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아름다운 연주는 5분여 남짓 동안 계속되다가 끝이 났다. 수혁은 악기에서 손을 뗀 다음 천천히 일어났다.
“즉흥적으로 연주한 거라 부족한 부분이 있었겠지만, 이렇게나마 고국의 음악을 들려 드리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혁은 가볍게 인사한 뒤에 무대에서 내려왔고, 왕첸을 비롯한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재주가 많으신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제 귀가 호강했습니다.”
“한국의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수혁은 마을 사람들의 칭찬에 공손히 반응했다.
“좋은 음악도 들어 기분도 좋은데, 연회를 계속하도록 하죠. 집사님, 요리사한테 음식을 더 만들어 달라고 하고, 집 안에 있는 술도 모두 가지고 오세요.”
“술들을 꺼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알겠습니다. 사람들을 시켜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이용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 대표님, 저는 마을에서 만둣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관희라고 합니다. 멋진 연주 감명 깊게 잘 들었습니다.”
“혹시, 저녁에 나온 만두를 대접해 주신 분이신가요?”
“하하, 맞습니다. 연회에 나온 고기만두는 모두 우리 가게에서 준비한 것들입니다.”
“맛이 기막히다고 생각했는데 사장님 댁 만두였군요.”
마을 사람들은 연주를 듣고 난 이후부턴 경계심이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였고 노골적으로 호감과 관심을 드러내는 자들도 상당수 되었다.
‘막상 보니 사람 됨됨이도 괜찮고, 믿음직해 보이는군. 젊은 사람이라 깊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참 매력적인 사람이야.’
왕첸은 수혁과 마을 주민들이 어울리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밤도 깊었는데 남은 연회는 안에서 즐기도록 하죠. 집사님, 주민들이 잘 수 있게 방들은 다 치워 놓으셨죠?”
“물론입니다. 오늘 밤새도록 마시고 쉴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뒀습니다.”
왕첸은 짧은 연회에 아쉬워할 사람들을 위해 집 전체를 주민들의 공간으로 열어 두었다.
“마을 분들이 왜 이사장님을 좋아하는지 알겠군요.”
수혁은 천막을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넓은 집에 저와 식솔들만 있으면 뭐 합니까? 가끔 이렇게라도 꽉 찰 때가 있어야 사람 사는 곳 같지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잔 더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안채에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시죠.”
수혁이 조심스럽게 독대를 요청하자 왕첸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이 매끄럽게 대답했다.
‘약간의 성의는 보여야 예의겠지?’
왕첸은 수혁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의향은 있었으나 그의 원칙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을 생각은 없었다.
* * *
“들어오시죠.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을 마시기 전에 가벼운 차 한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제안에 응했다.
“이곳은 마사토모도 오지 못한 공간인데 대표님을 여기로 데려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이렇게 단기간에 제 마음을 연 분은 대표님이 처음이시니까요.”
왕첸은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그는 가족을 포함한 최측근만 출입할 수 있는 내빈실로 수혁을 데려왔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수혁은 김정우 회장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지만, 아직 사업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탓에 조금은 초조한 상태였다.
“그동안 제 비위를 맞추느라 많이 힘드셨죠?”
왕첸은 찻잔에서 올라오는 차향을 맡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비위를 맞추다니요. 이사장님 덕분에 귀한 문화재들도 구경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귀국하실 수 있겠습니까?”
“음…… 경우에 따라선 그래야 할 수도 있겠네요.”
수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농담입니다. 멀리서 오신 손님이 빈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지요.”
“아, 네.”
‘말투가 진지해서 그런가 농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군. 아무튼, 먼저 이렇게 말씀을 꺼내주시니 이야기하기가 한결 편하겠어.’
수혁은 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부담을 크게 덜었다.
“금일 오전에 대표님의 회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시간이 짧아 자세히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셨더군요. 특히 사교육과 포털 쪽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계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운 좋게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수혁은 머리를 긁으며 겸연쩍어했다.
“가끔 절 찾아오는 사업가들 중에 어중이떠중이들도 있었는데 SH는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으면 실망하실 수도 있겠지만, 중국에서 포털 사업을 하는 건 상당히 어렵습니다. 인민들을 유해한 정보에 노출시킬 수는 없거든요.”
“안 그래도 중국에서 포털 시장을 진출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터라 괜찮습니다.”
수혁은 해외 유수의 포털 기업들도 중국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제가 볼 땐 교육 사업이 꽤나 괜찮아 보이는데, 대표님께선 어떤 분야로 진출하고 싶으십니까?”
“저도 일단은 SH에듀케이션으로 사업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다른 계열사의 경우에는 사업이 안착되면 추후 검토할 예정이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무리하시는 것보단 안전하게 가는 게 낫지요.”
왕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의견에 공감했다.
“이사장님께서는 우리 회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투자자라면 당장에 투자하고 싶은 그런 회사이지요. 게다가 대표님께서 운영하신다니 더 흥미도 가고요.”
“이사장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만약 관심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SH의 앞길만 열어 주신다면 어떤 조건이든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수혁은 왕첸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뒷방 늙은이가 대표님께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정 도움이 필요하시면 제가 잘 아는 당 간부를 하나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현재 상해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요직에 있어 사업 추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흠…….”
왕첸이 상당히 괜찮은 제안을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수혁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소개해 주는 사람이 왕첸처럼 거물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고, 다시 관계를 맺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사장님의 지인이라면 안 봐도 훌륭한 분이시겠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직접 도와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해 드리지 못한 점은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마사토모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왕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더 이상의 호의는 어렵다는 의사가 분명히 드러났다.
“공과 사의 구별이 엄격한 이사장님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의 배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사토모 회장님께서도 이사장님이 워낙 틈이 없으셔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들었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쉬워하는 지점은 이사장님이 예상하시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업적인 것 외에 아쉬운 부분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왕첸은 수혁의 말에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사실, 이사장님이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라면 제가 가진 인맥으로도 사업 파트너를 찾는 건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돌려 말하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천진에서 이사장님을 만났을 때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혁은 왕첸이 빈정 상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이토록 뛰어나신 분이 뭐 하러 여기까지 따라오셨습니까? 저에게 훈계를 할 생각이시면 이만 돌아가시죠. 밤이 늦었습니다.”
“통찰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이사장님의 신념을 존중하려고 한 겁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 의사가 왜곡된 방향으로 전달된 것 같습니다.”
“진심입니까?”
“이 상황에서 이사장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저에게 득이 될 게 뭐가 있습니까?”
“후, 계속 말씀하세요.”
자신의 호의를 평가 절하한 수혁의 언행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뒷말이 궁금했기 때문에 꾹 참고 들어 보기로 했다.
“조금 전에 진량 씨와 술을 한잔했는데…… 인품도 훌륭하고 배울 점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허허, 진량이가 술을 마실 줄도 압니까?”
왕첸은 평소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 준 진량이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에 금세 감정이 풀어졌다.
숨긴다고는 해도 아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속 깊은 대화도 나누게 되었는데 이사장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참 착한 아이입니다. 이제껏 해 준 게 많지 않았지만, 불평불만을 들어 본 적이 없었죠.”
‘표정을 보니 진량 씨가 거짓말한 것 같진 않아.’
수혁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왕첸을 보며 생각했다.
“제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울화가 쌓이면 티가 나는 법입니다.”
“그게 무슨…….”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실례인 줄은 알지만, 그동안 이사장님의 눈치를 보느라 본인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뭔가를 들은 모양이군요.”
왕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혁을 쳐다봤다.
“네, 그렇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떤 과정으로 이사장님을 뵙게 됐고, 이 집안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상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흠,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내 사람 보는 안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주제넘은 발언을 하시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이 마당에 사과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친김에 이야기를 더 하지요. 언제까지 이진량 씨, 아니 아드님을 옭아맬 작정이십니까?”
“…….”
수혁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충격을 받은 왕첸은 입을 꽉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시오. 이건 집안일입니다.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지 않는 건 불문율인 거 모르십니까?”
“자식은 부모의 그늘 밑에서 자란다고 하지만 진량 씨의 나이가 어느새 서른이 넘었습니다. 이만하면 이사장님을 위해서 충분히 헌신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 그만 놓아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비록 진량이를 내 호적에 올리지 못했지만, 난 한시도 그를 내 친자식이라고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까. 그리고 난 내 아이에게 족쇄를 채운 적이 없습니다.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화가 치밀었는지, 왕첸의 얼굴에 난 흰 수염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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