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아부다비 센터의 프레스 룸, 기자는 녹음기를 틀어 놓고 수혁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WG의 현명길 회장님 말씀에 의하면 강수혁 대표님께서 Z1 개발에 깊게 관여했다는데,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 주실 수 있습니까?”
“회장님께서 원체 겸손하시니까 하신 말씀이지 제가 Z1 생산에 기여한 부분은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하셨으니 굳이 답변을 드리자면…….”
국제제품박람회가 끝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수혁은 언론사들과 쉬지 않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성과의 공을 WG와 현명길 회장에게 돌리되, SH를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
“제 지인 중에 컴퓨터를 전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기계에 열광하는 게 이해는 가지만, Z1 안에 들어간 소프트웨어의 가치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전 기자님의 친구분처럼 SH가 개발한 프로그램의 가치에 대해 주목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건 귀국해서 보고를 들어 봐야 알겠지만, 여러 핸드폰 회사들이 우리와 계약을 맺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명세를 바라기보다는 가치를 알아봐 주는 고객들을 하나둘 늘려 가면 언젠간 빛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벌써부터 계약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정확한 사안은 계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유의미한 대화는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수혁은 기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슈를 자연스럽게 흘림으로써 SH가 언론사들에 의해 거론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Z1이 경제계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컴퓨터가 나왔을 때의 반응을 떠올리면 쉽게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산업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품이 나왔으니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관심을 갖는 거겠지요.”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인 샌더스 교수는 Z1을 두고 스마트폰이라 칭할 수 있는 최초의 핸드폰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 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샌더스 교수는 다양한 지식을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미래학의 대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학자였다. 그는 미래에 관한 수많은 스테디셀러를 저술했는데, 책에 나온 예측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아 세계적인 CEO들이 자문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존의 핸드폰은 뱅킹과 메일 기능만 첨부된 수준이었으나 3월에 출시되는 Z1은 휴대용 컴퓨터라고 불려도 무방한 기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매우 좋군요.”
스마트폰은 1997년에 나온 개념으로 이동 통신 기능과 더불어 휴대용 컴퓨터 기능을 장착한 기기를 통칭하는 단어이다.
“박람회 이후로 전 세계인들이 알아보는 기업인이 되셨는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누차 말하지만, 이 모든 건 WG의 현명길 회장님 덕분에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프레젠테이션을 인상 깊게 보신 기자님들과 전 세계의 고객님들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제가 아니라 SH그룹이 유명해지는 날이 오길 희망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SH를 언급한 수혁은 무사히 인터뷰를 마쳤다.
‘근처에 계신다고 했는데, 한번 연락해 봐야겠다.’
연이은 인터뷰로 허기진 수혁은 핸드폰을 꺼내 박찬명 사장과 식사하기 위해 전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남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기고만장한 꼴이 아주 우습군요. 주목도 받고, 인터뷰도 하니 스타가 된 기분이시겠어요.”
제이슨 모리는 수행원 없이 홀로 박람회장을 거닐고 있었다. 플레티넘상을 수상하는 데 실패한 그는 밤새 술만 퍼마시다가 숙소에서 막 나온 상태였다.
“스타라니요.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인데요.”
“첫걸음을 아주 거창하게 떼서 좋겠습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혼자 뭐 하시는 겁니까?”
수혁은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추레한 차림을 한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박람회도 끝났으니 전시된 모형을 빼려고요. 물론 폐기할 거지만요.”
시추 장비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기에 박람회장에 배치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에 MK이노베이션은 사람들에게 작동 원리를 보여 줄 수 있는 축소 모형을 만들었는데, 제작 비용만 수십억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경쟁에서 졌다고, 비싼 돈 들인 모형을 폐기할 필요까지 있나?’
수혁은 제이슨의 행동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수십억은 돈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떠한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MK그룹의 재력이면 모형을 폐기해도 별문제가 없겠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그날 모여 있던 사람들 재산을 다 합쳐도 우리 집안엔 안 됩니다.”
“MK코퍼레이션의 시가 총액이 700조에 달하니 틀린 말씀은 아니시네요.”
그가 회귀하기 전인 2020년에는 시가 총액이 1,000조가 넘는 기업이 존재했으나 2003년 당시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기업과 더불어 최고 수준에 달하는 시가 총액이었고. 1,000조는커녕 100조가 넘는 기업도 많이 없던 시절이었다.
“알면서도 태연한 걸 보니 우리 회사를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네요.”
“기업의 오너라면 큰 비전을 세우는 건 중요한 덕목 중 하나지요.”
수혁의 눈빛 속에서 자신감을 발견한 제이슨은 마음 안에 호승심이 일었다.
“얼빠진 소리 그만하시고, 스타 놀이나 하러 가세요. 전 바빠서 이만.”
“보아하니 관심받길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원하시면 기자들에게 제이슨 대표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동양은 겸손한 태도를 추구한다고 들었는데, 대표님을 보니 다 헛소리인 것 같군요.”
제이슨과 수혁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오가는 내용은 날이 서 있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면서 타인에겐 겸손함을 강조하는 모습에 딱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에게 밉보인 사람치고 결말이 좋은 사람을 보지 못했거든요.”
제이슨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
“그 말씀 깊게 새기겠습니다. 바쁘신 것 같은데, 이만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대표님이나 갈 길 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수혁은 짧게 대답한 후 박람회장을 빠져나갔다.
‘생각할수록 분해 죽겠네.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회사를 운영하는 주제에 기세등등한 꼴이 아주 역겨울 정도야. 어떤 식으로든 교육해서 다시는 건방을 떨지 못하게 만들어야겠어.’
제이슨은 냉정하게 돌아서서 나가는 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언젠가 부딪혀야 할 사람이면 굳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지. SH가 비록 MK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문제야.’
수혁의 얼굴은 겉으로 봤을 땐 침착해 보였지만, 마음 안은 투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혁아, 인터뷰 잘했어?”
“네. 배도 고픈데, 어디 가서 식사나 하시죠.”
센터 근처의 명소들을 구경하던 박찬명 사장은 수혁의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왔다.
“좋아. 내가 아까 봤는데, 저기에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더라고.”
“그럼, 거기로 갈까요?”
“그래,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걸어서 가자.”
수혁은 제이슨과의 만남으로 인해 생긴 불쾌함을 털어 버리고, 찬명과 식사를 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 후에도 아랍에미리트에 5일을 더 머무르며 각종 인터뷰를 소화했다.
박람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한국에 돌아온 수혁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바로 임원들을 소집했다.
“대표님. 주말 하루 정도는 쉬셔도 되는데,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용민 본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수혁을 바라봤다. 그는 SH커뮤니케이션의 본부장에서 사장으로 직함 변동이 있었다.
“스마트폰이 세상에 공개된 이 시기야말로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른 기업들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려면 휴식은 당치도 않은 소리지요.”
수혁은 스마트폰이 출시됨과 동시에 각 각의 자회사들이 준비한 어플을 공개할 계획이었다.
“주식 상장은 정확히 언제로 생각하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인터뷰들이 나가고 난 뒤에 작업에 들어가라고는 하셨지만, 투자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아서요.”
상장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박유신 사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계산을 해 보니 Z1 출시 시점과 신문과 잡지에 제 인터뷰가 실리는 시점이 겹칠 듯 보였습니다. 따라서 투자자들에게는 3월 첫 주가 지나기 전에 상장될 거라고 말씀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해당 시기에 맞춰 대비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유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아서 잘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 그리고 SH커뮤니케이션 개편 작업을 할까 합니다. 최필재 팀장님.”
“네, 대표님.”
“김용민 사장님에게만 직급 조정이 이루어져서 많이 서운하셨죠?”
“아닙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전 제 업무만 잘 수행할 수 있으면 될 뿐. 지위에는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필재 팀장은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전 스마트폰으로 인해 급변할 시장 환경에 맞춰 새로운 법인을 하나 세우려고 하는데요. SH커뮤니케이션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개편 작업이라고 말씀하신 거군요.”
회사 내 인력 분할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용민 사장은 한마디 던졌다.
“그렇습니다. Z1이 출시되면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속적인 업그레이드와 관리가 필요한데, SH커뮤니케이션의 업무를 병행하며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SH소프트라는 이름으로 법인을 설립하고자 합니다.”
수혁은 운영 체계뿐만 아니라 어플 플랫폼인 J스토어를 관리하려면 업무를 전담하는 회사가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오늘 당장 김용민 사장님과 의논해서 사무실로 쓸 건물과 인력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사무실은 3월에 완공되는 SH그룹 본사의 공간을 활용하면 되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최필재 팀장님의 공식 직함은 SH소프트의 사장입니다.”
“중책을 맡은 만큼 책임감을 갖고 일하겠습니다.”
“회사 일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선 프로그램 개발이나 계열사 간의 협업은 사장님의 재량으로 진행하셔도 되니 즐거운 마음으로 업무에 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오너보단 개발자로서의 기질이 강한 필재는 수혁의 배려에 얼굴이 환해졌다.
‘예전 같으면 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을 텐데, 많이 변했군.’
수혁은 그런 필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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