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정석호 회장을 중심으로 유통 회사들이 강수혁을 지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장동주 대표는 눈이 휘둥그레진 아들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유통 쪽은 정수가 꽉 잡고 있지 않나요?”
“정수에게 이야기를 못 들었냐? 일송유통은 전국에 백화점과 마트를 건립하느라 주변을 챙기지 못한 탓에 명망을 잃은 지 오래다.”
“시장을 독점하려는 건 SH도 마찬가지인데, 다들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구는지 모르겠네요.”
장형욱은 오너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년에 강 대표에 대해서 본인의 이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몰아 놓고, 정작 자신은 뒤에서 공격적인 경영을 하니. 뻔뻔하다고 느꼈을 거다.”
“저, 광고 가격을 적당히 줄여 주고 대기업 중견 기업 가리지 않고 영업을 해 보면 어떨까요? 상대가 매섭게 몰아치는데, 뭐라도 해서 피해는 줄여야죠.”
“이제야 쓸 만한 생각을 좀 하는구나. 하지만 그것도 잘 안될 것 같다.”
“그럴 리가요. 신문 지면에 광고를 넣고 싶어도 대기업에 밀려 아쉬워하던 중견 기업들이 엄청 많았잖아요.”
“믿을 만한 정보통한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기업들 사이에서 SH의 평판이 워낙 좋아 우리랑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
장동주 대표는 답답한지 컵에 따라 놓은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강수혁이 재계에 발을 들인지 얼마나 됐다고, 그 녀석 편을 드는 겁니까?”
“앱이라고 들어 본 적 있냐?”
“대충 알고는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해 본 적이 있냐?”
“네, 저번 주에 구매해서 쓰고 있습니다…….”
형욱은 WG가 만평일보와 관계를 끊은 상황에서 스마트폰을 구매했다는 사실이 민망한지 말끝이 흐려졌다.
“나도 지금 Z1을 쓰고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스마트폰을 쓴 지 2주 정도 됐는데, 참 놀라운 점이 참 많더구나.”
“저도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WG가 비록 일송 다음으로 전자 기기를 잘 만든다고는 하지만, 상당한 차이로 밀리고 있었는데. 이런 혁신적인 제품을 발명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네 말이 맞다. 스마트폰은 과거 컴퓨터 출현에 버금갈 만한 엄청난 제품이지.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스마트폰에 들어간 모든 콘셉트가 강수혁 대표가 제공해 준 거라고 들었다. 방금 내가 언급한 앱도 강 대표가 고안한 개념일 거야.”
장동주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의견에 공감했다.
“그런데, 앱은 왜 거론하신 겁니까?”
“SH소프트에서 J스토어라는 앱 플랫폼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강수혁 대표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했던 말이다.”
“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네요. 치사한 녀석,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회사도 강수혁 대표를 함부로 못 건드는 거였어요.”
“그런 목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힘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산 건 아닌 거로 보였다.”
“그럼요?”
“SH소프트에서 기업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영업에 도움이 될 만한 앱을 싼 가격에 팔고 있다고 들었어.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기업들이 앱을 통해서 매출이 증대하자 이제는 먼저 앱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지경이야. 게다가 변하는 시장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함으로써 국가 경쟁력마저 높아지는 바람에 정치권에서도 강수혁 대표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이다.”
“총체적 난국이네요.”
형욱은 눈을 질끈 감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다. 우리와 친분이 깊은 성동일보와 주변 언론사들도 우리를 등 돌릴 조짐이 보이고 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랑은 그동안 가족처럼 지냈던 회사들이잖아요!”
형욱은 마지막 보루였던 동종 업계 회사들마저 냉담한 보이고 있다는 동주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저들이 의도적으로 경쟁사들에 광고를 몰아 주고 있는 모양이야. 후, 돈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옛 어른들 말씀 중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구나…….”
장동주 대표는 처참한 상황에 놓인 만평일보를 떠올리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회사들인데,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조금 있다가 대표님들에게 연락을 돌려볼게요.”
“됐다. 이 이상 아쉬운 소리를 해 봤자 우리의 체면만 깎일 뿐이야.”
“지금 이 판국에 체면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야죠.”
형욱은 이처럼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봤기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고 있었다.
“사돈도 별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냐?”
“……일송그룹도 강 대표를 어찌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일송과 우리를 중심으로 흘러가던 힘의 헤게모니가 WG와 SH로 넘어가고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소송에 들어가서 손해 배상액을 타내는 건데…….”
수혁이 비록 화를 낼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사를 압박하는 행위는 헌법 재판소에서나 일반 법원에서 패소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거액의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소송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지만, 장동주 대표는 뭔가 탐탁지 않은 눈초리였다.
“아버지, 뭘 망설이세요? 마땅한 카드가 없다면 당장 고소를 해서 돈이라도 받아 내야 할 거 아닙니까?”
“최고의 위치에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미끄러지는 건 순식간이다. 소송은 조금 더 지켜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동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만평일보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어렵게 얻어 낸 만큼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릴까 무척 두려웠다.
“후, 저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찾아볼게요.”
“집안을 생각하는 너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자중했으면 좋겠구나. 강수혁 대표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더 건드렸다가는 극악한 수로 우리를 끝장낼 수도 있을 거다.”
보통 때라면 형욱의 발언에 콧방귀를 뀔 동주였지만,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얼어붙은 마음이 많이 녹은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니다. 강 대표하고는 따로 이야기해 볼 테니까,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피곤하겠다.”
“푹 쉬세요, 무슨 일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장동주 대표는 힘없이 손짓하며 아들을 내보냈다.
‘하,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군. 잠도 안 오는데,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형욱이 나간 것을 확인한 동주는 서랍에서 묵혀 둔 양주를 꺼낸 다음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이날 밤, 그는 만취가 되도록 술을 들이켜곤 술기운에 의지하여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 * *
분당에 있는 SH그룹 사옥 대표실, 수혁은 자리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한국 기업인 연합회의 협회장이자 WG그룹의 회장으로서 SH그룹에 쏟아진 음해에 대해 강력히 규탄합니다.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겠지만, 해당 언론사는 작년에도 근거 없는 기사를 작성하다 사과를 한 바가 있습니다. 처음에야 실수라 여기고 그냥 넘어갔지만,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언론사의 만행에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명길 회장은 한기연 협회를 대표하여 성명서를 냈다. 한국 기업인 연합에 속한 SH그룹을 지키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는 수혁을 보고 취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정석호 회장이 한국 유통 협회의 이름으로 수혁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에 그에게 힘이 더욱 실리는 상황이었다.
‘정석호 회장님도 그렇고, 다들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나서 주실 줄은 몰랐어. 내가 그동안 사람들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거야.’
과거 사람으로 인한 상처가 많았던 수혁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주변에 가족과 같은 지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가 그전에 쌓은 공이 적지 않기에 도와주신 거겠지만. 어찌 됐든, 참 고마운 분들이야.’
수혁은 피해 의식이 가득했던 과거와 달리 세상이 자기편인 것 같다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통령님, 전화 받았습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나요?”
“다른 게 아니라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김정협 대통령은 며칠 전 대변인을 통해 현 정부와 SH그룹 간에 은밀한 커넥션이 있다는 기사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했었다. 입장문에 의하면 강수혁 대표가 미래 비전 연구소의 고문으로 있는 건 맞지만, 지위를 남용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동료 기업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며 호평을 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니, 감사의 인사는 안 하셔도 됩니다.”
“저로 인해 청와대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것 같아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적지 않게 들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언론사에서 작정하고 달려드는데, 제아무리 언행을 조심한들 저쪽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미래 비전 연구소에서 중임을 맡은 만큼 앞으로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저, 딱 하나 당부드리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다…….”
내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김정협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쇼.”
“국립대와 연계하는 채용은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 지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교육부 장관이 괜한 오해를 받아 스트레스가 심한 듯 보였습니다.”
“안 그래도 올해에 한해서만 한정적으로 시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교육부 장관님께 참 죄송스럽네요.”
수혁은 만평일보에서 교육부 장관이 SH의 만행을 눈감아 준다는 기사를 쏟아 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리고 장관님께서도 진실을 아시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분이 상하신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대통령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저도 예상보다 언론사들이 금세 수그러진 것을 보고 안심하던 참이었습니다. 것보다 대표님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대단하시던데요?”
“영향력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상대의 도발에 강경 대응을 한 거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내가 뒤에서 뭘 했는지를 대충 다 알고 계신 거야. 한마디 한마디 조심해서 해야겠어.’
수혁은 대통령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는 국정원에서 주요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국정원의 원 임무는 안보를 위한 정보 수집과 간첩들을 색출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민간 정보도 적지 않게 수집하던 시절이었다.
“하하, 그저 가볍게 물어본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대통령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후, 일국의 대통령이라 그런가, 괜히 긴장되는군. 응?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지?’
전화를 마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걸 확인한 수혁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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