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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61화 (261/316)

261화

“제가 이곳에 온 건 프로그램 현황을 보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대표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였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경률 총장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점심 먹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한 언론사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SH와 연계된 취업 프로그램이 한국대와 사기업의 불건전한 유착으로 보이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인터뷰를 시도하더군요.”

“언론사라…… 혹시, 만평일보였습니까?”

“대표님의 회사랑 만평일보와 사이는 대충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경률은 수혁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알려 줬다.

“흠.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첫날부터 움직인 것은 의외입니다.”

“언론사로서 가십거리를 좇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거였으면 이전에 홍보했을 때부터 취재를 했어야지요. 본인들이 대중들에게 알려 조기에 중단되면 큰 피해를 못 줄 거라 생각하고 때를 기다렸을 겁니다.”

“설마요. 아무리 언론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간악한 행동까지 할까요?”

수혁의 말을 들은 이경률 총장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직접 겪어 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염두에 뒀던 일이라 크게 상관은 없지만,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요.”

“원래는 마지막 날에 알려 드리려고 했지만, 기자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대처하시기 어려울까 봐 걸음을 했습니다.”

수혁이 인상을 구기자 경률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대책이 어느 정도 서 있는 상태라 괜찮지만, 총장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지금이야 인터뷰를 미루실 수 있지만, 언젠가는 입장을 내야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후, 솔직히 말씀드리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이상 미련도 없습니다. 학교를 위해서 할 일을 한 것뿐이니, 언론이 문제 삼고 이슈화하면 자연스럽게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입니다.”

“총장님께서 무슨 잘못이 있다고 퇴임을 하십니까? 저에게 적절한 방안이 있으니 마음 편히 지켜봐 주세요.”

이경률 총장이 한숨을 쉬며 결의를 밝히자 수혁은 손을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종합 강의동을 짓고 장학금 혜택을 학생들에게 넘겨줄 수 있으면 이것으로 충분하지요.”

“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가 사재 출연을 한 기업인이 대표님을 제외해도 두 세분밖에 안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대표님께서 통 큰 제의를 하셨고, 임기가 얼마 안 남은 거 내 명예보다는 학교를 위해서 희생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SH가 피해가 가지 않게 모든 멍에는 제가 짊어질 테니까요.”

이경률 총장은 언론에서 한국대와 SH와의 관계를 공격할 거란 걸 애당초 알고 있었다.

“훗. 저에게 총장님의 명예도 지키고, SH도 상생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마음 편히 평소처럼 생활하셔도 무방합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니 믿음이 갑니다. 저는 무조건 대표님 편이니 필요하신 사안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이후, 수혁과 경률은 장학 프로그램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총장님께서 이렇게 큰 결심을 하셨을 줄은 몰랐어. 누가 만평일보를 움직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수혁은 면접장으로 돌아가며 대처 방안을 고민했다.

* * *

“야, 이번만큼은 틀림없는 거지? 이전에 네놈 말만 믿고 일을 진행했다가 큰코다친 후로 믿음이 가야 말이지.”

“물론이지, 형이 저번에 잘만 했어도 이렇게 귀찮은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을 거야.”

한남동의 70평짜리 빌라에서 중년의 남성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만평일보 부사장이었던 장형욱과 일송유통의 회장 이정수였다.

“말 다 했어? 누구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근신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미안해, 하지만 한국대와 SH가 보란 듯이 유착 관계를 맺었다는 보고를 듣고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더라고.”

“회장님께서 당분간 SH를 건들지 말라고 엄포하셨다는데, 감당할 자신은 있어?”

“아버지가 강수혁이 좋아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 줄 알아? 지금 그놈이 승천하는 기세니까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거야.”

이정수 회장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건수를 잡은 만큼 이경욱 회장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후, 내가 아는 기자들 연락해서 작업에 들어가라고 지시는 했지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근신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형욱은 초조한지 다리를 덜덜 떨면서 말했다.

“어차피 잃을 것도 더 없잖아? 나야말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형보다 더 암울해질 거야.”

“하긴, 일송유통이 잘나가서 가만히만 있어도 후계자 구도에 유리할 텐데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이유가 뭐냐?”

일송유통은 전국 주요 도시 터미널에 백화점을 론칭하고 공격적으로 대형 마트를 건립하여 시장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높인 상태였다. 비록 정석호 회장이 이끄는 제일물류에는 근소한 차이로 매출이 밀렸지만, 지금과 같은 성장세라면 유통업계에서 1위를 거머쥐는 건 시간문제였다.

“매스컴에서 하도 호들갑을 떠니까 볼 수가 있어야지.”

“강수혁 대표를 말하는 거구나.”

형욱은 사촌 동생인 이정수 회장이 수혁에게 강한 원한을 갖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쳇, 그딴 풋내기가 뭐라고 특집 기사까지 내가며 난리들을 치는지……. 만평일보도 최근엔 SH를 심심치 않게 다루던데, 어떻게 된 거야?”

“야, 우리 회사가 아무리 국내 제일의 언론사여도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이슈를 선점해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신문 안 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어. 그 새끼 낯짝만 보면 욕지기가 올라와서 말이지.”

이정수 회장은 수혁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훗. 내가 늦어도 2주 후에는 신문 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너 오기 전에 배 기자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이경률 총장이 의도적으로 인터뷰를 피했다고 들었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겠지.”

“이미 스토리는 충분해. 통상적으로 기업들이 대학에서 여는 취업 설명회는 시기를 맞춰 동시에 여는데, 이번 경우는 아주 이례적이야.”

형욱의 머릿속에는 SH를 무너뜨릴 시나리오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장학금은 미끼고, 한국대의 인재들을 싹 쓸어 갈 속셈이겠지. 그건 그렇고, 이경률 총장은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일송에서 잘 좀 봐 달라고 해도 그렇게 무시하던 사람인데 말이야.”

“명학이 사건을 잘 처리해 줘서 그런 거 아니겠어? 고지식한 양반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네. 어쨌든 술이나 한잔하자.”

“좋아, 이 일만 잘 처리하면 일송유통의 모든 광고는 형이 따낸 거로 이야기해 줄게.”

“오. 내 동생이지만, 참 화끈하단 말이야?”

형욱은 이정수 회장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해내기만 하면 이것보다 더 잘해 줄 테니까, 서운하다고 그만 좀 해.”

“오케이, 알겠어.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나 하자.”

일송유통 안에는 제법 많은 자회사가 있기에 모든 광고를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면 만평일보로 돌아갈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희망이 생긴 형욱은 장식장에서 가장 비싼 양주를 꺼낸 뒤 모처럼 기분을 냈고, 이정수 회장도 이에 화답하듯 술잔을 부딪치며 밤새 술을 기울였다.

채용 과정과 장학 프로그램이 시행된 지 3일 차가 되었다. 수혁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마지막 날을 맞아 부지런히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지원자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최필재 사장은 수혁을 보며 감탄했지만, 왠지 모르게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다들 쉬지 않고 잘 따라와 주신 덕분입니다. 비록 과정이 간소하여 불안하실 수도 있지만, 같이 일하시다 보면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오후 3시가 안 된 시각. 수혁은 모든 면접을 끝마쳤고, 회사에 필요한 인력들을 모두 충원했다. 물론, 급격한 성장세를 고려한 채용은 아니었기에 추가 채용은 불가피했지만, 수혁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3일의 시간 동안 수백 명에 달하는 신입 사원을 뽑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따로 시간을 내어 대표님께서 체크한 학생들의 명단을 일부 검토했는데, 짧은 시간에 최고의 인재를 선별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표님의 빠른 결정에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제가 마음속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모두 포함된 것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함께 면접을 진행한 임원들은 모든 의심이 거둬진 상태였다.

“장학 프로그램은 진행 상황이 어떻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학생이 기준을 통과했지만, 다행히도 예산을 초과하진 않았습니다.”

장학 프로그램을 총괄한 이현수 팀장은 수혁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남은 예산은 SH재단에 보내서 따로 관리하라고 하세요.”

“저, 4학년들이야 이번 1년으로 끝나지만 다른 학생들은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 뽑힌 학생들에 한해서 졸업할 때까지 지원해 주세요. 물론, 전부 내 사비로 말이죠.”

수혁은 막대한 추가 지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보아하니 정리도 다 끝난 것 같군요. 3일간 고생하셨으니 회사로 돌아가지 마시고, 이만 퇴근들 하세요.”

대기실에 있는 의자들과 면접실의 테이블만 제 자리로 돌려놓으면 됐기에 뒷정리는 진즉에 끝난 상태였다.

“대표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퇴근을 위해 부산을 떠는 다른 임직원들과 달리 최필재 사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귓속말을 했다.

“방으로 가서 대화하시죠.”

수혁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하고 필재를 방으로 데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박유신 사장님이 연락이 왔는데, 청와대에서 대표님을 찾으신답니다.”

“흠, 무슨 일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SH가 한국대에서 단독으로 채용을 진행한 것이 문제가 됐을 것 같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통상적인 취업 설명회는 회사를 소개하는 수준에서 끝나는데, 우리의 경우 채용과 연결되는 최종 면접까지 진행된 터라 한국대에서 특혜를 준 모양새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푹 쉬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여론이 심상치 않은데 왜 저렇게 무사태평이신 거야?’

필재는 무사태평한 수혁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대표님, 쉬는 거야 나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이런, 사장님께서 오해를 하신 모양이네요. 전 이미 어떻게 대처할지 방안이 다 세워져 있습니다. 3일 동안 면접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수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필재를 바라봤다.

- 26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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