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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37화 (237/316)

237화

‘후, 내가 너무 나간 게 아닐까? 대쪽 같은 분을 이렇게 화나게 만들다니 대화를 적절히 마무리 짓지 못하면 중국 진출은 물 건너가겠어.’

수혁은 분해하는 왕첸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들었지만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아드님을 모셔가도 되겠습니까?”

“강 대표, 그건 또 무슨 헛소리요?”

왕첸은 수혁의 계속되는 발언에 힘이 빠졌는지 이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을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눴보니 서른이 넘도록 아버지와 형의 그늘 아래 있다는 사실에 우울증이 생긴 듯 보였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압니다.”

“진량 씨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언제입니까?”

“음…… 진량이는 매사에 진지했던 아이요.”

“원래 웃음이 많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변명치고는 굉장히 옹색하군요.”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왕첸은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됐든 내 아들을 이 집에서 데리고 가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 자식이라지만 장성한 아들을 이리 대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전 이진량 씨에게 SH그룹 중국 법인 총괄을 맡길 예정입니다.”

수혁은 이진량에 관해 알게 됐을 때부터 생각해 두던 바를 입에 담았다.

“바깥 경험도 적고 기업을 운영할 만한 역량이 있는지도 모르는 애를 뭘 믿고 쓰려고 하는 겁니까?”

‘말은 삐뚤게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군. 아니, 죄책감인가? 그래, 죄책감 때문에 자식을 계속 자기 옆에 두려 하고 있어.’

수혁은 35에 달하는 통찰력으로 왕첸의 심리를 한눈에 꿰뚫어 봤다.

“대화를 나눠 보니, 이사장님을 수행하면서 쌓인 경험이 적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첫째 아드님인 왕웨이 회장은 회장이 되기 위해 경험을 충분히 쌓았던가요?”

“그, 그건…….”

왕첸은 자신의 정치력으로 왕웨이를 에너지 기업 오너로 만들어 줬기 때문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량 씨도 왕웨이 씨와 같이 소중한 아들이라면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방해는 안 하시는 게 부모의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

“평생 왕씨 성도 쓰지 못한 채 본인의 삶을 살지 못한 분이십니다. 안쓰럽지 않으십니까?”

수혁의 책망하는 듯한 말에 왕첸은 불편한 감정이 들었지만, 침묵을 지킨 채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우리 아들을 사업 파트너로 선정한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 약한 부분을 건드려 원하는 것을 이득을 취하려는 행보로 보이는 건 인정하십니까?”

“제 의도가 어쨌든 이진량 씨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택은 왕첸 이사장님과 이진량 씨가 하는 거지,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책임과 부담을 저에게 전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자신의 제안이 모종의 의도가 있음을 부인하진 않았지만, 최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이들에게 있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후, 옳은 말씀입니다.”

‘드디어 마음이 좀 움직인 건가?’

왕첸이 대화 중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수혁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진량이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제 아들을 애지중지하며 키웠습니다. 본부인의 눈치 때문에 어미와 떼 놓았지만,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하고자 최대한 신경을 썼었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첫째와 비교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이 집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애정을 주셨다는 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진량 씨도 본인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그래서, 진량이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왕첸은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말씀은 허락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진량이와 이미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왕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혁을 쳐다봤다.

“술을 마시며 가볍게 언질을 하긴 했지만, SH와 함께하자는 이야기는 아직 꺼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간이 커도 이사장님의 소중한 자제분의 거취를 제 맘대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이거 제가 대표님한테 당했군요.”

“이사장님을 설득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거짓말한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아닙니다. 이제껏 저에게 대표님처럼 직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스로 귀를 닫고 고고한 척 살았지만 이제야 제 잘못이 작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가 이사장님의 부정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전 단지 그 마음을 옳은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조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화가 잘 마무리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수혁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아무리 좋은 말도 듣는 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과정 중에 다소 무례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모두 이해해 주신 이사장님의 마음에 감복했습니다.”

“허, 참. 달변가이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분은 처음이네요. 자, 이러지 말고 나가서 마을 사람들과 술이나 한잔 더 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가시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마친 이들은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가 새벽이 될 때까지 연회를 즐겼다.

* * *

다음날이 되었다.

‘동이 트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는데도 몸이 가뿐하군. 어제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마무리한 하루였어. 철옹성처럼 보이던 왕첸 이사장도 부모였던 거야. 기대했던 결과를 얻어내긴 했지만…… 약점을 이용한 것 같아 괜히 찔리는군.’

수혁은 어제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이진량입니다. 혹시 일어나셨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진량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랜만의 음주라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픈 상처에는 술이 종종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수혁은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진량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술김에 되는 대로 말을 내뱉은 것 같습니다. 어제 했던 이야기는 부디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사장님과 집사님은 제가 왕씨 집안의 비밀을 안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네? 혹시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집사님에게는 별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사장님과는 꽤나 긴 시간 동안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죠.”

“저를 주제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수혁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진량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하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고 싶습니다.”

“일단, 진량 씨가 아버지를 존경하고 곁에 있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본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답답해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왕첸의 요청에 수혁은 간밤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혹시 불쾌하시진 않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이네요.”

“저, 그런데…….”

“전 괜찮으니까 편히 말씀하시죠.”

“SH그룹의 중국 법인을 저에게 맡기신다는 건 진심이십니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던 진량은 수혁의 배려에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물론 한국에서 임원 몇몇이 파견될 예정이긴 하지만 총 책임은 진량 씨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제가 뭐라고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전 실무를 해보지도 못했는데요.”

“업무야 차츰차츰 배우면 충분히 소화하실 수 있습니다. 것보다 진량 씨는 우리와 함께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진량은 반대로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역량을 갖췄다고 말씀드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생긴 눈썰미와 그간 공부했던 것이 적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있습니다.”

에너지 기업 오너인 왕웨이를 보고 자극을 받은 진량은 틈틈이 경영학을 공부했고, 형이 집에 오는 날이면 방으로 찾아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능력은 키울 수 있지만 어지간해선 인성은 변하지 않아. 내 직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진량 씨와 왕씨 집안 가족들은 한정길 사장님이나 박유신 사장님 못지않게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야.’

수혁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인재를 영입할 때 있어 신뢰할 수 있는지를 가장 중점으로 두고 있었다.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맞다. 아버님께서 대표님을 모시고 안채에 오라고 하셨는데 깜빡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느라 왕첸의 지시를 잊고 있던 진량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천천히 하십쇼.”

화장실에 가 세안을 한 수혁은 의복을 갖춰 입은 후 진량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이사장님, 진량입니다. 대표님을 모시고 왔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안채에 도착한 진량은 왕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님도 와 계셨군요.”

“아버지가 급하게 불러서 첫 비행기를 타고 급하게 왔어.”

온후한 인상의 사내는 자상한 얼굴로 동생을 맞이했다.

“대표님,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편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왕첸은 원탁에 앉을 것을 권했다.

“저는 가서 차를 내오겠습니다.”

“차는 조금 이따 마시기로 하고 집사님도 앉으시죠. 같이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이사장께서 중대 발표라도 하실 모양이군.’

수혁은 왕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하며 착석했다.

“진량아. 앞으로 나를 부를 땐 이사장이라 호칭하지 말고 아버지라고 하거라.”

“네?”

왕첸의 말을 들은 진량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웨이 너도, 진량이를 우리 집안의 일원으로 각별히 대해 줬으면 좋겠구나.”

“아버지, 저는 진량이를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있을 땐 형, 동생으로 부르고 있기도 하고요.”

착한 성품을 가진 왕웨이는 진즉에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고 허락한 상태였다.

“집사님.”

“네, 이사장님.”

“조만간 우리 집안 호적에 진량이를 올릴 수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용은 친자식임에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진량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왕첸의 말을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간 당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진량은 몹시 기뻤지만, 한편으론 아버지에게 피해를 갈까 염려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제까진 보잘것없는 평판에만 신경 쓰느라 자식을 소홀히 대했지만……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왕첸은 아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 23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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