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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38화 (238/316)

238화

“아버지께서 그간 당에 헌신한 공이 작지 않기 때문에 벌금 부과 정도로 끝이 날 겁니다.”

왕웨이는 현실 권력과 친분이 깊은 아버지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당의 처분만 기다릴 뿐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을 생각이니 너도 잠자코 가만히 있어라.”

“네, 그렇게 할게요.”

왕첸이 당의 징계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하긴 했지만, 웨이는 집안에 피해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태연자약했다.

“진량아, 넌 이제 이진량이 아니라 왕진량이다. 앞으로 네가 어떤 일을 하건 우리 집안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거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처음으로 본인의 성씨로 불린 진량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감사하기는…… 이제껏 널 고생시킨 걸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집안을 위해 희생했던 세월을 보상해 주려면 무엇부터 해 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구나.”

왕첸은 눈물을 글썽이는 아들을 착잡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강수혁 대표님에게 진량이를 맡기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모인 거,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긴, 언젠가 말해야 하는 거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대표님,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진량이에게 SH 중국 법인의 총괄 자리를 준다는 결심은 현재도 유효합니까?”

왕웨이의 조언에 왕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에게 질문했다.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아침에 진량 씨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진량아, 넌 어떠냐?”

“전 이미 대표님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힘이 들어간 진량의 목소리에는 그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좋다. 이왕 하기로 한 거 대표님께 민폐 끼치지 말고 성심성의껏 해 보거라. 지금부터 나도 SH를 가족 사업으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네, 아버지.”

“저, 대표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들이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왕첸은 자신의 아들이 허울뿐인 직책을 맡고 이용당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하며 물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중국에 세울 법인의 총책임자인 회장직을 역임하게 되실 겁니다. 물론 회사 내부사정 파악을 도와줄 임원 한 명을 옆에 붙일 생각은 있지만, 그분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 최종 권한은 저와 아드님에게 있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존 직원들의 반발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혀요.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그룹 임직원들이 저에게 보내는 신뢰는 보통의 CEO들이 받는 것 그 이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혁은 내부 텃세로 인해 아들이 고생할까 봐 우려하는 왕첸을 보며 말했다.

“게다가 전 왕씨 집안에게 45퍼센트의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할 계획도 있습니다.”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배려가 너무 과하신 건 아닐까 싶습니다. 견실한 회사의 총책임자를 맡는 것만으로도 저에겐 과분한 처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표님께서 제 혈육을 높게 평가해 주셨다고는 하지만 이건 한쪽만 이득을 보는 불합리한 결정입니다. 지분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 두고 사업이 개시되면 다시 논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부담을 느낀 진량은 손사래를 치며 수혁을 만류했고, 왕첸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호의를 베풀 땐 제대로 베풀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먼저 제의한 입장에서 동업자의 이득을 보장해 주는 건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첫날, 대표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입견을 갖고 바라본 제 모습이 부끄럽군요……. 마음이 넉넉하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배포가 크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왕첸은 수혁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지난날에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이토록 고마워하니 저도 부족하게나마 회사가 안착할 수 있게 돕겠습니다.”

“그래, 잘 말했다. 제가 죽고 나서도 웨이가 SH를 살뜰하게 챙길 겁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없으셨어도 당연히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왕웨이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왕첸 씨가 가진 정치 인맥은 고스란히 장남인 왕웨이 씨에게 넘어가게 되어있는데 정말 잘됐어. 권력이 있는 인물들 중에 이런 인품과 신의를 갖춘 자들을 보기 어렵다. 여러모로 일이 잘 풀리는군.’

중국 시장의 특성상 아무리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보유했다고 해도 콴시의 도움이 없으면 정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혁으로선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중국인 오너가 회사 지분을 많이 갖고 있으면 외국 자본이라는 인식을 피할 수 있으므로, 시장에서 살아남기 훨씬 수월한 측면도 있었다.

“하하, 대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군요. 대표님, 법인은 언제 발족할 생각이십니까? 도와드릴 건 없나 당장 찾아봐야겠습니다.”

수혁의 통 큰 결정에 기분이 좋아진 왕첸은 SH를 지원하는 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귀국하는 데로 임원들과 상의해서 법인 설립 일정을 세운 뒤에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을까요?”

이진량은 가만히 기다리기보단 앞으로의 일에 관해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싶어 했다.

“흠, 법인 설립은 현지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주도적으로 할 거라 당분간 할 일이 없기는 한데…… 아, 아버님과 형님을 따라다니면서 사업에 도움이 되는 인맥을 소개받는 건 어떻겠습니까? 베이징대학교에서 경영학 수업을 참관하거나 개인적으로 공부해도 괜찮고요.”

“그 부분이라면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진량아.”

“네, 아버지.”

“베이징대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것도 좋지만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교수에게 경영학의 전반적 이론과 실무를 배우는 건 어떻겠느냐?”

“저야, 좋지요.”

아버지의 말에 진량은 반색을 드러냈다.

“사업에 필요한 인맥이라면 네 형에게 모두 알려 줬으니, 과외가 끝나면 형을 따라다니며 사람들과의 안면을 익히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진량이를 잘 챙기겠습니다.”

왕웨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추진력이 대단하시군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또 당부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네, 이만하면 해야 할 말은 모두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열정 넘치시는 모습들을 보니 숙소로 돌아가서 귀국 비행기를 알아봐야겠습니다.”

수혁은 한국으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대표님, 2002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러지 마시고 남은 연말은 우리 가족과 함께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가족끼리 보내야 할 시간에 눈치 없이 끼어들 수는 없지요.”

왕씨 가문은 매년 연말은 가족들과 함께 보냈는데, 왕웨이는 이 모임에 수혁을 참석시키고 싶어 했다.

“사양하지 마세요. 전 왕씨 집안의 핏줄이 아니지만 연말 모임에는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용 집사님이야, 성만 다를 뿐이지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귀한 손님도 반가운 건 하루 이틀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머무르는 건 민폐입니다.”

이용 집사까지 나서서 제안했지만 수혁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중국에 오셔서 제대로 된 관광도 못 하고 떠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 연말까지 3일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짧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대표님 몫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니, 저…….”

“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이용은 수혁이 대답을 채 하기 전에 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중국은 땅이 넓은 만큼 볼거리도 많습니다. 저희와 3박 4일 일정으로 여행이나 다녀오시죠. 어차피 사업을 같이하려면 서로 가족처럼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는데 계속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네요. 알겠습니다. 올 연말은 이사장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수혁은 못 이기는 척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진량아, 사람들에게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해라. 웨이 너도 나가서 마을 주민들을 깨우고 동생을 거들어 주어라.”

“네, 아버지.”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웨이와 진량은 밖으로 나갔다.

‘잠까지 재워 줬으면 그냥 보내도 될 텐데……. 확실히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아시는 분이야.’

수혁은 마을 주민들을 대하는 왕첸의 태도에 내심 감탄했다.

“여기서 차 한잔하시다가 천천히 나가시죠.”

“네, 오늘따라 차향이 정말 좋습니다. 사실 어제…….”

방에 남은 두 사람은 식사 전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오후, 수혁은 왕첸의 식구들과 여행을 떠났고, 융숭한 대접 아래 2002년 연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 * *

2003년 1월 2일 목요일.

수혁은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들이었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긴 했지만 큰 수확을 올렸으니 아깝지 않아.’

수혁은 왕씨네 가족들과 베이징 근교와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도 모두 풀었다.

“회장님, 접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유신의 목소리를 들은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먼저, 최필재 팀장님이 긴히 말씀드릴 게 있다며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모두 완료된 모양이군.’

수혁은 필재가 어떤 사유로 자신을 보자고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토요일에 임원 회의를 할 예정이니 그때 듣겠다고 전해 주세요.”

“독대를 원하는데 저희가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모두가 알게 될 내용인데 다 같이 들어도 문제 될 건 없지요. 아, 김유리 이사장은 잘하고 계십니까?”

수혁이 중국에 있는 동안 유리는 SH재단에서의 업무를 개시했다.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서울에 있는 보육원들과 연계해서 취약아동들을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세요.”

“인사나 홍보와 같은 업무부터 복지 사업 추진까지 워낙 잘해 주고 계셔서, 저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훗, 책임감이 강하고 워낙 꼼꼼해서 뭐든 잘할 겁니다.”

박유신 사장의 이야기에 수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임원 회의는 그룹 총회의 때 썼던 방을 그대로 쓸까요?”

“아닙니다. 이번 회의는 주요 임원들만 참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당한 회의실을 예약하면 될 것 같습니다.”

수혁이 말하는 ‘주요 임원’은 박유신 사장과 한정길 사장을 포함한 측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 2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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