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우리 회사 인재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장학 프로그램을 기획하느라 한창 열중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
“들어오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방이 비어 있어 왠지 허전했었는데, 대표님께서 계시니까 회사가 꽉 찬 기분입니다.”
박유신 사장은 오랜만에 사무실로 출근한 수혁을 보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바쁜 관계로 업무에 소홀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 보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십니까?”
“어제 Z1이 출시됐는데,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WG관계자 분한테 들어 보니 예약 판매만 2,000만대를 넘었다고 하더군요.”
WG가 전 세계에 Z1을 출시하자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생산된 Z1은 이미 모두 팔린 상태였고 예약 주문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바람에 회사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WG전자의 시가총액은 사상 처음으로 일송전자를 제쳤고, 국내 회사로는 최초로 시가 총액 100조 원을 넘기게 되었다.
“원래 현명길 회장님께서 지분을 주시기로 하셨는데, 대표님께서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때 받으셨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셨을 겁니다.”
“WG전자의 주식으로 거부가 되면 뭘 합니까? 우리 회사가 앞으로 더 커 가는 게 중요하지요. 지분을 거부한 대가로 앱 플랫폼과 소프트웨어를 반영구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니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대표님께서 대승적인 결정을 내려 주신 덕분에 우리 회사가 이만큼 클 수 있었습니다. Z1 때문에 보고가 늦어졌네요. Z1 출시와 동시에 계열사들이 앱을 공개했습니다. 지오닷컴 앱과 메신저의 경우 폭발적인 다운 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나머지 앱은 정착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유신은 차분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대다수 고객이 컴퓨터에 익숙하기 때문에 앱으로 넘어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몇몇 앱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니 다행입니다.”
“믿을 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푸른닷컴이 앱을 개발하기 위해 착수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이용자 수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지만, 불과 이틀 만에 일일 이용자 수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등장하기 전까진 부동의 1위였으니, 조바심이 나는 거겠지요.”
“푸른닷컴은 다른 포털과 달리 우리가 참신한 서비스를 개발하면 금방 모방하여 뒤를 바짝 따라왔습니다. 아마 멀지 않는 시기에 앱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박유신 사장은 수혁이 순간적인 성과에 연연하지 않음을 알고,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모든 게 잘 풀린다고 느껴질 때가 긴장의 끈이 가장 느슨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안심하셔도 됩니다. 푸른닷컴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푸른닷컴의 수많은 충성 고객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기존에 푸른닷컴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이탈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Z1에 우리 지오닷컴 앱이 있는 것은 아시죠?”
“네, 대표님.”
유신은 수혁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경청했다. 수혁은 현명길 회장에게 스마트폰 기획안을 제공하는 대신 SH에서 개발한 앱 중 몇 개는 자동 설치가 되게끔 조건을 걸어 둔 상태였다.
“브라우저가 있긴 하지만, 스마트폰 전용 앱을 통해 뉴스나 메일을 확인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푸른닷컴의 시스템이 익숙했던 사람들도 우리 포털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요.”
“맞습니다. 제아무리 혁신적인 운영체제가 나와도 기존의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취향을 바꾸기는 어려운 법이지만, 우리는 변화의 기회를 잡은 거지요. 푸른닷컴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적어도 2달 이상이 소요될 텐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선호나 취향은 공고화된 뒤라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겁니다.”
“그것참 쌤통이네요. 교묘하게 아이디어를 베껴 악착같이 쫓아오지 않았습니까?”
수혁의 설명에 박유신 사장은 체증이 가시는 듯했다. 수많은 고정 고객을 보유한 푸른닷컴은 그동안 지오닷컴이 주도하는 트렌드를 모두 받아들여 재미를 보았는데, 이를 얄밉게 보는 SH임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전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오닷컴이 부상하기 전에 2위권을 형성하던 포털들은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모두 망하지 않았습니까? 당장의 자존심보다는 실리적인 선택을 한 푸른닷컴 CEO가 다른 회사의 오너들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볼썽사나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기업이 출현하면 저 또한 그 회사를 벤치마킹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내 자존심보단 직원들의 생계와 회사의 안위가 훨씬 중요하니까요.”
수혁은 고고하게 사는 것이 때론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오쇼핑은 요즘 어떻게 굴러가고 있습니까?”
“지오 챗, 지오닷컴, SH에듀케이션의 앱들이 폭발적으로 다운되는 것에 반해 지오쇼핑은 상대적으로 성과가 미미한 실정입니다.”
박유신 사장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룹 회의가 있을 때마다 다른 자회사들에 비해 뒤쳐처진 느낌이 들곤 했는데, 3월 들어 타 계열사들이 또 한 번 치고 나가자 의기소침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오쇼핑은 5월에 물류 창고가 완성되면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정체기가 예상보다 길어지다 보니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네요. 마음을 가다듬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격려를 받은 유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장님께 고마워하는 임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겁니다. 성공이 보장된 SH커뮤니케이션 본부장 자리를 내려두고 지오쇼핑으로 오게 됐을 때 혹자들은 영전이라며 축하했지만, 많은 분은 사장님이 고생하시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올 테니 조금만 견뎌 봅시다.”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지오쇼핑으로 왔지, 짐을 짊어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회사 성장이 더딘 게 제 역량이 부족한 것 같아서 자책감을 들었을 뿐입니다.”
“지오쇼핑이 궤도에 올라오기 전까진 이곳을 떠나지 않을 테니, 함께 힘내 봅시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유신은 수혁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자 감동했다.
“사장님, 최근 우리 회사의 인력 수급 상황은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보고드릴 참이었습니다. 사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수혁은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올해 들어 우리 그룹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고, 그에 따라 필요한 직원의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SH에듀케이션의 경우, 교육 업계에선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채용이 원활히 되고 있지만, SH커뮤니케이션과 SH소프트는 난항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제박람회 이후, SH그룹 인지도가 높아져 인력 수급은 금방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조금 의외네요. 뭐가 문제일까요?”
어지간해선 예상이 빗나간 적이 없었던 수혁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대표님께서 인사팀에게 인력 채용의 지침을 내려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 주되 우수한 인재를 뽑으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요.”
수혁은 자신이 했던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3월 들어 WG그룹에서 대규모 채용을 시작했는데,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들이 모두 WG전자에 몰리는 바람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음, Z1의 선풍적인 인기를 고려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WG전자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Z1의 성공으로 신입 사원들에게 엄청난 수준의 연봉을 제공할 수 있게 되자 인재들이 대거 WG로 몰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일송전자는 괜찮습니까?”
“WG전자와 SH가 약진했다고는 하지만, 기본 토대가 워낙 튼튼한 회사라 우리 회사만큼 곤란하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문제긴 문제네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유신은 턱에 손을 괴고 고민에 잠겨 있는 모습에 발언을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5분가량 침묵을 이어 가던 수혁은 천천히 입을 열며 정적을 깼다.
“자회사 별로 필요한 인력 수를 파악해서 저에게 보내 주세요.”
“대화가 끝나는 대로 사장님들께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이왕 하는 거 부서마다 부족한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채용이 진행 중이거나 입사가 예정된 사원들을 뺀 수치를 말하는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들께 4월이 지나가기 전에 대규모 채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조금 힘들더라도 참아 주시라고 전해 주세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박유신 사장은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한국대에서 진행할 장학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요.”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프로그램 운영안은 제가 짜고 있으니 지원 서류를 검토하고 면접을 도와줄 사람들만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수혁은 인력이 부족한 상황인 것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SH커뮤니케이션과 SH소프트에서 직원 차출이 가능한지 문의해 보겠습니다.”
“사장님들께서 힘드시지 않을까요?”
“본인들이 고민할 문제를 대표님께서 대신 해결해 주시는데, 누가 반발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애당초 사장님들께서 그럴 분들도 아니고요.”
유신은 적절한 말로 수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고맙습니다.”
“사장님들께 협조를 구해 최대한 빨리 보고서도 올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운영 계획을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수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박유신 사장은 정중히 인사한 뒤 방을 나갔고, 수혁은 컴퓨터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야, 쓸 만한 인재들이 보이면 어떻게든 우리 회사로 오게 만들어야 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혁은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냥 한번 해 보자.’
한참을 생각하던 수혁은 이경률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장님, 강수혁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장학 프로그램 관련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는데요. 제가…….”
수혁은 이경률 총장에게 여러 사안에 관해 질문했고, 장학 프로그램과 인재 채용을 연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 25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