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그렇습니다. 비록 약소국이라고도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지만 나름의 언어 체계가 있었죠. 염우는 대대로 내려온 선조의 지식을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았을 확률이 높고요. 이 의견은 제 추측일 뿐이니 참고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첸의 말에 동의했다.
“마음 같아서는 연구원들을 불러놓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지만 멀리서 오신 손님에겐 예의가 아니겠지요.”
왕첸 이사장은 새로운 발견에 흥분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저야 딱히 일정이 없기 때문에 이사장님이 원하시면 언제든 만날 수 있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느라 바쁘실 텐데 연구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건 염치없어서 못 하겠습니다. 이러지 마시고, 저녁 전까지 저랑 좀 더 둘러보시다가 함께 식사라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녁 식사까진 예상 못 했는데 마음이 좀 열렸나 보네?’
수혁은 뜻밖의 제안에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야 좋지요. 평소 중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사장님 덕분에 진귀한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돼서 행운이네요.”
“하하,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자, 이쪽으로 오시죠.”
왕첸은 간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 온몸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건 송나라 시대 유명한 문필가의 서예입니다. 필체가 웅장하고 문장력도 좋아 호평받는 작품이지요.”
그는 물 만난 고기마냥 자신이 애정을 갖고 있던 문화재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줬다.
“사무실에 서예를 할 수 있는 도구를 아예 놓고 계시네요.”
“마음이 번민해질 때 서예만큼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것도 드물지요. 부족하지만 저기 걸린 것들이 모두 제 작품입니다.”
이사장실에 들어온 수혁은 벽 곳곳에 걸린 붓글씨들을 살펴봤다.
왕첸은 수혁과의 만남이 즐거운 나머지 저녁이 다 지나도록 대화를 나눴고, 급기야 근처 음식점에 주문하여 시간을 아끼는 열정을 보여 줬다.
“이사장님, 음식이 도착했습니다.”
“테이블에 올려놓게. 대표님, 시장하실 텐데 식사 먼저 하고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토록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이사장님께서 즐거워하시니 다행이긴 하지만 사업 이야기는 언제 꺼낼 수 있을까? 이분의 성품을 고려했을 때 말 한 번 잘못하면 간신히 형성된 친밀감이 순식간에 허물어질 거야.’
수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급히 준비한 식사가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흥미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때를 놓쳐 누추한 곳에서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왕첸은 이전과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수혁을 대했다.
“누추하다니요.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요. 특히 이 오리고기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식당 주인이 베이징 출신인데, 다행히도 저랑 연이 있어 특별히 최고급 북경오리로 주문했습니다. 외국에서 온 귀빈들의 경우 기름기가 많은 중국 음식이 안 맞다고 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는데, 이 오리요리만큼은 극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왕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후 자스민 차는 흔한 레퍼토리이긴 하지만 입안의 기름기를 씻겨 주는 데 참 제격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리고기 말고도 다른 음식들도 모두 입맛에 맞았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저, 이사장님. 제가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서예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이사장님께 어울리는 글귀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오, 저야 좋지요. 이럴 게 아니라 저도 대표님께 성의를 보여야겠습니다.”
“그럼 서로에게 적합한 글귀를 적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수혁은 왕첸이 서예를 즐기는 것을 겨냥한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문장은 각자 알아서 정하는 것으로 하죠. 널린 게 종이니까 충분히 연습하신 다음 쓰셔도 되니 부담 갖지 마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에 붓글씨를 쓰는데 적합한 테이블이 있습니다.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작업해 주시면 됩니다.”
왕첸은 한눈에 봐도 기다란 테이블로 수혁을 인도했다. 그곳에는 중국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종이들과 서예 도구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혹시 하시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순간 혹해서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잘 할 수 있을까? 비록 고고학과 고대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서예는 기본적인 연습과 연륜이 필요한 분야이거늘…….’
평소 서예에 조예가 깊은 왕첸은 수혁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보아하니, 나에 대한 믿음이 금세 사라진 모양이야. 훗, 뭐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지.’
수혁에겐 도구 이용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서예를 함에 있어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과거 칸타빌레에 있을 때 봤던 서예 집들의 문장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좋아, 결정했어.’
적절한 문장과 필체를 정한 수혁은 일필휘지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자고로 붓글씨란 차분한 상태에서 더 잘 써지는 법인데 의욕만 앞서는 걸 보면 볼 필요도 없겠어.’
건너편 테이블에서 서예를 하던 왕첸은 거침없이 붓을 휘두르는 수혁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다 끝나셨습니까?”
문장을 천천히 써 내려가던 왕첸은 고개를 들자,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수혁이 보였고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배움이 짧다 보니 숙고하기보단 마음이 가는 대로 가볍게 써 봤습니다.”
“저도 다 돼 가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네, 이사장님.”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 *
“취미로 하신다고 했지만 웬만한 서예가들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입니다.”
왕첸이 붓을 내려놓는 것을 확인한 수혁은 그의 작품을 면밀히 살펴봤다.
“당나라 때 시대를 풍미했던 진자앙의 등유주대가의 문구로군요.”
“오, 이 시를 아십니까?”
“우연한 기회에 중국의 명시들을 모아 놓은 책을 본 적 있는데, 거기서 읽었던 문장 같습니다.”
수혁은 어플의 기능으로 정보를 알아냈음을 자연스럽게 숨겼다.
“전불견고인, 후불견래자, 염천지지유유……. 계북루에 오른 진자앙이 인생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한탄한 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사 욕심을 내기보단 올바른 삶을 살아가라는 이사장님의 충고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허허, 따로 해석해 줄 필요가 없네요. 맞습니다. 짧은 인생사 아등바등 살지 말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자는 의미에서 적어 보았습니다.”
왕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씨체가 힘이 있고 웅장한 게 연세가 많은 분의 글씨로 보이지 않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나이가 먹었다고 헛헛하게 살기보단, 죽는 그 날까지 단점을 보완하고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한 획 한 획 전력을 다해 썼습니다.”
굵은 붓으로 반듯하게 쓰인 글씨들은 기력이 쇠한 노인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호령하는 대장부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 집무실에 걸어놓고 수시로 쳐다보겠습니다.”
“주소만 알려 주시면 사람을 시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자, 이제 대표님 것을 구경 좀 해 볼까요?”
왕첸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수혁이 작업했던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갔다.
“흠, 춘풍대아능용물 추수문장불염진이라……. 처음 보는 문장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뜻을 지닌 글귀군요.”
“이 문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했던 김구 선생님께서 많이 쓰셨던 글귀입니다.”
수혁은 턱에 손을 괴고 작품을 음미하는 왕첸을 바라보며 말했다.
“봄바람 같은 아량은 만물을 포용하고,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장부의 삶을 살았던 인물치고는 정갈한 문구인 것 같군요.”
“김구 선생님은 대한민국이 부국한 나라가 되길 바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타국의 침략을 제어할 정도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느낀 민족인 만큼 다른 나라에 위협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거친 인생 속에서 군자의 삶을 견지하셨던 분이셨네요.”
왕첸이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한 김구 선생의 사상이 생각보다 유려하고 부드럽다는 것을 말하자 수혁은 적절한 설명을 덧붙여 그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대표님의 필체는 중국의 옛 서예가들의 필체와 유사하면서도 살짝은 다른 듯합니다.”
“조선 제일의 서예가로 불린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필체를 흉내 내봤습니다.”
“중국의 서예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추사 김정희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추사 김정희는 조선의 옛 서예와 중국의 옛 서예를 연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개발한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그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필체에 변화가 생겼는데, 수혁은 김정희가 한창 활동하던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보여준 강직한 필체를 따라 했다.
“단순히 흉내라고 하기에는 멋진 작품입니다. 솔직히 제가 쓴 글씨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전 오히려 이사장님의 힘 있고 독창적인 글씨에 감명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두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대표님의 작품을 마음에 새기며 군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항상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김구 선생님의 문장을 인용한 데는 군자의 삶을 살자는 의미도 있지만 제가 담고자 하는 의의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요?”
왕첸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김구 선생님은 이곳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 독립운동의 초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시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자국의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써 주셨습니다.”
수혁은 사뭇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했다.
“왕첸 이사장님과 저도 비록 국적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지만 힘들 때나 슬플 때 자신의 일처럼 도와줄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에 김구 선생님을 떠올렸던 겁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오늘 처음 만났지만, 저도 강수혁 대표님께 깊은 우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작품에 더 큰 애정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감동을 받은 왕첸은 수혁에 대한 호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밤도 깊었는데 이만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11시가 넘었습니다.”
수혁은 오랜 시간 쉬지 못한 왕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혹시 숙소를 이미 잡으셨습니까?”
“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텔에 짐을 풀어놨습니다.”
“그렇군요…….”
‘갑자기 왜 저러시지?’
대답을 들은 왕첸이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이자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보통 때라면 처음 만난 손님에게 이런 제안을 하지 않는데…….”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내일부터 4일간 휴가를 낼 생각인데 북경에 있는 저희집에서 쉬었다 가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귀한 작품도 받았는데, 이렇게 보내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좋아! 됐다!’
왕첸의 말에 수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23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