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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35화 (235/316)

235화

“곧 있으면 이사장님이 오실 텐데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참 이상하네?”

이용은 연회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량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의아해했다.

“날이 추운데 공연이 있는 모양이군요?”

“아, 네. 추위를 대비해서 야외에 난로를 많이 설치할 예정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대비를 다 해 두셨네요.”

“그런데 진량이가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수혁은 답변을 피하기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지만 이용은 집요하게 물어봤다.

“진량 씨는 현재 제 방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음주가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연회를 앞두고 이런 추태라니…… 죄송합니다. 이런 행동을 할 아이가 아닌데 참 이상하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제가 가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용은 민망해하는 얼굴로 황급히 수혁의 침소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혁은 그를 붙잡고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오늘만큼은 푹 쉬시라고 했습니다. 만약 기분이 불쾌하시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수혁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사과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그저 민폐를 끼친 게 아닌가 싶어서 그렇지요. 그나저나 술이 과했나 봅니다. 이제껏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준 적이 거의 없거든요.”

‘진량 씨 말이 맞는 모양이군. 보통 이런 경우에는 바로 아들을 깨우고 꾸짖을 텐데, 그러지는 못하네.’

수혁은 이용이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진량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평소 음주를 안 하다가 갑자기 많이 마셔서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진량 씨가 괴로운 이유는 단순히 과음 때문만은 아니더군요.”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혹, 진량이가 술김에 무슨 말이라도 한 겁니까?”

이용은 수혁의 의미심장한 말에 불안해하며 물었다.

“뭐, 왕씨 집안에 얽힌 비밀을 조금 듣기는 했습니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밖에 누설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이사장님이 오셔서 진량 씨에 대해 물어보면 잠시 밖으로 보냈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왕 쉬시는 거, 스트레스 없이 편히 쉬셨으면 해서요.”

수혁은 이진량을 위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왕첸과 원활한 대화를 위한 포석을 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거라면 문제없습니다. 저, 혹시 진량이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집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내용일 겁니다.”

“후, 알겠습니다. 잠시 후 뵙도록 하죠.”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던 이용은 수혁의 말을 듣자 한숨을 내쉬곤 자리를 떴다.

‘이용 집사는 어차피 모든 걸 알게 될 사람이라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 일단은 연회를 즐기다가, 왕첸 이사장과 대화할 만한 타이밍을 잡아 보자.’

수혁은 진량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화 전략을 모두 짜 놓은 상태였다.

* * *

“이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회 시간이 거의 임박하자 왕첸은 후원에 모습을 드러냈고,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허허, 벌써 오셨군요. 귀빈보다 늦게 도착하는 주인이라니……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미리 와서 정원도 둘러보고 집사님과 담소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습니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진량이는 어디 있습니까?”

왕첸은 수혁의 옆을 지켜야 할 아들이 보이지 않자 궁금해하며 물었다.

“집사님이 심부름을 시킨 듯 합니다.”

“아, 그렇군요. 자, 이만 자리로 갈까요? 마을 주민들이 특별 공연을 준비했나 봅니다.”

“좋습니다.”

수혁은 왕첸과 함께 정원에 세팅된 의자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눈이 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천막도 쳐 놓고 방한 기구들을 설치한 터라, 장시간 앉아 있어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곳이 비록 500명 남짓한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래 봬도 경극단, 음악단 등 다양한 집단들이 존재합니다.”

“안 그래도 분을 칠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몇 봤는데 경극을 하기 위함이었군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첸의 말을 경청했다.

“날이 좋을 땐 장기간 공연한 적도 적지 않지만, 추운 날씨를 고려해서 경극단을 불렀습니다. 아마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만 진행될 거니 시장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후, 음식이 제공될 건데 마을 주민들의 연주를 들으며 식사를 하면 그런대로 운치가 있는 편이지요.”

중국의 유명 소설이나 희곡의 스토리를 재현하는 경극은 통상적으로는 2~3시간 정도 공연했으나, 19세기 들어서며 주요 내용만 1시간 내외로 공연하는 게 관례화되었다.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네요. 아, 분위기를 보니 이제 준비가 다 끝났나 봅니다.”

천막 건너편에는 간이 무대가 설치돼 있었는데, 사람들은 준비가 다 된 건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천막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들 좌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있으면 우리 마을의 자랑인 연천경극단의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전에 왕첸 이사장님의 짧은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이용 집사가 무대에 올라 발언하자 곧이어 왕첸이 제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

“제가 이 마을의 주민이 된 지 어언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낯선 타지인이 아닌 이웃 형제로 대해 줬던 여러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전 본래 충칭이 고향이지만 이곳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좋으니 굳이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집중이 잘되는군.’

수혁은 바로 옆에 앉아 그의 말을 차분히 경청했다.

“본래 연회는 연초에 여는 것이 관례였지만 귀한 손님이 오셔서 일정을 앞당겼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강수혁 대표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왕첸은 예고도 없이 수혁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수혁은 당황한 기색 없이, 준비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3일 정도 이 마을에서 머무를 예정인데,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들과 좋은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국어가 아주 유창하군. 부모님 중에 중국 사람이라도 있나?’

‘외모나 겉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대단하네.’

마을 사람들은 수혁이 중국어로 인사를 하자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배우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순 없지요. 이만 시작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왕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배우들은 무대 위로 나와 경극을 개시했다.

‘보아하니, 항우와 우미인의 최후를 보여 주려는 모양이네.’

수혁은 한나라 고조에게 쫓기는 초패왕 항우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해 1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정원 중앙에 세팅된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해진미가 가득하네요.”

“요리사가 와서 음식을 계속 만들고 있으니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수혁이 뷔페식으로 차려진 저녁을 보고 감탄하자 왕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미리 저녁을 먹은 악사들은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서양의 하프와 유사하게 생긴 악기도 있군요?”

“공후라는 악기인데 서양의 것보단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편리합니다. 원래는 문헌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복원되었지요.”

“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악기가 존재했던 거로 기억하거든요.”

왕첸이 설명해 주기에 앞서, 수혁은 어플을 통해 공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상태였다.

“오, 그렇습니까? 고대부터 양 나라는 서로 왕래가 잦은 거로 알고는 있었지만, 공후도 공유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도 이곳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 이사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악사들에게 양해를 구해 공후를 연주해 봐도 되겠습니까?”

“대표님께서요?”

수혁의 이야기를 들은 왕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사장님과 마을 사람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답례를 해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비록 미천한 실력이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가락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대표님께서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실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악사들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집사님.”

“네, 이사장님.”

“공후를 잠깐 빌릴 수 있는지 여쭤보세요. 강수혁 대표님께서 답례 연주를 하고 싶답니다.”

“알겠습니다.”

이용은 곧장 연주가에게 다가가 의견을 전달했고, 악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들 잠깐만 주목해 주세요. 강수혁 대표님께서 여러분들의 환대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짧은 연주를 해 주신다고 하니 다들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집사의 소개에 맞춰 수혁은 무대 위에 올랐고,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강수혁입니다. 제가 이번에 들려드릴 노래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공무도하가’라는 고대 가요입니다. 연회를 즐기시면서 편하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무도하가는 진나라 사람인 최표가 쓴 <고금주>라는 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요로, 중국의 음악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창작 연대와 관련 지역이 고조선과 깊은 연관성을 보여 우리나라의 전통 가요로 여겨지고 있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악사에게 공후를 넘겨받은 수혁은 자연스럽게 악기에 손을 올렸다. 그는 과거 고서를 번역할 때 공후에 관한 문헌 자료를 읽은 기억이 있어 지식을 갖춘 상태였고, 도구 이용 프로그램 덕에 연주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후,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겠다. 손이 너무 떨리는데?’

그동안 도구 이용 프로그램의 효용을 여러 차례 맛본 수혁이었지만 악기 연주는 워낙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자,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중국의 전통 음률과 유사한듯하나 약간은 다르군. 산뜻하고 잔잔한 게 겨울 풍경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선율 자체가 훌륭한 것도 있지만 연주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 저 정도 실력이면 우리 악단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야.”

악사들은 수혁의 연주를 들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음악을 감상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수혁은 아름다운 곡조에 맞춰 공무도하가의 가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높은 매력 수치로 인해 매혹적으로 들렸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너무 멋지다…….”

“노래 실력도 연주 실력 못지않게 대단한데?”

어두운 밤, 잔잔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수혁의 모습은 설경과 조화를 이루었고 주변에 켜진 횃불과 등이 주는 효과로 인해 환상적인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 23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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