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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33화 (233/316)

233화

‘예전에 김정우 회장님이 말씀해 주신 바에 따르면 집에 초대받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어. 반면에 난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거야.’

내색하지 않았지만, 수혁은 뜻밖의 초대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는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왕첸의 말에 집중했다.

“대표님, 내일 오전에 호텔로 차를 보내 드릴 테니 남은 일정 동안은 우리 집에서 머무르심이 어떠십니까?”

“저에게는 감사한 일이지만 오히려 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 중국에선 멀리서 온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양하지 마시고 내일부터 함께하시죠.”

왕첸 이사장은 손을 저으며 수혁의 방문이 부담되지 않음을 표현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일단, 숙소에 들어가서 짐을 싼 뒤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나가시죠.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날이 찹니다. 걸어서 금방이니 알아서 가겠습니다. 푹 쉬세요.”

“허허,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왕첸은 수혁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내일부터가 진짜 시작이군. 자택에 가게 되면 회장님이 말씀하신 청년을 먼저 찾아봐야겠어.’

재단 건물을 빠져나온 수혁은 정우가 일전에 언급했던 사람을 떠올리며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른 아침, 수혁은 예정보다 이른 시점에 체크아웃한 뒤 호텔 주차장에 서 있었다.

“강수혁 대표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장님이 보낸 이진량이라고 합니다.”

운전기사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성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사장님의 자택은 여기서 얼마나 걸립니까?”

“교통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이 차로 2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텐진은 베이징 바로 옆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이동하는데 큰 부담이 없었다.

“여기가 이사장님의 저택입니다.”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네요?”

목적지에 도착한 수혁과 이진량은 차에서 내렸다.

“요직에 계셨을 때는 상해나 베이징 한복판에 거주하신 적도 있지만, 한적한 곳을 원하신다며 외곽에 전원주택을 지으셨습니다.”

왕첸의 집은 베이징 교외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단층 구조로 된 오래된 가옥들과 대비해서 화려한 자태를 자랑했다.

“이사장님의 명성에 걸맞게 자택이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수혁은 정원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간밤에 눈이 내려 잘 손질된 초목 위에는 눈이 살포시 얹혀 있었는데, 겨울 햇살이 반사되어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저택은 현재 주석께서 이사장님이 당에 헌신하신 공을 인정하여 지어 준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옛날부터 당에서 활동하셨다면 이보다 훨씬 좋은 집을 지으셨을 수 있을 텐데 생각보다 소탈하시군요.”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봤던 중국 부자들의 대저택들과 비교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장님 정도의 집안과 권력이며 부야 얼마든지 축적할 수 있었지만, 선대가 남긴 유산으로 충분하다며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드님에게만은 예외였지만 말이죠.”

“아드님이요?”

“왕웨이 회장님 말입니다. 현재 석유 시추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왕첸 이사장님 덕분에 회사는 순식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좋은 이야기인데 표정은 왜 이렇게 씁쓸해 보이지? 왕웨이라는 사람한테 당한 거라도 있나?’

수혁은 진량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걸 포착했다.

“왕웨이 회장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저를 항상 친형제처럼 대해 주셨지요. ……이런, 제가 주제넘은 발언을 한 것 같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들은 모두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진량은 주인댁 가족사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아닙니다. 부담스러우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무리한 질문한 게 아닌가 걱정스럽네요.”

“대표님께서 워낙 인상도 좋으시고 편하시다 보니, 순간적으로 본분을 잊었습니다. 따라오시죠. 이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쾌활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던 진량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공손한 자세로 돌아갔다.

“어르신, 저 진량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표님이 도착한 모양이구나. 들어와라.”

왕첸이 지내는 건물은 정원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집사를 비롯한 식솔들이 사는 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표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차까지 보내 주셨는데 고생은요. 이진량 씨 덕분에 편히 올 수 있었습니다.”

수혁은 진량을 슬쩍 보며 말했다.

“하하, 우리 진량이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식처럼 키웠던 아이입니다. 올해로 34인데 아직 결혼할 생각을 안 하니 그게 걱정이지요. 아, 그 전에 소개부터 해 드려야겠군요. 이쪽은 선친 때부터 우리 가문에 헌신한 이용 집사님입니다. 참고로 진량이 아버지 되시는 분이죠.”

“안녕하십니까? 이용입니다.”

왕첸은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노인을 수혁에게 인사시켰다.

“바쁜 이사장님을 대신해서 집사님이 왕씨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군요.”

수혁은 김정우 회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집사님 덕분에 제가 안심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안사람이 일찍 세상을 뜬 후 내 아들과 진량이를 도맡아서 키워 준 은인과도 같은 분이시죠.”

왕첸은 이용을 따뜻한 눈길로 쳐다봤다.

“이런, 손님을 앞에 두고 민망한 말씀을 하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사장님, 조금 이따 오후 5시에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들고 자택에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던 이용은 화제를 전환했다.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잔치라도 해야지요.”

왕첸은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손님이 오는 날이면 종종 거금을 쓰곤 했다.

“대표님, 정원을 더 둘러보시든가 아니면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 피곤했던 참이었습니다.”

“진량아, 대표님과 함께 후원을 같이 걷는 건 어떠냐? 아직 그쪽은 구경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제가 대표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이진량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네.”

진량은 뒤뜰을 구경하기 전에 수혁이 짐을 풀 수 있게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은 혼자 지내기에는 상당히 컸는데, 창밖으로 연못과 작은 동산이 보여 운치를 즐기기에는 그만이었다.

“날이 추운데 후원을 돌아보는 건 가는 건 내일로 미뤄도 괜찮을까요?”

“당장 나가 불을 때고 따뜻한 차를 내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수혁이 객실 탁자에 앉아 말을 꺼내자 진량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방은 지금도 충분히 따뜻합니다. 전 단지 진량 씨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꺼낸 말입니다.”

“저랑요?”

진량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이 사람이 김정우 회장님이 말한 남자가 틀림없어. 이사장님께서 바라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고.’

수혁은 오갔던 대화와 집안에 흐르는 분위기를 통해 자신이 찾던 사람이 이진량이라고 확신했다.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앉으시죠.”

“아, 네.”

한동안 방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고 이내 수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살아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님과 단칸방에 살았습니다. 삶에 희망도 없었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적도 있었지요.”

“의외시네요. 워낙 밝아 보이셔서 그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평소 왕첸 이사장을 보좌하느라 젊은 사람과 대화할 일이 적었던 진량은 금세 관심을 보였다.

“이게 과거의 저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수혁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뚱뚱했던 자신의 모습을 핸드폰을 통해 보여 줬다.

“지금과 딴판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니 대표님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네요.”

“당시에는 친구 하나 없고 절망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이제 와선 다 추억이라고 느껴져 이렇게 보관하고 다닙니다.”

“현재 견실한 기업을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힘든 순간이 있었다니 믿겨지지 않는군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던 겁니까?”

진량은 점점 수혁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아, 저의 18살 무렵부터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1998년 6월 말 쯤이었을 겁니다. 저는......”

수혁은 어플과 조물주에 관한 이야기만 빼고, 그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가감 없이 말해 줬다.

“정말 엄청난 의지력이십니다. 자칫 실패로 끝날 수도 있던 인생을 훌륭히 바꾸셨군요.”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유년 시절의 불우한 사건들과 그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진량은 수혁의 인생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사람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저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중국에는 ‘위대한 영혼은 의지만 있고 약한 영혼은 희망만 있다’라는 명언이 있는데, 딱 대표님과 어울리는 말인 것 같습니다.”

“비록 알게 된 기간이 짧지만 진량 씨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수혁은 회한의 감정을 명언에 빗대어 표현하는 진량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벌써 점심때가 되었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먹을 것을 내오겠습니다.”

슬픈 표정을 짓던 이진량은 민망했는지 황급히 일어나 방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저, 괜찮으면 여기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도 혼자 먹는 것보단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거든요.”

“좋습니다. 그럼 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진량은 흔쾌히 수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하는 아주머니를 불러 점심거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고, 얼마 있지 않아 상이 차려졌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내막을 알아보자. 이럴 때일수록 성급하게 굴어선 안 돼.’

수혁은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급하게 차렸는데 음식은 잘 맞으십니까? 저녁이면 제대로 된 만찬을 즐길 수 있으니 서운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어렸을 때 워낙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음식은 가리지 않는 편입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대표님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야 이사장님과 친분을 쌓고, 중국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함이지요.”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진량은 수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며칠 전, 왕첸이 수혁의 방문을 두고 논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김정우 회장 아시죠?”

“네, 일본에서 유명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거로 압니다. 이사장님하고는 10년 전에 인연을 맺었지요.”

정우의 연락을 받은 왕첸은 이용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23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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