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49화 (249/316)

249화

“전 이만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뵈면 좋겠네요.”

시상식 시간이 다가오자 코리와 아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담 회장과 아직 친해지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지?’

수혁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히든 퀘스트를 염두에 두고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어. 뭐, 오늘만 날이겠어?’

그는 회귀한 이래 처음으로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지만, 개의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저도 회장님들 덕분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살펴 가세요.”

“허허. 오랜만에 뵙는데, 아쉽군요. 조심히들 들어가세요.”

수혁과 명길은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전자 제품 쪽에선 Z1을 능가하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뭐, 반도체 쪽이 변수긴 하지만, 업그레이드된 반도체야 매년 출시되던 거라 이변이 있지 않은 이상 금관상은 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명길 회장과 수혁은 두꺼운 카탈로그를 읽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까는 회장님들이 계셔 말을 아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부문의 제품 중에서도 Z1을 능가하는 건 없어 보입니다.”

“셰일 가스를 추출할 수 있는 기계가 놀랍긴 하지만, 현대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에너지 문제에 대해선 자원 효율이 떨어져서 그렇지 다른 대안들도 있지 않습니까?”

명길은 수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런데, 아담 힐즈 회장님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하셨을까요? 회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수상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제이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아담도 사업 초기에 제이슨 때문에 골머리 꽤 나 썩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흠, 뒤에서 술수라도 부릴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제이슨이 이제껏 만난 경쟁자들에게 한 것처럼 음모를 꾸밀 거라는 생각이 든 수혁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초조해진 심경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아무리 제이슨 대표라도 전 세계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허튼짓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설사 플레티넘상을 수상하지 못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에 괜한 의심을 하기보단 내 길을 차분히 걸어야겠습니다.”

“하하, 옳은 말씀이십니다. 상대의 불의에 하나하나 대응하다 보면 평정심을 잃기가 쉬운 법이거든요.”

수혁의 말이 마음에 든 현명길 회장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볼 땐 사람들이 보든 말든 제이슨은 뒤에서 수작을 부릴 녀석이야. MK이노베이션에서 내놓은 상품이 Z1에 밀리는 건 사실이나 언론에서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얼마든지 포장이 가능한 걸 고려하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야.’

수혁은 명길에게 이야기한 것과 달리 제이슨에 대한 경계심을 잔뜩 끌어 올린 상태였다.

“시상식이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네, 어떻게 될지 한번 지켜보시죠.”

해외 팝스타들의 공연이 끝나자 사회자는 무대 위로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올해로 19회를 맞은 국제제품박람회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업의 관심과 참여로 인해 성황리에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인지도가 높은 분야의 제품에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자는 박람회의 취지에 맞게 상품들을 8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고, 30분 전에 심사와 투표 집계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먼저 에너지 화학 부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시상식 진행을 시작한 사회자는 각 부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 기업들을 차례대로 호명했고, 관계자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상을 받았다.

“먼저 Z1에 성원을 보내 준 기자님들과 심사 위원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는 전자 부문에서 금관상을 획득한 것은 1등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WG 이전에 대한민국의 기업인 일송전자가 은관상을 받은 지 3년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또다시 세계에 인정을 받음으로써 어려운 경제 상황에 지친 국민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수혁 대표는 역시 난 사람이야, 이렇게 되면 윗선에서 강수혁 대표와 WG 취재를 최소화하라는 지시가 무의미하게 돼 버리잖아.”

“솔직히 일송만 집중적으로 취재하라는 지시가 가당키나 하나? 난 예전부터 특정 기업을 대상으로 기획 취재하는 풍토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말조심해.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누군가 들으면 큰일 날 수도 있어.”

국내 언론사 기자들은 단상 위에 오른 수혁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뒤늦게나마 수혁과 WG에 관련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이 시키는 건 똑바로 안 하고 이럴 때만 열심히 하네. 그나저나 아주 가증스러운 녀석이야. 일송전자가 은관상을 탔다는 걸 말하면서 자기들을 위로 올린 게 틀림없어.’

질투심에 눈이 먼 이정찬 부회장은 기자들과 수혁을 번갈아 보면서 째려봤다. 한편 제이슨은 와인을 마시며 느긋하게 시상식을 구경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플레티넘상을 받을 제품을 발표할 것 같습니다.”

“하함. 시상식이 너무 지루해서 힘들었는데, 다행이네요.”

MK이노베이션은 금관상을 수상했고, 제이슨은 상을 받으러 무대 위에 올라갔지만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만을 남긴 채 바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이례적으로 짧은 수상 소감에 뜨악했지만,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금관상 정도는 당연히 딸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비록 성격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저놈 성격상 금관상 수상으로는 감흥도 없겠지. 그나저나 플레티넘상은 누가 타려나? 분위기상 Z1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왠지 MK이노베이션에서 탈 것 같아.’

제이슨을 겪어 본 적이 있는 CEO들은 그의 성격과 별도로 사업적 감각이나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금관상 수여가 끝났고, 짧은 공연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유명 팝스타의 무대를 보며 마지막 순서를 차분히 기다렸다.

“공연 잘 보셨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께서 이 순서를 기다리고 계셨을 겁니다. 우리 박람회의 최고 상인 플레티넘상을 수상할 제품이 곧 발표될 텐데요. 이 상을 받은 제품들은 이색적인 기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기록으로는…….”

사회자는 플래티넘 상을 받은 역대 제품들을 시간 순서대로 열거했고, 관련 기록들을 설명했다.

‘플레티넘상을 받은 제품이 7년 연속 전 세계 매출 1위를 차지하다니…… 상품 자체가 훌륭한 것도 있지만, 언론들이 엄청나게 홍보해 준 영향도 있을 거야.’

수혁은 사회자의 설명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2003년 국제제품박람회의 최고 영예를 차지한 제품은 바로 WG에서 출시한 Z1입니다. 모두 박수로 수상자를 맞아 주시길 바랍니다.”

Z1이 호명되는 걸 들은 수혁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무대 위로 올라갔고, 제이슨과 이경욱 회장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훗, 표정을 보니 속이 꽤 쓰린 모양이네. 이번엔 대리 수상을 하게 됐지만, 다음에는 우리 회사가 수상대에 올랐으면 좋겠군.’

트로피를 받은 수혁은 일송그룹과 MK 관계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소감 멘트를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관상을 탄 것만으로도 큰 영광인데, 박람회 최고상을 수상하게 되어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번 박람회는 쟁쟁한 상품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개선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Z1을 호평해 준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수상을 통해 WG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통하는 기업이라는 것을 증명했으며 SH도 세계 무대에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할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감을 마친 수혁은 관객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무대에서 내려왔다. 한편 제이슨은 화가 많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분명 심사 위원 중 과반수가 나에게 표를 몰아줬을 텐데?’

플레티넘상은 심사위원이 55%, 기자단 투표가 45%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기자들보다 심사 위원의 영향력이 더 세다는 이야기였다.

“존한테 연락 좀 해 봐요.”

“현재 위원석에 앉아 있어서 전화를 걸어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수행비서 중 하나가 무대 옆에 마련된 심사 위원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

“그냥 전화하라면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제이슨은 본인이 앉은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원석을 노려보고 있었고, 존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죄송하지만, 지금은 통화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입 닥치고 나가서 전화 받으세요.”

“…….”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은 존은 제이슨의 거친 말에 인적이 드문 무대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많은 걸 바랐습니까? 받은 게 있으면 돈값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죄송하지만, 전 제 역할을 다 했습니다. 심사 위원 20명 중 13명이 MK이노베이션을 찍었는데, 이 정도의 지원이면 돈값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13명이면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한 명 더 많은 수치잖아? 그럼 설마 기자단 투표에서 진 건가?’

설명을 들은 제이슨은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유럽과 북미 심사위원들이 대표님을 밀자 다른 지역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은밀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남은 7명이 Z1의 손을 들어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기자단 투표를 살펴봤는데, 80%에 달하는 기자들이 Z1을 최고 상품으로 찍었습니다.”

“존, 굳이 그런 말은 저에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혹시 궁금하실까 해서 말씀드린 것일 뿐, 어떤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이슨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존은 자신의 말이 그의 질투심을 자극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사과했다.

“설마, 우리가 WG 따위에 밀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WG의 Z1이 설사 성공한다 해도 MK그룹과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Z1이 상을 받은 건 제품이 매력적인 것도 있지만, 강수혁 대표의 프레젠테이션이 한몫했다고 그러더군요. 기자들의 질문을 모국어로 답변함으로써 큰 호감을 샀다고 들었습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고작 외국어 좀 잘한다고 그런 선택을 하다니. 정말 한심하네요.”

‘후, 다행이다.’

존은 Z1에 몰린 제이슨의 시선을 수혁으로 돌리며 한숨 돌렸다.

“저…… 대표님 자리를 오래 비워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뚜 뚜-

제이슨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25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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