도 점을 쳤는데 괘와 비슷한 문양을 분석하여 미래에 다가올 일을 다양한 각도로 예측했군.’

과거 칸타빌레 서점에서 수많은 고서들을 읽은 수혁은 중국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그는 갑골문자를 사용한 문명이 단순히 미신을 추종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고대 중국이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를 보시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누구지?’

수혁은 등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저,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허허, 마사토모가 저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려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왕첸 이사장님이시군요. 안녕하십니까? 강수혁입니다.”

수혁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바로 인사했다. 왕첸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전통 의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한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중국어가 유창하시군요?”

“옛날에 틈틈이 공부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요.”

수혁은 손을 저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집중력이 대단하신 것 같던데요? 30분 전에 박물관에 도착했지만 갑골문자를 보느라 인기척도 못 느끼시더군요.”

“학교에서 책으로 배웠던 문자를 육안으로 보게 되니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고문서나 유물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왕첸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잘 아는 어르신이 집안 대대로 고서를 모으셨는데 친하게 지낸 덕분에 견문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수혁은 칸타빌레 사장 정평우를 염두에 두고 답변했다.

“한국의 고서라 하면, 조선이나 고려 시대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유물이 잘 보존이 되지 않은 탓에 대다수의 고서가 조선과 고려 시대 것이긴 하지만 가끔 삼국시대의 고서도 발견될 때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계시는 그 어르신께서도 제법 괜찮은 컬렉션을 보유하신 모양이군요.”

왕첸은 수혁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아마 한국에서는 가장 많은 양의 고서를 소장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역시, 그래서 그런 거였군.”

“네?”

수혁은 영문 모를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적, 유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자, 교수, 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왕첸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강수혁 대표께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남다르다고 하시면…….”

“금전적 욕심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그런 탐욕적인 눈빛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순수함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네요. 중개인이나 수집 상인들의 경우엔 돈을 추구하는 게 당연할지 모르지만, 가끔 교수나 학자들 중에도 획기적인 발견을 통해 이름을 빛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제법 있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혁은 공손한 태도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좋게 봐주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본 것일 뿐이니, 너무 의미부여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문화재를 탐욕의 눈길로 쳐다보는 시정잡배 같은 놈들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네요.”

왕첸 이사장은 은퇴 후 국책 기업의 회장이나 대표 자리에 역임할 수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중국문화재단으로 왔는데 이는 순전히 그가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많은 대화를 나눠 보진 않았지만 할아버지랑 똑같은 말씀을 하는 걸 보면 강직한 분이실 것 같아. 할아버지도 이사장 못지않게 옛것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분이었지.’

수혁은 칸타빌레 사장 정평우가 고서들을 물려준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왕첸이 순수한 의도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평우도 고서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책을 빌려주거나 판매하곤 했다.

“이런, 어쩌다 보니 저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네요. 수혁 씨라고 했나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교 시절 기억에 젖어 들었던 수혁은 왕첸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냐고 물었습니다.”

싸늘한 왕첸의 말투는 조금 전의 온화한 태도와 극명히 대비되었다.

‘뭐야, 같은 사람 맞아?’

수혁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왕첸에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 23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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