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프로그램 첫날, 이경률 총장과 대화를 갖은 수혁은 곧바로 대책을 세우고 만평일보의 파상 공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총장님, 접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날 저녁, 첫 면접을 마친 수혁은 곧바로 이경률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국립대 총장님들과 연락은 자주 하십니까?”
“물론이죠. 교육부 산하의 대학 총장들은 한국연이라는 협회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6개월마다 있는 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한국연은 한국 국립대 연합의 줄임말로 특별한 의미는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광주, 부산, 대구, 대전에 있는 국립대 총장님들 연락처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알려 드릴 수야 있지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취업 기회를 한국대 학생들에게만 주는 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취지가 좋으니 총장님들도 금방 호응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그냥 하시는 것보단, 제가 먼저 언질을 주고 연락을 하시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수혁은 총장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총장님들께 문자를 돌려, 내일부터라도 자연스럽게 연락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따로 또 궁금한 사안은 없으십니까?”
이경률 총장이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자 수혁은 되려 그가 어떤 심정인지 궁금해졌다.
“이 모든 게 오후에 말씀하셨던 것의 일환이시지 않습니까? 알아서 잘하고 계시는데, 구태여 물어봐서 귀찮게 할 필요는 없지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혁은 언론사의 공격에 대한 안배로 지방거점 국립대에도 채용을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대 학생들만 선별적으로 채용하면 문제가 되지만, 전국으로 혜택을 확대하면 논란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 내일 바로 연락해 봐야겠다.’
이경률 총장의 문자를 받은 수혁은 다음 날이 되자 총장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그는 나름의 대비를 해 놓았기에 최필재 사장처럼 큰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대표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필재는 수혁이 말이 없자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 아닙니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느라요. 잠깐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아니, 이건…….”
“첫 회의 때, 지방 국립대학에서도 채용을 진행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건 제가 틈틈이 작성한 채용 문건이니까 책임지시고 계열사들에 공문을 보내 주세요.”
수혁은 밤잠을 줄이며 만든 기획안을 필재에게 건넸다.
“면접을 보느라 바쁘셨을 텐데, 이걸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그냥 집에서 가볍게 만든 것일 뿐입니다.”
“가볍게 작성하신 거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 퇴근하지 않고 회사에 돌아가 사장님들께 메일을 보내야겠습니다.”
최필재 사장은 서류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기획안에는 국립대에서의 인재 채용에 관한 상세한 매뉴얼이 적혀 있었고, 성장세에 따른 채용 규모를 어떻게 산정해야 하는지 서술되어 있었다.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쉬시고 내일 보내셔도 됩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지요.”
“흠, 그런데 왜 제가 아니라 박유신 사장에게 연락했을까요? 궁금한 게 있다면 저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텐데 말이죠.”
위이잉-위이잉
“이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수혁은 품속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강수혁 대표님, 접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사장님은 먼저 들어가세요.”
대통령인 것을 알아챈 수혁은 필재에게 손짓을 하며 보냈다.
“만평일보에서 금일 오후부터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살펴보셨습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고, 임원에게 보고를 막 받은 참입니다.”
“제가 대표님을 미래 비전 연구소 고문을 맡겼을 때는 이경욱 회장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정협 대통령은 수혁이 뒤에서 비리를 저지르는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했었던 터라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물씬 묻어 나오고 있었다.
“뜻밖의 소식에 당황하신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으면 충분히 납득이 가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말씀해 보세요.”
“저 개인적으로 찾아봬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언제 일정이 괜찮으십니까?”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표님을 뵙기에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돼서요.”
수혁의 제안에 정협은 난색을 표했다.
“미래 비전 연구소의 고문으로서 찾아뵙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보고드려야 할 사안도 있거든요.”
“휴, 알겠습니다. 밤 10시에 뵙기로 하죠.”
“저야 괜찮지만, 대통령님께서 피곤하시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너무나 늦은 시각에 약속을 잡자 수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취임한 이래로 새벽 2시 이전에 잠든 적이 없어 익숙해졌습니다. 9시 30분쯤에 지정된 장소로 사람을 보낼 테니 차를 타고 들어오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누구한테도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수혁은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늦은 밤, 한 대의 차량이 청와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부족하게나마 준비는 했지만, 충분한지 모르겠네. 하, 모르겠다. 그냥 미리 예단하지 말고, 직접 뵌 후에 판단하자.’
수혁은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차가 정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문님, 도착했습니다. 이만 내리시죠.”
“알겠습니다.”
청와대 직원은 차를 주차한 뒤 내릴 것을 권했다. 그는 수혁을 대표가 아니라 미래 비전 연구소 고문으로 대하고 있었다.
“비서관님, 늦은 시각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늦은 시간에 손님이 방문하는 경우가 흔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당직이라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마중 나온 비서관은 수혁이 처음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자였다.
“대통령님은 어디 계십니까?”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비서관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고, 수혁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방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방이 화려하잖아?’
방을 둘러보던 수혁은 안경을 쓰고 집무를 보고 있는 정협을 발견했다.
“대통령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셨군요. 자, 여기로 앉으세요.”
김정협 대통령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전에 뵙던 곳에 비하면 분위기가 아늑한 것 같습니다.”
“하하, 이곳은 저와 제 가족들이 지내는 방입니다. 지금 제 부인은 침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요.”
“어쩐지 너무 안쪽으로 들어간다 싶었는데, 대통령님이 지내시는 처소였군요.”
수혁은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놀란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늦어서 이곳 말고는 편히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게 여의치 않았습니다. 물론, 다른 방도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직원들이 고생을 하거든요.”
“대통령님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다들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나 한잔 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경률 총장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교육부 장관 말로는 모든 건 자기 책임이라며 강수혁 대표님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들었습니다.”
“교육부에서 벌써 움직인 겁니까?”
정협의 말에 수혁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훗, 꽤 각별한 사이신 모양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언론에서 관심을 가진 이상 형식적으로나마 액션을 취해야 해서 연락을 한 것일 뿐. 아직 정해진 것은 없으니까요.”
“2주 전에 상을 받을 일이 있어 이경률 총장님과 잠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총장실에서 수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국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동문으로서 도움을 드릴 일은 없나 논의를 한 것이 전부입니다.”
“후. 도움만 드리면 됐을 텐데, 왜 채용까지 진행한 겁니까? 이걸 좀 보시죠.”
김정협 대통령은 만평일보와 성동일보에서 작성한 기사들을 보여줬다.
“한국대와 SH의 수상한 동행이라…… 우습지도 않은 타이틀이네요.”
수혁은 요란스러운 기사 제목에 냉소를 지었다.
“저도 대표님의 진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여론이 점점 악화되는 상황이라 걱정이 드는군요. 마지막 부분을 한번 보세요.”
“흠,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대통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사 말미에는 청와대에서 수혁을 미래 비전 연구소의 고문으로 발탁한 배경을 서술하며 대통령과 SH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었다. 만평일보의 배석현 기자는 SH와 이경률 총장과의 은밀한 거래가 권력자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논지의 기사를 작성했다.
“배석현 기자는 이전에도 저와 SH를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만평일보에서 거짓 기사에 대한 사과 성명을 내서 그냥 넘어갔는데,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겠군요.”
예상보다 강한 공격 수위에 감정이 상한 수혁은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저희도 조만간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를 해야 해서요.”
“국민에게 진실이 뭔지 알려 드려야지요. 최근에 여론이 좋았던 거로 아는데, 여의치 않게 찬물을 끼얹었네요.”
Z1 출시 이후 국내 경제 지표는 상승 국면에 접어든 상태였고, 김정협 대통령의 지지율도 덩달아 오르고 있었던 터라 수혁은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지지율이야 올랐다가도 금방 내려갈 수 있는 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직접 발탁한 강수혁 고문님께서 구설에 오르시면 국민과의 신뢰가 무너지는 게 두려울 따름이지요.”
“대통령님을 뵙기 전에 따로 준비한 게 있는데, 이걸 보시면 저들의 비판이 과장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수혁은 서류 가방을 연 뒤 문서들을 몇 장 꺼냈다.
“흥미롭군요. 문서를 보니 오늘 오후에 급하게 준비하신 것 같은데…….”
“회사 직원들과는 이전부터 논의했던 사안이고, 총장님들과도 구두로 어느 정도 확답을 받아 놓은 상태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서신을 보내 달라고 급하게 부탁했습니다.”
문서에는 SH그룹과 지방거점 국립대 간의 협약 과정이 간략히 서술되어 있었고, 총장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거라면 여론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들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만평일보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들은 진실 앞에서도 상대를 흠집 내기에만 바빴습니다.”
“대표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 의견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김정협 대통령은 미간에 주름이 진 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26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