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국내 외에 진출할 만한 곳을 찾던 중, 중국 시장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혁은 에둘러 표현하기보단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그럼 현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나 기업인을 찾아가면 될 일이지,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 될 일이긴 했지만, 김정우 회장님이 이사장님을 강력하게 추천해 주셔서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일단, 목적을 갖고 찾아온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만약 부담스러우시다면 사업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겠습니다.”
왕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수혁은 한발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후로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피곤했던 참이었거든요. 그리고 김정우 회장은 내가 많이 아끼는 사람이지만, 그조차도 나로 인해 큰 이득을 본 적이 없으니 저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렇군요.”
수혁은 왕첸이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쓸데없는 말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하시는 분인 것 같아. 김정우 회장님의 친분을 이용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겠어.’
그는 더 이상 정우를 언급하기보단, 스스로의 힘으로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이 그게 다라면 오늘 하루 푹 쉬시고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성사되지 않을 일에 목매달아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니까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편하게 말씀드린 게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습니다. 뚜렷한 원칙과 애국심으로 오랜 세월 당에 헌신한 분께 돈 이야기는 실례가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아 충고하는 거지, 속내를 계속 숨겼다면 당장 이 자리를 떴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돌아가신 선친께서 당의 핵심간부로 계신 덕분에 부유한 삶을 누렸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선 돈을 결부시키는 걸 싫어합니다.”
수혁이 마음을 헤아려주는 발언을 하자 왕첸의 목소리는 이전에 비해 약간 가라앉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업이나 돈과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박물관을 돌아보며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떻겠습니까?”
“허허, 대화라는 건 수준이 어느 정도 맞아야 되는 법인데 한국에서 오신 손님께서 중국의 문화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내 강 대표의 집중력과 열정은 높게 사지만, 깊이를 갖췄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요.”
수혁의 속내를 들은 왕첸은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데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였습니다. 제가 비록 왕첸 이사장님만큼의 지식과 통찰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함께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중국어에 그 정도로 능통하신 걸 보면 방금 말씀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둘러봅시다.”
왕첸은 외국에서 방문한 손님들 중 수혁만큼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 다행이다. 이제부터 말 한마디 하는 데 정말 조심해야겠다.’
거짓말을 통해 위기를 넘긴 수혁은 긴장한 상태로 왕첸의 뒤를 따랐다.
“이건 상나라 때 만들어진 청동 항아리입니다.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해서 집안의 장자에게 물려주곤 했던 보물입니다. 손잡이를 보시면 특유의 문양이 있는데, 항아리마다 형태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네요.”
수혁은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국문화재단 소속 연구원들은 최근 여러 항아리들을 놓고 문양들을 비교·분석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 항아리는 왕실의 것이 아니군요.”
왕첸 이사장이 설명하려던 그때, 수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다른 항아리들을 보신 적이라도 있는 겁니까?”
수혁의 말을 들은 왕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문양이 아니라 일종의 기호 같습니다. 제가 볼 땐 상나라 시대 조씨 성을 가진 귀족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보가 아닐까 하는데, 맞습니까?”
“바로 보셨습니다. 상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항아리는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집안에 하나씩 들여놨는데 이 항아리는 귀족의 저택이라고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혹시 고고학을 공부하신 적이라도 있으십니까?”
왕첸은 크게 감탄했다.
“평소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고고학을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에서 뜻을 유추해 봤는데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겁니다.”
수혁은 항아리에 쓰인 상나라 시대 언어를 읽었다고 말하면 피곤해질 것을 염려하여 과거에 써먹었던 변명을 차용했다.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언어와 기호를 접하면서 나름의 패턴을 알게 된 이후 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패턴을 통해 뜻이 유추가 된다는 건 이 문양이 문자라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봐도 고대 언어로는 보이지가 않는데요?”
왕첸은 손잡이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중국 고대 문자는 상형문자인데, 제가 봐도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은 상형문자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까요?”
수혁의 언변에 빠져 들은 왕첸은 이젠 대놓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상나라 시대 그 이전부터 쓰인 특수한 기호가 아닐까 싶습니다. 항아리에 신비스러운 기운이 있다고 믿은 건 중국의 주술사와 샤먼과 관계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계속해 보세요.”
“정확한 근거를 대긴 어렵지만, 중국 고대에 점을 치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견해일 뿐 공신력이 담보되는 건 아니니 가볍게 듣고 넘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왕첸의 질문에 도움말 기능을 작동시킨 뒤 해당 언어의 기원을 알아보고 대답했다. 그러나 지식의 출처를 밝히긴 어려웠기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답변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는 바로 저 문양을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공인한 무속인뿐이라고 들었습니다. 비록 학문적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자세로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초반보다 경계심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이번 기회에 쐐기를 박아야겠어…….’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다른 것들도 같이 살펴볼 수 있을까요? 저녁까진 아직 2시간 정도 남았는데, 식사 전까지 이사장님과 유물들을 견문하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이래 봬도 이 박물관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수혁으로 인해 뜻밖의 즐거움을 느낀 왕첸은 기꺼이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 책은 춘추전국시대 때 공자의 제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쓴 서책의 일부입니다.”
왕첸은 유리함 속에 든 훼손이 심한 고서를 손으로 가리켰다.
‘잘됐다.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야겠어.’
수혁은 고서 번역이라면 어렸을 때 질리도록 했기 때문에 어떤 책이든 자신 있어 했다.
“흔히 공자의 제자라 하면 안회, 자유, 자공, 민자건 등을 떠올리지만 이들 외에도 뛰어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따랐습니다. 인구가 많지 않던 전국 시대에 3,000명에 가까운 제자들을 거느렸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염우라는 사람도, 알려지진 않았지만 공자가 굉장히 아꼈던 제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고대 한자를 읽으실 수 있으시군요.”
왕첸은 재단 연구원들이 분석해 놓은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기에 수혁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여러 나라를 유랑할 때, 수레를 끄는 말들을 몰던 마부가 염우라고 합니다. 그는 망국의 백성으로 노예 신분이었으나, 공자가 어여삐 여겨 특별히 제자로 삼았었죠.”
수혁은 오래된 종이 위에 적힌 글을 차분히 읽으며 말했다. 염우가 스승인 공자를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공자는 소수의 귀족이 아닌 만백성을 위한 통치 철학을 세운 분이셨지만, 기본적으로 계급 의식이 있었던 분이셨으니까요.”
“공자 선생님께서도 하급 무사의 아들로 가진 역량에 비해 귀한 쓰임을 받지 못했는데, 천민이라는 이유로 괄시받는 염우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거지요.”
“그런 내용도 있습니까?”
“죽간에 적힌 내용을 일부 말씀하시길래 다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수혁은 서책 옆에 놓인 죽간을 읽는 중이었다.
“사실, 재단에 소속된 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하긴 했지만…… 고대 언어를 완벽하게 해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빼먹은 내용이 적지 않게 있을 겁니다. 혹시,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요?”
왕첸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수혁을 바라봤다.
“학식이 깊은 연구원분들이라면 대부분의 내용을 놓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죽간에 적힌 문장들 중에는 특별한 글자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글자요?”
“염우는 노나라 사람이었던 공자로부터 학문을 익혔기에, 노나라 귀족과 여러 나라에서 통용되던 공통어로 서책을 저술했습니다. 하지만 이 죽간에는 서책에 쓰인 문자와 형태가 다른 글자들이 제법 있습니다.”
수혁은 죽간에 쓰인 몇몇 문장을 손으로 짚어 줬다.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 대표님 눈에는 달라 보이나 봅니다.”
“서책의 이 글자와 죽간의 이 글자는 얼핏 봤을 땐 동일해 보이나 점이 찍힌 위치와 선의 굵기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호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왕첸은 신기한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놀라운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서책에 쓰인 글자의 세로획은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진 반면에 죽간의 글씨는 정반대의 형식으로 적혀져 있었다.
“죽간에 쓰인 문장들은 공자가 아닌 그의 선친에게 배운 것으로, 자세히 보면 서술 구조도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염우가 공자를 만나기 전부터 학문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이건 학자들도 밝히지 못한 새로운 사실입니다.”
수혁의 이야기를 들은 왕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염우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망국의 언어를 아버지를 통해 익혔던 거지요. 비록 중국에 있던 여러 나라들이 서로 필담을 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문자 간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수혁은 어플을 통해 죽간에 쓰인 문자에 관한 지식을 모두 읽은 덕분에 상세한 설명이 가능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기존의 틀로 해석하다 보니 놓친 부분이 발생한 거군요.”
왕첸은 수혁을 경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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