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녀석, 왔으면 방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뭘 그렇게 서성이는 거냐.”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카페 사장과 대화를 나누던 수혁은 정평우를 발견하곤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네가 온 것 같아서 언제 들어오나 기다렸는데, 하도 안 와서 내가 나왔다.”
“하하, 제가 어르신의 만남을 방해한 것 같네요. 대표님은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대표라는 호칭은 안 붙이셔도 되는데…….”
수혁은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지인이 대표라고 부르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난 김 사장의 처신이 옳다고 본다. 명색이 기업의 오너인데, 호칭은 정확하게 하는 것이 맞아.”
“맞습니다. 대표님께서 학생이던 시절은 과거의 일이지, 지금도 그렇게 대하면 안 되지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마실 것을 갖다 드릴게요.”
사장은 미소를 짓더니 음료를 만들러 커피 기계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버지, 저는 안 보이십니까?”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석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평우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야 뭐, 수시로 보는 사이잖냐? 자, 이만 들어들 가자.”
평우는 아들과 수혁을 데리고 룸으로 들어갔다.
“점심들은 먹었고?”
“할아버지랑 같이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어요.”
“조금 있다가 국밥에 수육이나 먹으러 가자.”
“예전에 자주 가던 곳 말씀하시는 거죠?”
“응, 오랜만에 옛날 기분도 내고 좋잖아.”
“안 그래도 회사에서 일할 때면 종종 생각나곤 했거든요. 사장님이랑 다 그대로시죠?”
“물론이지. 가끔 너에 대해 묻곤 했는데, 네가 TV에 자주 나오는 바람에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더구나.”
수혁은 과거에 자주 들렀던 국밥집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거 참, 아들보다 추억이 더 많으신 것 같네요.”
“네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내가 많이 데리고 다녔었지. 하지만 사업을 한다고 집에서 뛰쳐나간 놈을 무슨 도리로 챙겨 주냐?”
“하하, 그러게요…….”
정석호 회장은 괜히 말을 꺼냈다가 머쓱해졌다.
“그건 그렇고 회사가 제법 큰 모양이더구나. 재계 쪽에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SH를 두고 차세대 재벌이라며 칭찬을 하더라고.”
“재벌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이제 막 크고 있는 거지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수혁은 손을 내저으며 부끄러워했다.
“제가 볼 땐 아버지 말씀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표님, 혹시 월간성동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네, 성동일보에서 매월 출판하는 잡지 아닙니까?”
석호는 할 말이 생각났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매해 5월, 성동일보에선 여러 분야에 랭킹을 매기곤 합니다. 예를 들면 2003년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 탑10 이런 식으로 말이죠.”
“회장님께서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즐겨 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매사 점잖아 보이는 석호에게서 의외의 면을 발견한 수혁은 속에서 웃음이 올라왔지만, 꾹 참고 있었다.
“하하, 기업인이라면 한 해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건 필수입니다. 월간성동에서 내놓는 자료는 단순히 호사가들이 즐긴다고 하기에는 신빙성이 높은 편이라 다른 회사 오너들도 종종 살펴보곤 합니다.”
월간성동은 전문적인 평가기관은 아니었지만, 소식에 밝은 기자들이 나름대로 정보를 취합해서 랭킹을 매겼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당히 높다고 여겨지는 잡지였다.
“그런데, 그 잡지가 뭘 어쨌다는 거냐?”
“매출, 재정 건정성, 잠재력 등 다양한 요소를 척도로 대한민국 최고 그룹을 선정했는데, SH가 WG와 일송에 이어 3위를 차지했습니다.”
“WG가 일송을 제친 것도 충격이지만, 수혁이네 회사가 국내 3위라니. 정말 엄청난 기업으로 성장한 모양이구나.”
평우는 타인의 성과에 대해서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편인데,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한낱 순위일 뿐이라 별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계열사의 수가 적어서 그렇지, SH는 이제 대기업의 반열에 오른 겁니다. 아마 조만간 대경연에서 곧 회원 가입을 하라고 연락이 올 겁니다.”
“대경연에서요?”
대경연은 대한 경영인 연합의 줄임말로 국내 20대 기업을 이끌고 있는 오너들만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현재 수혁이 속해 있는 한국 기업인 연합과 대한 유통 협회보다 권위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실상 재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단체라고 보면 됐다.
“대한 경영인 협회는 회원 수가 2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만큼 회원 목록이 갱신되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특히 요즘같이 시장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에선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요.”
“한마디로 수혁이가 이번에 누군가를 제치고 대한민국 회장, 대표 중 상위 20명 안에 들었다는 소리잖아? 수혁이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야기를 듣던 평우는 친손자처럼 여겼던 아이가 거물로 성장한 것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협회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정해진 건 없으니 두고 봐야죠.”
“대한 경연인 협회에는 6월 말에 한 번, 연말에 한 번 모이니까 아마 그전에 연락이 갈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 보시죠.”
“추정 재산만 4조 5천억 원이라고? 이게 진짜냐 수혁아?”
정석호 회장이 국내 부자 순위가 적힌 곳을 손으로 가리키자 평우는 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제 재산을 모르는데, 뭘 근거로 저렇게 적어 놨을까요?”
“대표님께서 SH의 주식 지분을 많이 갖고 계신 게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재산 집계가 4월에 이루어진 걸 고려하면 지금은 더 오르셨을 거고요.”
“흠, 그렇군요.”
수혁은 순위표를 보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잡지에서는 현명길 회장이 10조 원이 넘는 재산으로 1위이고, 이경욱 회장은 5조 2천 억으로 근소한 차이로 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면 수혁이가 이경욱 회장보다 재산이 더 많겠구나?”
“주식 상으로는 그러겠지만, 파악되지 않는 재산까지 생각하면 장담할 순 없습니다.”
“어쨌든, 이 정도의 부면 3대가 아니라 대대손손 풍족하게 살 수 있겠구나. 수혁아, 이제는 일선에서 조금 물러나서 여유롭게 사는 게 어떠냐? 예전부터 느꼈지만, 넌 너무 숨 가쁘게 살아왔어.”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이 아이가 하루도 마음 편히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적당히 이루었으면 그만 내려놓고 편히 살면 좋으련만,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참…….’
정평우는 수혁이 쉼 없이 달려온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제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쭉 나아갈 생각이거든요.”
“지금 이루신 것도 엄청난데, 더 큰 목표가 있으십니까?”
석호는 어린 나이에 제일물류와 버금가는 기업을 일군 수혁이 안주하는 기색이 없자 최종 목표가 어딘지 궁금해졌다.
“기왕 사업을 시작한 거 SH를 세계 최고 기업으로 만들려고요.”
“웬만한 성과에는 미동도 없으셔서 무덤덤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목표점 자체가 높아서 그런 거였군요.”
수혁의 말을 들은 석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 난 나이를 먹어서 편한 게 최고다.”
“세계로 나가시기 전에 국내를 평정하려면 여느 재벌들처럼 건설, 제약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회사를 만드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통상적인 기업들은 자본이 생기면 영역 확장에 열을 올리곤 했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에서 온 수혁은 머릿속에 참신한 아이디어가 가득했기에 석호가 언급한 방식들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사업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런,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네요. 바로 가시죠.”
평우의 말을 들은 수혁과 석호는 일어날 채비를 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가서 사장님이 서운해하실까 걱정이네요.”
“그 양반은 친하게 지내는 단골들이 워낙 많아서 외로울 틈이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어.”
“사장님께서 예전에 서비스도 주시고 참 좋았거든요. 오늘 가서 매출 좀 많이 올려 드려야겠어요.”
“오, 점심은 네가 사는 거냐?”
“하하, 당연하죠. 아까 보셨잖아요. 이젠 국밥 살 여유 정도는 된다고요.”
수혁과 일행들은 넉살을 떨며 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강남에 있는 지오쇼핑 사무실. 수혁은 박유신 사장을 포함한 임직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물류 센터가 가동된 지 1주일이 지났는데, 매출 상황은 어떻습니까?”
“당일 배송 서비스가 개시된 이후, 매출이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올린 매출이 4월 한 달보다 더 높게 나온 터라 말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주문을 할 수 있어 제조사들도 수익이 짭짤하다고 들었습니다.”
고무적인 성과에 박유신 사장의 얼굴은 싱글벙글하였다.
“지오쇼핑을 이용하면 타 플랫폼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인상을 줘야 협력 업체 확보에 유리할 겁니다.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긴장의 끈을 놓지 마세요.”
수혁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눈앞의 성과에 안이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사무실도 옮길 때가 된 것 같은데, 혹시 알아본 것은 있습니까?”
“다행히, 바로 옆 건물이 매물로 나와서 이번 토요일에 매매 계약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옥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신입 사원 교육관이나 보조 건물로 활용할까 고민 중입니다. 혹시 대표님께서는 따로 계획이 있으십니까?”
박유신 사장은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수혁의 의중을 물었다.
“건물이야 가만히 둬도 가격이 자연스럽게 오르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다면 굳이 매도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새 사옥 매입을 조속히 진행해 주세요. 이 사무실로는 새로 들어올 신입 사원들을 소화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지오쇼핑의 회장에 취임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이야 희망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일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게 잘 풀렸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갔습니다.”
‘대표님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 보다.’
‘원래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닌데, 왜 저러시지?’
임직원들은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수혁이 분위기를 잡고 말하자 자세를 고쳐 앉고 경청했다.
“원래는 말미에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놀라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회의가 끝나면 박유신 사장님은 지오쇼핑의 총 책임자가 되실 겁니다. 앞으로 모든 결제 서류는 제가 아니라 사장님께 주시길 바랍니다.”
“…….”
수혁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밝았던 회의실 분위기는 금세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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