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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75화 (275/316)

275화

“유리야, 회의하느라 고생 많았어.”

수혁은 유리가 회의실을 나가자 따라가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저보단 다른 사장님들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재단 업무라는 게 변동이 많지 않아 보고서를 작성에 큰 어려움이 없거든요.”

“유리야,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평소처럼 말해도 돼.”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좀 있다가 저녁 먹으러 갈 거지?”

“솔직히 들어가서 쉬고 싶긴 하지만, 가서 인사도 나누고 해야지. 임원들이랑 밥 먹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구나…….”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퇴근하는 게 어떨까? 내가 박찬명 사장님께 말해 줄게.”

수혁은 유리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는 걱정되어 물었다.

“아니야, 저녁 식사는 당연히 참석해야지. 것보다 케이턴 MBA 과정을 공부하게 되다니,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긴, 이게 다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되니까 가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사실 한국에 남고 싶었는걸.”

“후, 그러게 학교 졸업하면 이젠 회사에서 자주 볼 수 있겠구나 했는데…… 당분간은 또 못 보겠네.”

유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서로 너무 바쁘다 보니 함께했던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 혹시 괜찮으면 졸업식 끝나고 같이 여행이나 갈까?”

“나야 좋지!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졸업식 후에 나랑 여행 가면 부모님께서 서운해하시지 않을까?”

“흠, 그 부분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그럼, 우리 부모님이랑 할아버지까지 껴서 함께 가는 게 좋겠다. 할아버지는 건강하시지?”

그녀의 말을 들은 수혁은 미국에 가기 전에 가족들과 추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유리의 할아버지인 김 노인은 달동네 이웃이었기에 부모님과도 안면이 있어 같이 여행을 다녀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

“응, 매일 가볍게라도 운동을 해서 아직 정정하셔.”

“다행이다. 할아버지께서 허리가 조금 안 좋으셨던 거로 기억하거든.”

“맞아. 예전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동네에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다친 적이 있었어. 생각해 보니까 그때 네가 걔들을 다 쫓아내지 않았어?”

“훗, 엄청 옛날 일인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네?”

수혁은 과거 달동네에서 살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표님. 계속 찾고 있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슬슬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임원들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사장님도 함께 가시죠.”

박찬명 사장은 휴식 시간이 끝났음에도 수혁이 보이지 않자 막 찾아 나섰던 참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사장님이랑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다른 분들에게 실례를 저질렀네요.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3분 정도 남았으니, 여유롭게 가셔도 됩니다. 그런데 제가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서 가시죠.”

“네, 대표님.”

수혁과 유리는 찬명의 말을 가볍게 넘긴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둘이 뭔가 수상한데? 내가 착각했나?’

박찬명 사장은 빠르게 걸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었다. 수혁은 업무 공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촌음을 아껴 가며 업무에만 매진했다. 그는 서류 결재와 회의 같은 통상적인 업무보다는, 자신이 없어도 회사가 돌아갈 수 있게 각 계열사에 맞는 사업 기획안 작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대표님, 조금만 쉬어 가면서 하시죠.”

“일반적인 업무들이야 임원들이 잘할 수 있지만, 장기 비전을 세우는 일만큼은 미리 해 둬야 합니다.”

김찬식 팀장은 회사에만 틀어박혀 문서 작업에 몰두하는 수혁을 말려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혁아, 지난주부터는 집에도 안 가고 회사에서 잤잖아. 퇴근 시간도 다 됐는데, 이제 그만 가자.”

“괜히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라.”

찬식은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긴 했지만, 비서처럼 항상 근처에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수혁이 집에 가지 않는 날이면 함께 회사에 머무르며 식사를 챙겨 주는 등 업무에만 열중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조금 전에 어머님이랑 아버님께서 도착하셨어. 일도 중요하지만, 계속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잖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부모님이 여길 왜 와?”

수혁은 하던 일을 멈추고 찬명을 쳐다봤다.

“1시간 후면 졸업식인데, 네가 부모님께 연락도 안 드리는 것 같아 내가 전화를 드렸어.”

“아, 맞다. 오늘이 졸업식이지? 하, 어떡하지? 일만 하느라 여행 준비를 하나도 못 했는데…….”

원래라면 숙소도 예약하고 여행 스케줄을 짜 놨어야 했지만, 기획안을 만드느라 다른 것들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아버님께서 네가 너무 바빠 보인다며, 그냥 양평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기로 했데.”

“휴, 일단 부모님 모시고 학교로 가자.”

수혁은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을 모시러 갔다.

“엄마,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괜찮아. 찬식이가 심심하지 않게 말동무를 해 줘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혹시, 차는 갖고 오셨어요?”

“찬식이가 회사 차를 보내 줘서 차는 집에다 놓고 왔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왔어.”

“아닙니다, 아버님. 당연히 해 드려야 되는 건데요, 뭘…….”

강선웅이 따뜻한 눈길을 보내자 찬식은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 찬식아.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다 해 줬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냐? 그러지 말고 얼른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요. 졸업식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가시죠, 밑에 제 차가 있으니까 그걸 타고 이동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가자.”

“찬식아, 내 컴퓨터에 기획안들이 있으니까 네가 알아서 사장님들께 전달 좀 해 줘.”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그러다가 늦겠어.”

“알겠어. 고생하고, 나중에 또 보자.”

찬식의 재촉에 수혁은 부모님을 모시고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난히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대에는 학사모를 쓴 학생들이 캠퍼스를 누비고 있었다. 수혁은 졸업식을 치르기 위해 교내에 있는 대형 홀 근처에다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하세요.”

유리와 한 노인이 수혁네 일행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허허, 오랜만이구나. 훌륭한 아들을 둬서 참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유리가 도와준 덕분에 수혁이가 안심하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리의 할아버지인 김상욱이 덕담을 건네자 선웅은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아까 길명준 교수님이랑 만났었어.”

“교수님도 오셨어?”

“너한테 문자랑 메일을 보냈는데, 통 답장이 없다며 답답해하시더라고.”

“나중에 따로 연락을 드려야겠다. 최근에 워낙 바빠서 다른 곳에서 걸려 온 전화도 못 받았거든…….”

“안 그래도 교수님께서 네가 바빠서 그랬을 거라며 다 이해하시더라고.”

“수혁아, 빨리 연락드려 봐라. 뭔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그러신 것 같다.”

이야기를 들은 혜정은 수혁을 보며 말했다.

“네, 엄마.”

“아니야, 수혁아. 교수님께서 졸업식 준비하느라 바쁘시다고, 나한테 대신 전해 달라고 하셨어.”

“아, 그래? 뭐라고 그러셨는데?”

핸드폰을 꺼내려던 수혁은 다시 품속에 넣고 물었다.

“오늘 졸업식 때, 네가 대표로 나가서 졸업장을 받기로 정해졌대.”

“왜 내가 대표가 된 거지? 성적이 나쁘지 않긴 하지만, 수석을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수혁은 자신보다 유리가 더 성적이 좋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 학기에 졸업했잖아. 이번 학기 졸업생 중에서는 네 성적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

“수혁아, 축하한다.”

“역시, 우리 아들은 못 하는 게 없네?”

유리의 이야기를 들은 선웅과 혜정은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졸업생들 앞에서 연설도 해야는 거야?”

“지난 졸업식 때랑 똑같이 진행된다면, 아마 해야 할 거야.”

그녀는 지난 학기 수석 졸업생으로서 연설을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연설이야 뭐, 소감만 짧게 이야기하면 되니까 상관없지 뭐. 이제 들어가서 앉으시죠. 이러다가 좋은 자리에 못 앉겠어요.”

수혁은 어른들을 모시고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귀빈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총 졸업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졸업식은 시작되었고,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이경률 총장입니다. 우리 한국대는 다른 그 어떤 대학보다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만큼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이경률 총장은 본격적인 식에 앞서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현재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강현제가 특별 연사로 나왔다.

‘조금 이따 식이 끝나면 인사를 드려야겠다.’

수혁은 강현제 총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에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졸업장 수여식 순서입니다. 졸업생 대표는 단상 위로 올라와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발언을 들은 수혁은 차분하게 무대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대 총동문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성식입니다. 이 자리에 절 초청해 준 이경률 총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며 졸업장 수여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강수혁 학생 앞으로 나와 주세요.”

‘강수혁이라면 SH그룹 대표잖아?’

‘돈, 인물, 공부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학부모들은 연단 앞으로 걸어오는 수혁을 보며 감탄했다.

“대표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성식은 졸업장을 건네며 축하 인사를 건넸고,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이어서 이경률 총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강수혁 졸업생은 내려가지 마시고 뒤에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 연설을 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수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 위에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총리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수혁의 옆자리에 앉은 강현제 총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야 국정 운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지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 총리님. 혹시 제가 왜 이곳에 앉아야 하는지 들으신 거라도 있습니까?”

무대 위에는 총리와 동문회장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들이 배석해 있었기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총장님께서 곧 알려 주실 겁니다. 한번 들어 보시죠.”

강현제 총장은 웃음만 지을 뿐, 구체적인 답변은 피하고 있었다.

- 27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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