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만평일보의 장동주 대표라고 합니다. 강수혁 대표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수혁은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대응했다.
“이래 봐도 재계에 아는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전화 드리면 안 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변에 물어 대표님의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대표님이 보시기에 상황이 어떠십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연장자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적당히 수그릴 줄도 알아야지.’
장동주 대표는 최대한 공손히 말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제 아들이 대표님께 무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특종을 찾는 언론사의 특성상 다소 과한 표현들이 기사 안에 작성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소 과한 표현이라니요. 저나 되니까 강경 대응을 했지, 일반인이었으면 한 가정이 쑥대밭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기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시길래 부하 직원 하나 단속을 못 합니까?”
“크흠, 우리 회사는 기자들의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하기 때문에 제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기자님들이 아니라 대표님의 아드님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작년에 분명히 장형욱 부사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표님께서 회사를 꼼꼼히 챙기겠다고 하셨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참 유감입니다.”
수혁은 장동주 대표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것을 그의 목소리에서 느꼈지만, 개의치 않아 했다.
“제 아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이 해야지, 아버지 뒤에 숨어 일이 해결되기를 가만히 기다려서야 되겠습니까?”
“형욱이는 제가 근신 처분을 내려 연락을 할 형편이 못 됩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원한다면 사과 전화를 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장동주 대표는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려고 노력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대표님의 정성에 감동해서 없던 일로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잘못에 눈감아 준다면 그건 좋은 사람이 아니라 호구라고 생각합니다.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끊이시죠. 어차피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 봤자 대표님의 심기만 불편해질 뿐입니다.”
“광고 계약 해지 건은 잘못에 대한 대가로 응당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지오닷컴에 뉴스를 올릴 수 있게 선처를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러는 편이 SH그룹 입장에서도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밉더라도 언론의 자유를 침탈하는 건, 회사 이미지를 고려하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는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언론의 자유란 언론사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악의적인 기사를 면피하기 위해 활용하시는 모습이 솔직히 보기 힘드네요.”
수혁은 이들을 용서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에 끝까지 냉정하게 대응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설마 소송전을 불사하시겠다는 겁니까?”
“훗, 고소를 하든 말든 그건 대표님의 자유니 말리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자네가 아무리 억울한 부분이 있어도 상대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면 받을 줄도 알아야지! 젊은 혈기에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꼴이 우습지도 않구나.”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장동주 대표님 쌓여 있던 화를 일시적으로 폭발시켰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가슴 한 켠에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는데, 조금 전의 발언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끝장을 보자고.”
“제가 만평일보에 대해 알아보니 오보로 피해를 본 사례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대표님께서 피해자들에게 저에게 한 것처럼 일일이 연락하여 사과한다면 약간의 선처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수혁은 동주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말을 쏟아 냈다.
“핏덩이 같은 놈이 이젠 내키는 대로 말을 하는구나. 조만간 대리인 통해서 소장 접수할 예정이니 인맥을 동원하든 네 멋대로 한번 해 봐라. 다른 건 몰라도 소송만큼은 네 뜻대로 안 될 거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저도 소송에서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법원에서도 결론을 쉽게 내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만평일보에서 저지른 업보가 결코 작지 않거든요.”
“지껄일 수 있을 때 마음껏 지껄여라. 쓰레기 같은 자식, 어디서 이런 개잡놈이 나타나서 물을 흐리는지. 쯧쯧.”
장동주 대표는 모욕적인 발언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어지간히 약이 오른 모양이네. 초반에는 온갖 예의 있는 척은 다 하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마무리됐군. 상관없어,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용서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수혁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그 시각 장동주 대표는 수화기를 부서져라 내리치며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젠장! 건방진 새끼, 감히 나에게 그따위 말을 지껄여?”
“대표님, 건강에 해로우니 고정하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한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정·재계에 아는 인맥들을 총동원하면 어떻게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장동주 대표는 임원들과 대책을 논의하던 중 즉석에서 전화를 걸었지만, 참혹한 결과 앞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봤나? 당신들이 아는 인맥이라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긴데,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아까 나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던 사람 누구야?”
‘옛날 성격 나오셨군.’
‘후, 이거 오늘 곱게 끝나기는 어렵겠는데?’
오랫동안 만평일보에서 근무했던 임원들은 장동주 대표가 하대를 하며 거친 언행을 일삼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70이 넘은 이후로는 말을 조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을 막대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누구냐니까!?”
“회사를 위한다는 마음에 대표님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 임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동주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당장 나가!”
“진정하십쇼.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습니다.”
임원들은 흥분으로 인해 얼굴이 새빨개진 동주를 달랬다. 그의 이마에는 곧 터질 것처럼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최 전무, 떠오르는 대책이라도 있어?”
“그게, 음…… 임학규 협회장님에게 전화를 드려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강수혁 대표가 저렇게 설쳐 대는 이유가 옆에서 너도나도 지지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대외적으로 우군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할 때입니다.”
최 전무가 의견을 꺼내자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동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장동주 대표의 표정은 험상궂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임학규 그 친구랑 연락 안 한 지 석 달이 지났는데, 뭔 개소리들을 하는 거야?”
‘아, 맞다.’
‘이런 젠장, 저놈은 왜 그런 소리를 해 가지고.’
동주의 말을 들은 임원들은 얼굴이 하얗게 떴다. 학규는 대한 언론인 협회의 협회장으로, 일전에 협회 이사를 매수한 사건으로 가깝게 지냈던 장동주 대표와 의절한 상태였다.
“고작, 머리를 굴려서 생각한 게 그거야? 이 사람들이 지금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분노에 가득 찬 동주는 고함을 질러 댔고, 그 고성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5월이 되었다. 수혁은 박유신 사장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용산에 물류 센터를 마련하는 게 쉬운 것이 아닌데, 생각해 보면 운이 참 좋았습니다.”
전국에 짓고 있던 지오쇼핑 물류 센터가 드디어 완공되었다. 수혁은 사정상 지방은 돌아보지 못하고, 서울에 지어진 센터를 보러 가는 중이었다.
“마침, 폐건물이 하나 나와서 운 좋게 부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여러모로 우리 회사에 경사가 겹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비하면 여건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요. 아, 정석호 회장님은 연락해 보셨습니까?”
정석호 회장은 지오쇼핑의 최대 투자자 자격으로 물류 센터 완공식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네, 앞으로 20분 후에 도착하실 것 같다며 문자가 왔습니다.”
“대충 우리랑 비슷하게 도착하겠네요. 쇼핑앱에 기능들은 추가되었습니까?”
지오쇼핑은 고객들에게 당일 배송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약속했으나 인프라가 열악한 관계로 서비스 개시를 차일피일 미루어 왔었다. 이에 수혁은 완공일에 맞춰 홈페이지와 앱에 당일 배송과 익일 배송 서비스를 추가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전부터 강조하셨던 부분이라 2주 전부터 홍보를 해 두었습니다. 서비스 개시일도 완공 직후가 아닌, 이틀 후로 하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습니다.”
“서비스를 곧바로 시행하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정말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부터 센터가 돌아가는 것으로 압니다. 인력 수급은 잘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수혁은 칭찬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다음 사안을 점검했다.
“지방 국립대에서 뽑힌 사원들이 예상보다 일을 잘해 주고 있어서 인력 문제는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오쇼핑은 점진적으로 성장했지만, 다른 자회사들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혁은 물류 센터 완공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규모 인력 채용을 감행했다.
‘지오쇼핑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어…….’
한국대의 경우 SH커뮤니케이션과 SH소프트를 중심으로 대규모 공채가 이루어졌지만, 지방거점 국립대는 학교 수도 적지 않은 데다 채용 예정 인원이 분산되었기에 훨씬 작은 규모로 진행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오쇼핑에서 대규모 인력을 고용해서 부족하게나마 구색을 갖출 수 있었고, 비판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장 인력도 마찬가지겠지요?”
“물론입니다. 다른 물류 센터보다 훨씬 나은 급여를 제공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3주 전에 채용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박유신 사장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른 사장님들과 비교되는 순간이 많으셨겠지만, 이젠 지오쇼핑이 SH그룹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비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회사 성장이 더딘 것 같아 자책했을 뿐,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훗, 내가 인복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야.’
유신의 성숙한 답변에 수혁은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 26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