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현재 재계는 WG가 거둔 성과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하, 강수혁 대표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현명길 회장은 시상식이 마무리되자마자 물밀 듯이 들어오는 축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수혁 대표님, 한국에서 최초로 플레티넘상을 수상하게 됐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국민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게 되어 무척 기쁘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명길 회장님께서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제가 다 가져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수혁과 명길은 공을 서로에게 돌리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휴, 애써 공들인 박람회가 적들의 잔치가 돼 버린 꼴이네요.”
“흠, 우리가 그동안 국내 기업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던 게 참 우습게 됐구나.”
이정찬 부회장이 기자들에 둘러싸인 수혁을 보고 한숨을 쉬자 이경욱 회장은 자조적인 코멘트를 던졌다.
“IMF 이후로는 국내에는 적수가 없지 않아서 그랬지, 우리가 안이했던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개발한 제품도 아닌데, 저리 설쳐 대는 꼴이 우습군요.”
“그게 다 현명길 회장이 허락해서 가능한 거지. 믿을 만한 정보통에게 들었는데, 강수혁 대표가 Z1 개발에 간접적으로 크게 기여했다고 하더라.”
“기여한 거면 한 거지, 간접적 기여라니 믿음이 안 가네요.”
“믿든 말든 강수혁 대표는 엄청난 인지도를 얻게 됐으니 SH의 미래도 밝다고 볼 수 있지.”
이경욱 회장은 수혁의 역량을 인정하는 눈치였지만, 이정찬 부회장은 그런 아버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봤자 중견 기업의 대표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크흠, 무슨 일이십니까?”
한창 이야기를 하던 정찬은 인터뷰를 마치고 다가오는 수혁을 발견했다.
“이경욱 회장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수혁은 경욱과 눈이 마주치자 의례적인 인사를 하러 왔다.
“축하합니다. 국내 기업 중 최초로 플레티넘상을 타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회장님, 상을 탄 기업은 SH가 아니라 WG입니다.”
이정찬 부회장은 수혁에게 덕담을 건네는 경욱의 모습에 볼멘소리를 냈다.
“허허, 부회장께서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워낙 깊다 보니 실언을 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사실을 그대로 말씀하신 건데, 이해하고 말고가 어딨겠습니까?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게 다 일송전자에서 초석을 깔아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수혁은 정찬을 무시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 양반이 이렇게 친절했나? 갑자기 왜 이러지?’
그는 평소 자신을 우습게 보던 경욱이 예를 갖추며 대하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약올라 죽겠는데, 초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아들과 동생이 수혁에게 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정찬은 수혁이 좋은 이야기를 해도 뭐든지 부정적으로 들렸다.
“기자들이 대표님을 애타게 찾는 것 같은데, 마음에 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가서 볼일 보세요.”
“부회장님, 전 지금 회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입니다. 후배로서 선배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건데, 왜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대표님, 이 부회장이 민감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아닙니다. 저를 불청객으로 생각하고 계시는데, 굳이 여기 있을 필요는 없지요. 회장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수혁은 이경욱 회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쯧쯧, 명색이 일송의 차기 회장이라고 불리는 놈이 자존심 하나 다스리지 못하다니……. 참 한심하구나.”
경욱은 아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버님께서 저놈을 애송이라고 무시하셨던 게 불과 어제 일입니다. 언제부터 그리 다정하게 구셨다고 저를 뭐라고 하십니까?”
발끈한 정찬은 경욱을 보며 대들었다.
“후, 정수도 그렇고 내가 너희들을 너무 온실에서 키운 것 같다. 넌 강수혁 대표의 발표를 듣고도 그를 철부지로 여기는 거냐?”
“Z1이 출시되면 SH도 덩달아 성장하겠지만, 우리를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WG는 이번 박람회를 기점으로 국내 1위 기업이 될 확률이 농후하다. 그리고 내가 볼 땐 SH의 잠재력이면 일송의 아성을 충분히 넘볼 수 있어.”
“평가가 엄청 후하시네요.”
“헛소리 그만하고, 귀국하면 임원들을 다 집합시켜라. 올 하반기를 목표로 새로운 신제품 개발에 바로 돌입해야겠다.”
경욱은 정찬과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대책 회의라도 하시려고요?”
“상반기는 힘들 것 같고, 하반기를 목표로 Z1과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귀국해야 하니 직원을 시켜 비행기 표도 예매해라.”
“원래라면 WG가 우리의 콘셉트를 모방하는 입장이었는데,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군요. 그건 그렇고 남은 일정은 소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가는 건 오너들에게 예의가 아닙니다.”
“지금 예의 같은 걸 운운할 때가 아니야. 그리고 너도 그렇고 네 동생들한테 강수혁 대표를 자극하지 말라고 일러라.”
“네? 그깟 놈이 뭐라고 그리 조심하십니까?”
경욱의 말에 정찬은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안목이 있다면 Z1의 출현이 전자 업계뿐만 아니라 경제 전 분야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거라는 건 알 수 있을 거다.”
“인정하긴 싫지만, Z1은 혁명적인 제품입니다. 분발하지 않으면 우린 WG의 꽁무니나 쫓아가는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정찬 부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급변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장에 적응하려면 WG보다는 SH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습니까?”
다소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던 정찬은 경욱이 SH를 지속적으로 언급하자 불편한 기색을 숨기고 진지하게 들으려 노력했다.
“WG는 우리와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회사기 때문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다. 반면에 SH는 현재 차세대 핸드폰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유일한 기업이기에 지금 당장은 굴욕적이더라도 비위를 맞춰야 한다.”
“우리 회사 내에도 유능한 인력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차라리 자체 개발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면, 타 회사에 소프트웨어를 받아 오던가요.”
정찬은 수혁으로 인해 구설에 오르내리고, 골탕을 먹은 적이 여러 차례 있었기에 SH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다.
“네 기분을 고려해서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내 말에 이리 토를 달았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경욱 회장이 노기 어린 얼굴로 노려보자 이정찬 부회장은 두 손을 모으고 언행에 주의하기 시작했다.
“네 놈의 이해력이 달리는 것 같으니 설명을 해 주마. 우리가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면 신제품 출시까지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그리고 국내 기업이 버젓이 양질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외국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될 거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찬은 조금 전과 달리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의 말에 금방 수긍했다.
“그리고, SH커뮤니케이션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해외의 그 어떤 회사도 넘보기 힘든 양질의 프로그램이다. 핸드폰 시장의 트렌드를 WG에 뺏긴 상황에서 자존심 따위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이야기다.”
“죄송합니다. 내일 한국에 도착하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긴급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경욱의 차분한 설명에 이정찬 부회장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회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만 호텔로 돌아가자. 내일 떠나려면 일찍 눈을 붙여야겠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화를 마친 경욱과 정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회장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수혁은 현명길 회장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쉬지 않고 일정을 소화한 탓에 피곤했지만, 사방에서 들어오는 축하 인사와 뿌듯한 감정으로 인해 활기가 넘쳐 보였다.
“수혁아, 아무래도 여기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지?”
“네, 신문사부터 잡지사까지 인터뷰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어 귀국은 조금 늦어질 것 같네요.”
“네 사진이랑 인터뷰가 유명 매거진 커버에 실린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방에 들어온 수혁과 박찬명 사장은 술잔을 기울이며 소박한 축하 파티를 벌였다. 이들은 업무가 끝난 터라 보통의 대학 선후배 관계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괜찮으면 저랑 함께하시죠. 제가 인터뷰하는 동안 형은 근처 관광도 하시고 하면 좋잖아요.”
“고마워, 수혁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일할게.”
“훗, 어차피 귀국하면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으시잖아요. SH에듀케이션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즐기는 마지막 휴가라고 생각하세요.”
최근 한정길 사장이 일본으로 떠난 탓에 찬명의 업무는 이전에 비해 배 이상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한정길 사장님의 반이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차피 일은 하면서 익히는 거잖아요. 닥치기 전에 미리 걱정하는 건 형답지 않네요.”
“네 말이 맞다. 해 보기도 전에 스트레스받는 것만큼 바보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
찬명은 술을 마시며 수혁의 말에 공감했다.
“내일 일어나시면 박유신 사장님께 연락해서 주식 상장 시기를 조금만 늦춰 달라고 해야겠어요.”
“특집 기사가 나올 때 상장을 하려는 거구나?”
“네. Z1이 워낙 획기적인 제품이라 좋은 결과는 예상했지만, 수상자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질 줄은 몰랐거든요.”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덕에 SH그룹은 앞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아.”
“이게 다 현명길 회장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죠. 사실, 이 인터뷰는 WG의 관계자가 하는 게 맞잖아요.”
“내 눈엔 회장님이 너에게 진 빚을 갚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정찬 부회장이 널 공격하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고맙습니다. 형 이야기를 들으니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리네요.”
찬명의 위로에 수혁은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어 낼 수 있었다.
“우리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맞다, 외국어는 언제 공부한 거야? 아까 발표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어. 네가 영어를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거 말고도 형이 모르는 능력들이 몇 개 더 남았으니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이야. 강수혁 대표님이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하하, 농담이니까 그만 하세요.”
찬명이 능청을 떨자 수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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