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66화 (266/316)

266화

“한국 유통 협회에서 우리를 지지한다는 성명 발언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인 지지 내용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생각을 정리해서 곧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정석호 회장이 이 정도로 호의를 베풀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성명서에 들어갈 내용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잘해 보겠습니다. 회장님들과 머리를 맞대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겁니다.”

“회원들이 순순히 따라 줄까요?”

정석호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확신이 없던 수혁은 의구심을 표했다.

“이정수 회장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회원들은 대표님께 우호적입니다. 게다가 이병섭 회장님도 우군으로 계시니 수월하게 진행되리라 예상됩니다.”

“회장님 말씀처럼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일전에 협회 모임에서 수혁이 오너들에게 온라인 마트 사업안을 넘긴 후로 업계 내 여론은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과거에는 일송유통의 이정수 회장이 힘의 논리로 여론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정석호 회장을 중심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쪽은 저에게 맡기시고, 말씀드린 대로 다른 쪽을 더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용건을 마친 수혁은 이후 가벼운 대화를 잠깐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다음은 현명길 회장님에게 연락을 드려 봐야겠다.’

보통 때라면 도움을 청하는 걸 싫어했을 수혁이지만, 석호와의 통화 이후에는 망설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이틀이 지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성은 진지한 얼굴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사돈어른, 정수에게 당분간 형욱이를 만나지 말라고 말씀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휴,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신제품 반응이 좋지 않아 회사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가족을 챙기는 걸 소홀히 했습니다.”

종로에 있는 만평일보 사옥, 장동주 대표는 이경욱 회장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후,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경황이 없다는 거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수로 인해 회사가 이미 곤욕을 겪었던 터라 조심스러운 입장이라서…….”

“저희로서는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정수를 따로 불러 따끔하게 혼을 내겠습니다. 것보다 지오닷컴에서 만평일보의 기사를 완전히 배제했다고 들었는데, 대처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이경욱 회장은 궁금하여 물었다.

“일단은 강수혁 대표랑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최대한 마찰 없이 사안을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이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하시겠지만, 강 대표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최근에 대통령께서도 그자를 총애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셨거든요.”

장동주 대표가 전면전은 피하고 싶다는 의견을 비치자 이경욱 회장도 이에 동의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냐며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동주는 이전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욱에게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이거 큰 문제입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사돈을 돕고 싶지만,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은 듯 보입니다. 소송을 진행할 생각이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일송그룹 고문 중에 법조계 인사가 제법 돼서 그 부분은 확실하게 지원해 줄 수 있습니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혹시, 피해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경욱 회장은 빠르면 하반기, 늦으면 내년 초에 스마트폰을 출시할 예정이었기에 수혁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SH소프트에서 제공하는 자이로스가 스마트폰을 작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소프트웨어였기 때문이다.

“매출 면에서 유의미한 감소는 없었지만, 길게 끌수록 저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리라 보입니다. Z1이 출시된 이후, 지오닷컴의 영향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거든요.”

“흠, 일전에 PC 컴퓨터로 뉴스를 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상황인 것 같긴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터넷 신문이 한창 인기를 끌었을 때도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장년층과 노년층은 종이신문이나 잡지를 더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Z1을 가진 사람이라면 손가락으로 세상 모든 소식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신문을 보는 고객의 수가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장동주 대표는 뉴스 매체의 흐름이 종이 신문에서 스마트폰을 통한 인터넷 신문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격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최고의 회사라도 금방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저 또한 일송그룹의 체질 변화에 힘쓰고 있으니 대표님께서도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앞으로 나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거 괜한 소리로 심려를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그런 걸 신경 쓰십니까? 정수는 제가 단단히 이야기해 놓을 테니 염려 붙들어 매세요. 아, 사과의 표시로 만평일보에 광고를 몇 개 넣어 드릴 테니 노여움을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이렇게 도움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편안한 밤 되세요.”

‘이런 젠장. 광고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곳이 수두룩한데, 고작 광고 한두 개 넣어 주고 생색이나 내다니! 그깟, 법조인들 내 주변에도 세고 셌는데, 어디서 그따위 것을 지원이라고 들이미는 거야!’

경욱과 대화를 마친 장동주 대표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을 땅바닥에 있는 힘껏 던져 버렸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집무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욱이는 아직 입니까!?”

“안 그래도 지금 옆방에서 대기하고 계십니다. 지금 들어오라고 할까요?”

“도착했으면 바로 들어올 일이지,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당장 오라고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대표님.”

동주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고, 비서는 혼비백산하여 형욱을 데리러 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이날, 오후 급하게 연락을 받은 장형욱은 만사를 제쳐 두고 만평일보 사옥에 와 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집에서 근신하라고 하지 않았냐?”

“죄송합니다, 정수가 이번만큼은 강수혁 그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며 장담하는 바람에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훗, 한 방 먹인다고? 네놈이 강 대표의 적수나 될 듯싶냐?”

아버지가 자신을 무시하자 자존심이 강한 형욱은 마음 안에 반항심이 올라왔다.

“세상 어느 아들이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습니까?”

“말하는 걸 보니, 근신하면서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작년에 국민께 사과 메시지를 보낸 것이 네가 볼 땐 강수혁에게 고개를 숙인 것처럼 보였냐?”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그러실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평일보가 대중 앞에서 사과한 건 창립한 이래로 처음이었잖아요…….”

형욱은 강하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장동주 대표가 폐부를 찌를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고개를 숙이는 게 뭐가 대수겠냐? 회사의 오너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무릎이라도 꿇을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우리가 왜 무릎을 꿇어요.”

형욱은 아버지의 언행에 깜짝 놀랐다. 장동주 대표는 평생을 윗물에서 놀던 사람으로 이경욱 회장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승철 대통령 때도 약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으셨어. 강수혁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 거지?’

10년 전, 만평일보는 청와대에 밉보인 적이 있었고, 대통령은 장동주 대표를 길들이려고 했다. 초반에는 세무 조사와 임원들이 검찰에 소환되는 등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론은 만평일보에 유리하게 형성됐고, 결국 임기 말기에는 역풍을 맞아 역대 가장 낮은 지지율로 불명예 퇴진한 바가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하는 말이다. 네 놈이 싸놓은 똥을 수습하려고, 이틀 동안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SH가 요즘 잘나가는 건 맞지만, 우리의 적수는 아닙니다. 일을 저지른 입장에서 이런 말씀드리는 게 부끄럽지만, 저한테 일을 맡겨 주세요. 한 달 안으로 백기를 들게 만들겠습니다.”

“네가?”

장동주 대표는 형욱을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바라보며 반문했다.

“사실관계가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사과를 한 뒤에 언론사를 탄압하려 했다는 프레임을 씌우면 어떨까요?”

“그게 다냐?”

“그게 다라니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사인 만평일보가 일개 기업으로부터 망신을 당했는데, 다른 언론사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밑밥을 깔아 주면 알아서 따라올 겁니다.”

“휴, 나도 네 말처럼 만사가 쉽게 풀렸으면 좋겠구나…….”

동주는 화낼 힘도 없는지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하긴, 회사에 없었으니 모를 만도 하지. 네가 말한 방법들 다 누가 알려 준 거냐?”

“그야, 아버지가 알려 주신 거죠.”

형욱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틀 전에 사주들한테 전화를 돌렸지만, 시원스러운 답변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태도들이 변했을까요?”

동주의 말에 형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강수혁 대표와 친분이 있는 오너들이 광고 계약을 미끼로 사주들을 흔들고 있더구나.”

“그 어린놈이 기업 회장들을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리고 공중파 방송을 제외하면 광고 효과가 제일 좋은 회사가 만평일보인데, 오너들이 생각이 있으면 애송이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겁니다.”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이야기했지만, 형욱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제일그룹과 WG그룹에서 광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놈들은 어차피 SH와 한배를 탄 놈들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어차피 돈은 들어왔으니 별 타격은 없지 않습니까?”

형욱은 국내 10대 기업 중 두 군데가 수혁의 편을 들고 나서자 충격을 받았지만, 의연한 척하며 아버지를 위로했다.

“하, 우리를 등진 기업이 그들뿐이라면 네 말이 맞겠지.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장동주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그 말씀은 우리랑 척을 진 회사가 더 있다는 말씀이세요?”

“우리와 광고 계약을 맺은 회사 중 절반 이상이 계약을 해지하거나 연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니, 갑자기 다들 왜 이러는 겁니까?”

형욱은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 26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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