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WG와 협업해서 큰 성과를 낸 것처럼 나중에 레일로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일로가 가진 인프라에 SH가 가진 아이템이 결합하면 엄청난 파생 효과가 발생할 테니까요.”
“하하, 언젠가 서로 힘을 합칠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수혁이 재차 관계를 맺으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아담의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조금 전에 박람회에 공개된 최고의 제품을 가리려면 투표를 해 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자 부문에서야 Z1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금관상은 너끈히 따겠지만, 플레티넘상은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담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자 수혁은 화제를 전환했다.
‘흠, 다른 기업의 신제품 중에 Z1 못지않은 상품이 있나 보네?’
수혁은 진지한 자세로 아담의 말을 경청했다.
“눈에 띄는 상품이 있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에너지 화학 부문에서 셰일 가스를 추출할 수 있는 기계가 공개되었습니다.”
아담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현명길 회장이 대화에 참여했다.
“셰일 가스는 기존의 천연가스와 다른 암반층에 저장되어 있어서 추출하기 어려웠던 자원이 아닙니까? 정말 대단한 사건이군요.”
셰일 가스는 미국, 중동, 러시아 등지에 매장되어 있는 가스 자원으로 기술력의 한계로 이제까지 채취를 못 했으나 이제는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에너지 고갈 문제가 시시각각 대두되는 상황에서 전 세계에 60년 이상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Z1의 출현에 비견될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시추 기계를 개발한 기업은 아마 MK코퍼레이션일 겁니다. 예전부터 셰일 가스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거든요.”
코리 몬조스 회장은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오늘 보니 MK코퍼레이션의 발표는 션 모리의 장남, 제이슨 모리가 맡았더군요.”
“제이슨 모리라 달갑지 않은 이름이군요.”
아담의 설명을 들은 코리는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모리 집안이야 19세기부터 유명했으니 알겠지만, 제이슨이라는 사람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구지?’
MK코퍼레이션은 19세기 초 설립되었고, 초반에는 광산업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그러다 2대 회장이었던 토마스 모리가 본격적으로 에너지 사업에 뛰어들면서 단숨에 미국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유명한 금융가인 핸더슨 집안과 함께 가장 돈이 많은 가문으로 유명했고. 세계 TOP 500 갑부를 선정할 때 중동의 왕족들과 함께 논외로 분류되는 존재였다.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도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궁금증이 일었다.
“모리가의 장남이 이 바닥에선 제법 유명한가 보네요?”
“본인들 말로는 천재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땐 탐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코리 몬조스는 제이슨에게 유감이 있어 보였다.
“아마, 여기 계신 분 중에 강수혁 대표님을 제외하면 제이슨의 연락을 한 번씩은 받아 봤을 겁니다.”
“불법적인 요소는 없어 뭐라 하긴 어렵지만, 방식이 조금 지저분한 분이시긴 하지요.”
명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담의 말에 반응했다.
“셰일 가스를 채취해서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한 건 좋은 거 아닙니까?”
“취지야 좋지만, 선례들을 봤을 때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MK코퍼레이션의 영업 방식은 어디까지나 독점입니다. 미국의 경우 반독점규제법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대놓고 행하긴 어려우나 교묘한 방식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타국과 거래를 할 땐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치권에 로비를 워낙 잘해 놨기 때문에 총기 협회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어서 함부로 건들 수도 없고요.”
“MK코퍼레이션이 로비를 잘했다고 하지만, 미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권리와 독점 행위를 비교할 수는 없지요.”
코리의 상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는 제아무리 모리 가문의 힘이 강력하다고 해도 시민의 안전에 위협이 가해질 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하는 헌법상 권리에 의해 보호되는 총기 협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쨌든 MK가 시장에 참여하면 다른 회사들이 긴장하는 건 사실이지요.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역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미국의 경제사에 대해 나름의 지식이 있는 현명길 회장이 말을 덧붙였다.
‘나도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는 엄청난 재력을 토대로 관료들과 정치인을 매수하고, 심지어 갱까지 고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어.’
수혁은 명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MK코퍼레이션은 한 번 시장을 독식하자 다른 경쟁사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경쟁 업체가 어느 정도 성장했다 싶으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라도 회사를 인수하든가 의회나 정부에 힘을 써 어떻게든 경쟁사를 견제했지만, 미디어가 발달하고 경제법이 발달한 현대에는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제이슨은 모리 가문에서도 특이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 때까지만 하더라도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요.”
“원체 축적해 놓은 부가 많다 보니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워낙 수완이 좋아 집안에서도 묵인해 준다고 들었습니다.”
코리 몬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자 아담 힐즈는 친절히 설명해 줬다.
“단순한 부잣집 아들은 아닌가 보네요.”
“열여덟에 하버드에 입학해서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MK이노베이션을 설립한 것을 보면 머리가 비상할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요.”
수혁의 물음에 아담은 대답했다.
“MK이노베이션이 뭐 하는 회사입니까?”
“돈이 되는 건 뭐든 하는 회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도유망한 회사들을 인수하기도 하고, 투자 회사마냥 타사의 주식을 사들이며 큰 이득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이슨의 주 수입원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재정이 어려운 기업의 특허들을 무작위로 사들이고 있고, 5년 전에는 거액을 주고 종자 회사도 인수해서 편하게 돈을 벌고 있죠.”
코리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쁜지 언성을 약간 높이며 말했다.
종자 회사는 씨앗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회사를 말하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MK이노베이션에 로열티를 매해 200억 이상 지불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합법적인 선 안에서 이루어진 거라면 잘못으로 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돈 많은 자가 어떤 행위를 하든 그건 자유지요. 하지만 제이슨이 등장한 이후 기업 환경이 많이 척박해지고 있습니다. 한 회사가 너무 많은 힘을 보유하다 보니 상생보다는 본인의 이득에만 치중하고 있거든요.”
“코리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WG도 MK이노베이션에 적지 않은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는데, 최근 2년 사이 로열티가 30% 이상 상승하여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후. 아무리 돈이 좋다고는 하지만,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데 제이슨 대표는 다른 회사의 입장은 거들떠보지 않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요.”
현명길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코리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능력은 있지만, 기업인들 사이에선 꽤나 얄미운 존재군요.”
“그렇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기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나 제이슨은 너무 지나칩니다. 많은 기업이 MK이노베이션으로 인해 불편함을 겪고 있지만, 더 큰 피해를 보는 곳은 개발 도상국들입니다.”
‘보아하니 제이슨에게는 적이 많겠어.’
수혁은 제이슨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오너들을 보며 생각했다.
“많은 개발 도상국은 만성적인 식량 문제를 겪고 있는데, 제이슨은 절박한 이들의 상황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습니다.”
아담은 제이슨이 식량이 다급한 저개발 국가에 의도적으로 많은 로열티를 요구하는 제이슨의 행태를 비꼬았다.
“회장님들 말씀을 들으니 저도 제이슨 대표를 한번 보고 싶네요.”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수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궁금해졌다.
“어차피 곧 있으면 저녁에 보게 될 겁니다. 식사가 끝나고 밤 8시 30분부터 시상식이 시작되거든요. 흠 지금쯤 제품에 대한 심사가 이루어지고 있겠군요.”
“벌써 다섯 시군요. 박람회도 곧 끝나겠네요.”
현명길 회장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하자 아담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기자들은 실시간으로 신제품들에 대한 평점을 매기고 있었고, 20여 명에 달하는 심사위원들도 제품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박람회 종료까지 1시간이 넘게 남았는데, 심사를 시작했을까요?”
“신제품의 수가 적지 않아서 앞서 공개된 상품들에 대한 심사는 이미 진행 중일 겁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아래로 내려가서 가볍게 커피라도 한잔하시죠.”
대화가 길어지자 코리는 뷔페식당에 미리 갈 것을 권했다. 식사는 7시부터 가능했지만, 한쪽에는 발표를 마친 기업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계속 서 있어서 피로하던 참이었습니다.”
“가시죠.”
일행들은 코리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부다비 센터 지하 1층. 식사까지 시간이 꽤 남았지만, 행사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하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수많은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고, 전면에는 시상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두어 멀리 앉은 사람들도 시상식을 구경할 수 있게 배려한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주최 측에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네요.”
“아랍에미리트 정부와 수많은 기업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요.”
“이쪽에 자리가 있네요. 여기 앉을까요?”
“그렇게 하시죠.”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수혁과 달리 일행들은 덤덤해 보였다.
“저기요.”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명길이 능숙한 제스처로 부르자 웨이터는 한걸음에 다가왔다.
“커피 4잔과 간단한 디저트를 가져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는 금세 자리를 떴고,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2003년 한 해 가장 기대되는 신제품으로 선정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수혁은 명길을 보며 질문했다.
“국제제품박람회는 1978년부터 시행됐는데, 우리나라 기업이 수상한 적은 딱 두 차례밖에 없었습니다.”
“일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3년 전에 신형 메모리 반도체로 은관상을 차지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기업이 이룬 업적 중에는 거의 최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명길은 커피를 마시며 차분하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최고의 영예인 플래티넘상을 받게 되면 보통 일이 아니겠네요.”
“하하, 강수혁 대표님께서는 전자 부문에서 1등을 할 거라고 확신하고 계시군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뿐입니다.”
아담 힐즈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농을 던지자 수혁은 손을 저으며 겸연쩍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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