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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71화 (271/316)

271화

“회장직을 맡긴 했지만, 그룹 대표직을 겸임하다 보니 경영에 소홀했던 면이 없지 않아 있을 겁니다. 부디, 부족했던 점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임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계셨기 때문에 희망을 갖고 계속 일을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회장님이 안 계시더라도 박유신 사장님과 합심해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직원들은 수혁에 저마다 한마디씩 건넸다. 이들은 다른 계열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상황에서도 수혁이 옆에서 격려해 줬기에 기죽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회장님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아서 잘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박유신 사장은 오래전부터 수혁이 회장직을 내려놓을 거란 걸 알았기에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 회사 설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체 회식이 있는데, 참석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제가 있으면 직원들이 술을 편히 마실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회장님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신데,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려 했지만, 임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참석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퇴근 후에 제가 거하게 쏘겠습니다. 사장님, 근방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예약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제가 회식 장소를 예약해 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조금 있다가 편하게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총무팀장이 수혁을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이야기가 잘된 것 같으니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죠, 홍보팀장님.”

“네, 회장님.”

“제조사와 연계해서 주기적으로 프로모션을 넣는 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판매현황을 고려해서 인기 상품의 경우 업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배송비 면제와 같은 프로모션을 지속적으로 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수혁은 퇴근 후에 임직원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6월이 되었다. 기말고사 시즌을 맞은 수혁은 서초동 아파트에서 시험 준비를 하다가 잠깐 쉬고 있었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졸업요건을 모두 채우는데,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전에 수업을 많이 들은 덕분에 시험 과목 수는 두 개밖에 되지 않아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확 군대를 가 버려? 아니야, 2년 2개월이면 기회는 싹 다 날아가 버릴 거야. 그래, 원래 계획대로 대학원을 알아보자.’

수혁은 공부는 잠시 미뤄 두고, 군대를 연기할 방안을 찾고 있었다.

‘응? 교수님한테 메일이 왔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던 수혁은 메일이 온 것을 확인했다.

‘바로 연락드려야겠다.’

메일은 한국대 길명준 교수로부터 온 것으로 수혁과 긴히 의논할 게 있으니 연락을 주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수님, 메일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하하, 곧 있으면 은퇴할 몸이라 노후를 위해서라도 건강 관리만큼은 철저히 하고 있다네. 그래,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명준은 수혁의 지도 교수로 1년에 2~3차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아, 저는 집에서 시험공부 중입니다.”

“흠. 시험공부를 한다는데, 방해할 수는 없지. 혹시 6월 중에 시간을 낼 수 있어? 공문이 하나 왔는데, 자네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사안이거든.”

“교수님만 괜찮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뵐 수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럼, 편할 때 교수실로 찾아오게.”

“네, 교수님.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길명준 교수와 통화를 마친 수혁은 차를 몰고 한국대로 향했다.

‘항상 전화로만 안부 인사를 드렸지 얼굴을 뵙는 건 거의 2년만인 것 같아. 여러모로 나에게 도움을 주셨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한국대에 도착한 수혁은 명준이 있는 교수실로 가고 있었다.

똑-똑

“누구십니까?”

“교수님, 접니다.”

“어, 잠깐만.”

방 앞에 도착한 수혁이 노크를 하자 잠시 후, 길명준 교수가 문을 열어 주며 반갑게 맞았다.

“전화 끊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급하게 오나?”

“교수님이 부르시는데, 바로 달려와야죠.”

“하하, 내가 괜히 바쁜 사람에게 부담을 준 건 아닌가 모르겠어. 앉지.”

명준은 수혁의 능청이 마음에 드는지 호쾌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했다.

“커피랑 차, 쥬스 다 있는데, 뭐로 마실래?”

“뭐든 괜찮으니 교수님이 편하신 거로 주세요.”

“내가 최근에 커피 기계를 하나 샀거든, 잠깐만 기다려 봐.”

길명준 교수는 오랜만에 방문한 제자에게 최대한 잘해 주려고 했다.

“향이 정말 좋네요.”

“멕시코에 출장을 다녀온 동료가 선물해 준 커피야. 맛은 조금 쌉싸름하긴 하지만, 향이 그윽해서 딱 내 취향이더라고.”

“산미가 적당히 배어 있어 제 입맛에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수혁은 커피를 음미하며 말했다.

“사업을 하느라 학교생활은 소홀히 했을 줄 알았는데, 성적이 아주 좋더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재학생 310명 중에서 3등으로 졸업하는 사람이 운이 좋다고 말하면 다른 학생들이 뭐가 되냐?”

“훗. 교수님 앞에서 성적 자랑을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행동은 없지요.”

수혁은 명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바람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곧바로 진지한 자세로 돌아왔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라. 우리가 비록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살가운 사제지간이 아니냐?”

“교수님을 보면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요.”

“네가 뭐가 죄송하냐?”

“자주 찾아 뵜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잖아요.”

명준이 짐짓 서운한 척하며 말을 붙이자 수혁도 미안한 속내를 편안히 드러냈다.

“연락이라는 게 꼭 학생이 먼저 해야는 법이 어딨어? 나도 너한테 잘한 건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것보다 이걸 좀 봐라.”

“어? 이건 케이턴 대학교에서 보내온 공문이잖아요?”

수혁은 영어로 된 서류를 건네받고 차분히 살펴봤다.

“보면 알겠지만, 케이턴 대학교에서 MBA 특별 과정을 개설한다는구나.”

“특별 과정이요?”

케이턴 대학교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사립 명문으로 경영학에 관해서 만큼은 세계 최고 대학인 하버드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국대는 매년 우수 학생 1명을 선발하여 유학을 보냈는데, 이는 전 세계의 인재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케이턴의 교육 방침 덕분에 가능했다.

“케이턴 MBA 과정은 예전부터 상류층 자제들이 인맥을 쌓기 위한 통로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윌리엄 총장은 교육 기관이 사교장으로 취급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학생 선발 과정을 조금 더 엄격히 한 모양이다.”

“선발 과정이 변해서 특별 과정이라는 단어를 붙인 건 아닐 거 같은데요?”

수혁은 길명준 교수의 설명에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가 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전에는 이론 수업은 조금만 하고 지도자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 소양과 교양을 주로 가르쳤다고 들었어. 하지만 이제는 이론 수업도 많이 강화되고 과제와 졸업 논문도 꼼꼼하게 체크해야 될 거야.”

“태생이 잘난 사람들은 굳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가정에서 다 배운 내용을 학교에서 배우니 학위를 날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하네요. 만약 교수님 말씀처럼 과정이 변한다면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안 오겠는데요?”

“아니야, 기존의 교육 과정은 유지가 되는 만큼 인맥 쌓는 용도로 이만한 것이 없어. 그리고 케이턴 대학의 MBA를 취득한 쟁쟁한 동문과 세계 최고 학위라는 타이틀 때문에 부유층 자제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올 거다.”

“부유한 집안에서 망나니 같은 놈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성공한 기업일수록 후계자 교육을 엄하게 하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교수님. 이것들을 저에게 보여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수혁은 길명준 교수가 자신을 호출한 이유에 대해 짐작은 갔지만, 모른 체하며 물었다.

“눈치가 빠른 편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둔하구나. 널 두고 케이턴 대학을 거론하는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겠어?”

“한국대에서 저를 추천하려는 거군요.”

“그래. 물론 과정에서 잡음은 있었지만, 네가 결정만 내리면 우리는 널 밀어 줄 거다.”

길명준 교수는 현재 경영대 학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학생 선발에 참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학생 선정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나요?”

“크흠, 조금 전에 이야기했잖아. 작년까지만 해도 케이턴 MBA 과정은 재벌 자제들이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명학이 학교에 있었다면, 그놈이 선발됐을 확률이 높았겠어.’

“선발 기준을 재벌이냐 아니냐로 설정했다니, 참 놀라운 일이네요.”

“한국대도 이경률 총장님이 취임한 이래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 그전까지만 해도 재계나 정관계 자제들이 편법으로 입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개선되고 있으니 모교에 대해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명준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교수님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한국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인걸요. 그것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봐라.”

“원래 저 대신에 재벌 자제 중 하나가 선발되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 학교 내부의 일이라 말하면 안 되지만. 너랑도 친분이 있는 학생이니 그냥 말해 주마.”

‘나랑 친분이 있다고? 누구지?’

궁금증이 생긴 수혁은 귀를 세우고 명준의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기다렸다.

“혹시, 전자·컴퓨터 공학부에 다니는 현보성이라고 들어 봤어?”

“저 말고 추천받은 사람이 보성이었나요?”

깜짝 놀란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보성은 WG그룹의 현명길 회장의 손자로 그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대연이라고 알지?”

“네, 우리 대학 동문 중에 잘나가시는 분들이 많이 속해 있는 모임이잖아요.”

수혁은 이전에 총회에도 참석한 적이 있는 만큼 대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대연 출신 사람들이 교직원들에게 압력을 넣은 모양이야. 현보성 학생이 뭐라고 다들 호들갑을 떠는지 참…….”

“제가 알기로 보성이는 학교 성적도 우수했고, 대연에서 회장직을 오래 역임해서 선배들이 더 챙겨 주고 싶어 할 거에요.”

“학생처장이랑 교무처장이 어찌나 생떼를 쓰는지, 나랑 이경률 총장님이 고생 좀 했다.”

이경률 총장은 대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보성이 아니라 수혁을 강력하게 지지해 준 상황이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나중에 총장님도 따로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총장님뿐만 아니라 나랑 경영대에서도 널 지지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길명준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수혁에게 말했다.

- 27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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