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본래 WG는 일송을 의식하는 행위를 적지 않게 해 왔습니다.”
“일송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회사인데 의식하지 않는 기업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명길은 이정찬 회장의 발언에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쳤다.
“박람회 때 저희가 공개하는 제품들과 항상 겹쳤던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두 회사 모두 전자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 거 아닙니까?”
일송과 WG는 매년 선보이는 신제품의 종류가 일치할 때가 많았는데 시기마저 비슷하여 언론에선 라이벌 관계로 다루곤 했다.
“박람회에 공개할 제품은 품질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서너 개의 상품만 소개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WG는 이번에 핸드폰 한 종목만 신청했더군요.”
“깊게 생각할 것 없다. 그저 회사의 역량이 부족했기에 벌어진 일일 거다.”
이야기를 듣던 이경욱 회장은 얄미운 말투로 첨언했다.
“그동안은 에어컨, 티비 등 가전제품들을 동시에 공개한 적이 많았지만 이번 신제품은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하나만 신청하게 된 겁니다.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면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현명길 회장은 이들을 쳐다보기도 싫은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참 기대되는군요. 부디, 양 회사 모두 분발해서 국위선양에 일조합시다. 정찬아, 가자. 배도 고픈데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네, 아버지.”
이경욱은 자신을 외면하는 현명길을 비웃듯이 바라보다가 아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후, 높은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아래를 쳐다볼 줄 모른다던데…… 저 부자에게 딱 어울리는 말 같습니다.”
명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되니 경거망동하는 거지요.”
“하하, 그거 참 말이 되는군요.”
수혁의 재치 있는 말에 명길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이전에 몇 번 와봤는데 음식 맛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네, 안 그래도 시장하던 차였는데 잘됐군요. 아, 박찬명 사장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아직 식사를 못 했거든요.”
“얼른 부르시죠, 저는 주문을 하겠습니다.”
명길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잠시 후 찬명은 자리에 합류했고, 이들은 멋진 경관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 * *
호텔 라운지에서 식사를 마친 수혁은 목요일, 금요일 이틀 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발표를 준비했다. 자료를 샅샅이 읽은 후 예상 질문을 만들어 답변하는 형태로 연습했는데, 찬명은 가상의 기자가 되어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수혁아, 벌써 새벽 1시야. 이만하면 준비도 철저히 한 것 같으니까 이만 자자.”
“형 먼저 주무세요. 저는 조금 더 하다가 잘게요.”
수혁은 높은 체력 수치 덕택에 장시간 리허설을 했음에도 지친 기색이 거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 입을 의상은 생각해 봤어?”
“딱딱한 수트보단 캐주얼한 차림으로 가려고요.”
“캐주얼한 차림이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야?”
찬명은 수혁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번에 산 면바지에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스웨터를 덧입을까 해요.”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다 정장 차림으로 올 텐데 괜찮겠어?”
“간단히 입으면 발표할 때도 편하잖아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돼서 화제를 끌 수도 있고요.”
수혁은 전생의 삶에서 스마트 폰이 공개될 때 발표자가 입었던 의상을 참고하여 결정했다.
“아, 난 모르겠다. 아무튼 난 먼저 잘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
“알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후, 간만에 오르골이나 들으면서 마무리해야겠다.’
찬명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수혁은 집에서 가져온 오르골을 작동시켰다. 피로 회복 기능이 있는 오르골 음악이 집무실을 가득 메웠고, 그는 책상에 앉아 자료 검토에 매진했다.
* * *
2월 15일 토요일, 수혁은 오전에 현명길 회장과 빠른 점심을 먹은 뒤 아부다비 센터에 와 있었다.
“제 예상보다 센터가 훨씬 크군요.”
수혁은 엄청난 면적을 자랑하는 센터를 둘러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가 발표할 곳은 1층에 있었는데 다른 제품들과 혼선이 빚어지지 않게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전자제품, 바이오, 자동차 등과 같은 다양한 카테고리의 상품들을 배치하려면 이 정도 규모는 돼야지요.”
센터 방문이 처음이 아닌 현명길 회장은 센터를 둘러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회장님, 일단 접수처에 가서 카드를 받아오는 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대표님도 가는 김에 같이 발급받으시죠.”
“네, 알겠습니다.”
황정명 부회장의 제안에 일행들은 흔쾌히 응했다. 발표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출입 카드가 필요했는데, 등록을 한 기자들과 기업인들에게만 발급이 되었다.
“회장님, 전 먼저 가서 세팅도 하고 분위기를 살펴야겠습니다.”
“발표 시간은 두 시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1시 발표가 끝나고 가는 건 어떨까요?”
명길은 수혁과 센터 주변을 돌아다니며 제품들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흠, 혹시 괜찮으시면 3시나 3시 30분 이후에 같이 돌아다니는 건 어떨까요? 발표가 끝나고 컨퍼런스 룸에서 기자들과 대담 시간도 가져야 하거든요.”
발표자는 본인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컨퍼런스 룸에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제품이 큰 관심을 끌지 못했을 땐 종종 생략되곤 했는데 곳곳에서 신제품들이 소개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였다.
“사실, 제가 알고 있는 다국적 기업을 운영하는 오너들을 인사시켜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대표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건 추후로 미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나는 대로 회장님이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수혁은 명길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찬명과 함께 발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리 열심히 하는 걸 보니 기대가 되는군요.”
“그러게요. 요즘 들어 제가 안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열정이 넘쳤는데, 대표님은 제 소싯적보다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정명이 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한마디 던지자, 명길은 자신이 칭찬받은 양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후 이제 곧 발표 시간이다. 긴장하지 말고 리허설 때처럼만 하자.’
수혁의 발표는 전자제품 섹션, C룸에서 진행될 예정이었고, 지금은 무대 뒤편에 있는 대기실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까지 1분 남았습니다.”
터번을 쓴 남자 스텝은 대기실로 들어와 발표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센터에 채용된 현지인들은 아랍어가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인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대표님, 준비한 것에 절반만 하셔도 대성공이니 마음 편히 하세요.”
박유신 사장은 수혁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알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하려고요. 이런, 시간이 다 됐군요. 좀 있다가 뵙겠습니다.”
시계를 확인한 수혁은 자료들을 챙기고 빠르게 무대로 향했다.
“다음 제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 중 하나인 WG와 떠오르는 신성으로 불리는 SH에서 합작하여 만든 핸드폰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저, 잠깐만요.”
발언을 하던 사회자는 수혁을 보더니 스텝에게 손짓을 했다.
“이봐, 저 사람은 왜 통역기를 안 낀 거야?”
“발표하는 데 불편하다며 계속 거부하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기에 영어권 기자들만 있는 줄 아는 건가?”
사회자는 인상을 쓰며 황당해했다.
“기자님들과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제가 부탁드린 겁니다.”
수혁은 아랍어로 오가는 이들의 대화를 엿듣곤 해명을 했다.
“아랍어를 하실 줄 아십니까?”
“아랍어 외에도 웬만한 언어들은 할 줄 아니 믿고 진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반해 수혁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지체된 점 양해드립니다. SH의 강수혁 대표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는 수혁의 말투에 자신감이 물씬 풍기자 자연스럽게 발언을 재개했다.
“안녕하십니까? SH그룹의 대표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사회자님께서는 지금 공개할 제품이 합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핸드폰은 어디까지나 WG의 이름으로 판매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수혁은 스마트 폰을 기자들에게 보여 주며 첫 말을 뗐다.
‘예상대로 기자들이 거의 오지 않았군. 하긴 WG는 항상 세컨드 그룹이었으니 기삿거리가 되기 힘들다고 판단했을 거야.’
C룸은 족히 100여 명 이상의 기자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육안으로 봤을 때 절반도 안 찬 상태였다.
‘한국어로 발표할 줄 알았는데 영어가 제법 유창하네.’
‘SH? 오너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뭐 하는 회사지?’
주로 글로벌 기업들을 취재하는 외신기자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SH가 이번에 출시될 Z1 핸드폰과 아예 관련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회사는 이 기기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는데, 자세한 사안은 추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Z1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미리 만들어 놓은 PPT 파일을 실행시켰다.
“공업용 컴퓨터인 애니악이 처음 출시됐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 한들 주로 군사적 목적에 쓰이는 거대한 기계가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짐작을 못 했던 거지요.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는 파인즈의 헤런 웨이즈 대표님은 애니악에서 가능성을 보았고, 집마다 컴퓨터를 놓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헤런은 세계 최초로 PC를 개발에 성공한 사람으로 컴퓨터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PC 컴퓨터의 출현은 현실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존의 기기들이 수행하지 못했던 다양한 작업들이 작은 모니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가정뿐만 아니라 일터에도 컴퓨터를 도입했고 이는 업무의 형태에 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핸드폰 기종 설명하는데 뭘 이렇게 거창하게 설명하지?’
‘WG에서 PC 컴퓨터 못지않은 제품이라도 개발했다는 거야 뭐야?’
수혁의 물 흐르는 듯한 설명에도 대다수의 기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PC 컴퓨터가 전반적인 삶의 양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이번에 공개될 Z1 핸드폰도 혁명적인 제품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제 발언이 다소 과장됐다고 느끼시는 기자님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부적인 설명은 뒤로 미루고 제품 시연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수혁은 기자들을 보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은 뒤 핸드폰 화면과 스크린을 연동시켰다.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수혁은 제품 시연을 위해 Z1의 전원을 켜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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