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말씀을 들어 보니 인력 채용이 잘 마무리됐나 보네? 하긴, 며칠 전에 퀘스트가 완료됐다고 알람이 뜨긴 했었으니까.’
어플은 국립대와 연계한 대규모 채용을 히든 퀘스트로 준 적이 있었고, 수혁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통찰력과 운이 3씩 상승한 상태였다.
‘기능을 자주 쓰면 스탯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안 것도 나름 큰 수확이었어.’
한국대 채용 과정에서 상대 스탯을 알 수 있는 기능을 수시로 활용한 수혁은 퀘스트 보상과 별도로 통찰 스탯이 소폭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님, 물류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운전기사가 도착을 알리자 수혁은 유신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오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아, 사장님도 같이 오셨군요.”
“일찍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미리 현장에 나와 있던 총무팀장은 수혁이 온 것을 보곤 금세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귀빈들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구청장님과 의원님들은 센터 사무실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정석호 회장님은요?”
수혁에게는 유력 정치인들보단 석호가 도착했는지가 훨씬 중요했다.
“시설을 둘러보시겠다며, 수행원과 물류 센터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아, 저기 회장님께서 오시네요.”
총무팀장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센터 입구에서 정석호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유통 사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물류 센터가 건립되었으니 이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
“투자자로서 상당 기간 좋은 성과를 보여 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서 투자한 보람을 느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물류 센터 건립에 들어간 비용 중 90%는 제일물류에서 제공한 것이기에 정석호 회장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류 센터가 세워지고 난 후가 진짜 시작이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기 때문에 조바심이 든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가 뭐 단순한 투자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당연한 말씀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수혁은 석호가 서로의 사이가 보통 관계가 아님을 언급하자 부끄러워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금 있다가 시간이 괜찮으시면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야 좋지요. 1시간 후면 점심시간이니 아버님께 연락을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석호는 아버지인 정평우와 함께 밥을 먹자는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려 놨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네, 바쁘다는 핑계로 할아버지를 너무 오랫동안 못 뵌 것 같아서 완공식 날에 맞춰 약속을 잡아 놨습니다.”
수혁은 평우와 석호를 가족처럼 생각했기에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어이구, 강 대표님, 반갑습니다. 용산구청장 이길수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민병수 의원입니다. 강현제 총리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지역구를 위해 힘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수혁입니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이렇게 와 주셔서 완공식 자리가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SH에서 행사를 여는데, 당연히 걸음을 해야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오늘 일정을 위해 오전 스케줄을 모두 비워 뒀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신 부분은 잊지 않겠으니 편하게 행사를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그룹 본사 지었을 때보다도 더 적극적이잖아?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구는 거지?’
수혁은 정치인들의 과잉 친절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당내에 도는 소문에 의하면 강현제 총리님께서 아끼는 청년이라고 들었어. 비록 행정부로 가셨지만, 당내 영향력은 여전하시니 잘 보여야겠어.’
‘김정협 대통령이 가장 총애하는 기업인으로 뽑힌 사람이야. 되도록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내 정치 행보에도 나쁘지 않을 거야.’
이들은 당 대표였던 강현제 총리와 대한민국 최고 권력인 김정협 대통령의 관심을 받는 수혁과 친분을 맺고 싶었다.
“사장님, 완공식은 언제부터입니까?”
“말씀만 하시면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식순을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가장 첫 순서로는 대표님 인사말이 있습니다. 그 후 곧바로 테이프 커팅 식이 진행될 예정이고, 마지막으로 귀빈들과 함께 현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준비는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 바로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수혁은 완공식에 와 준 이길수 구청장과 민병수 의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대화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행사 진행을 핑계 삼아 재빨리 단상으로 향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완공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SH그룹의 강수혁 대표입니다. 우선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정석호 회장님과 이길수 구청장님 그리고 민병수 의원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지오쇼핑은 고객들에게 이전에 경험에 보지 못한 편리함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
행사 개시와 동시에 수혁의 짧은 인사말이 이어졌고, 커팅식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고객의 주문이 들어오면 제조 업체에 즉각적으로 알람이 가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재고 창고나 공장에선 제품을 곧바로 물류 센터로 보낼 겁니다.”
시간은 흘러 행사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수혁을 비롯한 귀빈들은 박유신 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차분하게 공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제품이 센터에 도달하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택배 기사님들께서는 저쪽에서 창고와 공장에서 물품이 도착하면 바로 배송할 수 있게 대비를 하고 계실 겁니다.”
수혁의 질문에 유신은 손가락으로 하차장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갔다.
“제품 포장이랑 지역별로 분류하는 작업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대표님이 기획하신 대로 자동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은 모두 기계로 대체했습니다. 박스들을 지역별로 분류하는 작업 같이 사람 손을 탈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면 업계에서 가장 빠른 작업 처리 속도를 보유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박유신 사장은 제일물류를 비롯한 경쟁 유통업체의 시스템을 완벽히 숙지한 상태여서 자신 있게 의견을 밝힐 수 있었다.
“당일 늦어도 익일 배송이 이루어지려면 제조 업체의 협력이 필수겠군요.”
“그렇습니다.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제품은 당일 배송 서비스가 불가하도록 처리를 해 놓았습니다. 단, 제조사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센터로 물품을 보내 주는 기업의 수수료에는 할인이 들어가도록 조치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기업의 참여를 유인할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할 겁니다.”
수혁은 자신이 기획한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기자님들은 어디 계십니까?”
“사무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저분들도 멀리서 온 만큼 얻어 가는 건 있어야지요.”
“네, 알겠습니다.”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물류 센터에 와 있었다.
“지역민들의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까요?”
“네, 인력이 들어가는 작업에는 단기 근로자들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지역민들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보다 우선 채용이 되도록 해놨습니다.”
수혁은 기자들이 몰려오자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단기 근로자지, 사실상 용돈 벌이 정도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만?”
내내 침묵을 지키던 민병수 의원은 기자들을 의식한 질문을 던졌다.
“비록 단기 근로 형태이긴 하지만, 임금 수준은 정규직 이상으로 줄 예정이라 큰 반발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지역민들로서는 아쉽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높은 대신, 단조롭고 노동 강도가 제법 있는 편이라 오래 근무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입니다. 특히 용산구의 경우 다른 구에 비해 소득이 나쁘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고요.”
박유신 사장은 민병수 의원의 날카로운 질문에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니 태도가 돌변하는군. 참 신기하다. 예전에는 저런 모습이 적응이 안 됐는데,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니 말이야.’
과거에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은 것들이 이제는 담담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앞으로 우리 용산구에는 지오쇼핑과 같은 기업이 많이 들어와야 할 겁니다. 이를 위해 저는 서울시와 협력하여 지원책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병수 의원이 자기 PR에 나서자 이길수 구청장은 이에 뒤질세라 할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현장도 대충 다 둘러봤으니 완공식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물류 센터 건립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기자들과 정치인들 간의 교감이 어느 정도 진행된 것을 확인한 수혁은 적절한 선에서 완공식을 마무리했다.
“지오쇼핑을 필두로 SH그룹이 번창하길 빌겠습니다.”
“우리 용산구는 지오쇼핑뿐만 아니라 대표님의 다른 회사들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덕담 감사드립니다. 걸음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건물을 빠져나온 수혁은 정치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대표님의 위세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네요.”
“아, 회장님이시군요. 경황이 없어 그만 챙겨 드리지 못했습니다.”
수혁이 홀로 남은 것을 본 정석호 회장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언제 뵈러 갈까요?”
“박유신 사장님께 뒷정리를 맡겼으니 당장 출발하셔도 무방합니다. 괜찮으시면 제 차로 이동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시만요. 수행원들한테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석호는 운전기사와 수행 비서에게 지시를 내린 뒤 수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빨리 오셨네요?”
“네, 딱히 할 말이 많지 않아서요.”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은 기사를 퇴근시킨 뒤,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과거 본인이 살던 달동네 부근의 헌책방 거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헌책방 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칸타빌레’카페. 이곳에는 수혁의 고교 시절 기억이 깃든 추억의 장소였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저야 평소처럼 카페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죠. 수혁 학생. 아니, 대표님은 잘 지내셨어요?”
“그냥 편한 대로 호칭하세요. 예전에 사장님을 이곳에서 처음 뵙던 게 생각나네요.”
수혁은 4년 만에 본 카페 여사장을 보고 회상에 잠겨 있었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변한 게 없네요.”
“처음 가구를 배치할 때 신경을 많이 써서 딱히 변화를 줄 필요가 없더라고요.”
카페 내부는 엔틱한 가구들과 벽면에 달린 유럽식 전등들까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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