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이명헌 사장님께는 이례적으로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한국대에서 선발생으로 뽑힌 바가 있습니다. 이에 동문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지만, 이경욱 회장님의 입김으로 인해 모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명헌은 이경욱 회장과 이정찬 부회장의 도움으로 30대 초반의 나이에 일송전자 사장 자리에 취임한 상태였다.
“사장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정들을 어떻게 잘 아십니까?”
건우의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래 봬도 제가 한국대 87학번입니다. 졸업 후 일찌감치 미국으로 넘어와 동문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동문을 만나면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중이지요.”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든다 했는데, 우리 선배님이셨군요?”
찬식은 무릎을 치며 반가운 마음을 표현했다.
“하하, 저도 타국에서 모교 분들을 만나니 기쁘네요. 어쨌든 이명헌 사장님은 그룹의 지원 아래 케이턴 대학에 입학했고, 저와는 종종 만나 술도 마시고 했습니다. 하지만, MBA 과정을 소화할 만한 역량이 되는지 의구심이 들더군요.”
“올해 들어 교육 과정이 강화됐지, 수업을 소화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수혁은 케이턴 대학 홈페이지에서 개정되기 전 커리큘럼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세계 최고의 MBA 과정답게 세계적인 석학들이 경영학에 대한 이론 수업을 진행했긴 했지만, 학문적인 내용보다는 트렌디한 경영 기법을 전수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당수의 수업은 상류 사회에서 사교 활동을 함에 도움이 되는 교양을 가르쳐 주고 있어 어려운 내용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건 대표님의 수준에서나 통용되는 말입니다. 이명헌 사장은 간단한 회화는 가능했지만,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기에 영어 실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은 빼먹기 일쑤였고, 급기야 스트립클럽이나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유흥을 즐기기에 급급했죠.”
“자기 돈으로 알아서 논다는데,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본인과 관련된 없는 일을 왜 이렇게 열을 내면서 말하는 거지?’
“본인이 알아서 논다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일송그룹에 이명헌 사장을 전담하는 특별 관리팀이 있는데, 툭하면 저에게 사장님을 잘 돌보라며 귀찮게 구는 바람에 고생 꽤나 했습니다.”
“일송에서 받은 게 있으셨겠네요?”
“그렇습니다. 이명헌 사장을 돌봐 주는 조건으로 거금을 제시하더군요.”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명헌이 뉴욕에서 방탕하게 살 때 옆에서 뒤치다꺼리를 수도 없이 했기에 일송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후, 선뜻 거금을 준다는 말에 혹하고 넘어간 제 잘못이 크지요. 그리고 남 뒷담이나 하려고 이명헌 사장을 언급한 건 아닙니다.”
“본론은 따로 있었군요?”
내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수혁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새로 부임한 윌리엄 총장과 스미스 학장이 한국 학생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 이명헌 사장과 관련이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전에 입학했던 재벌 자제들의 퍼포먼스가 좋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이명헌 사장으로 인해 인식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케이턴 대학에서 작년에는 오퍼를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사장님께 처음 들었습니다.”
수혁은 점점 건우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명헌 사장은 미국에 있을 때 깊은 우울증을 알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자신이 최고였지만, 케이턴 대학에 들어오니 일송 정도 되는 기업 자제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던 게지요.”
‘지천으로 널렸다고? 일송도 나름 세계적인 기업인데, 말이 되나?’
수혁은 건우가 과장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끊지 않고 잠자코 듣기로 했다.
“학업은 학업대로 안 풀리지, 돈 자랑이라도 해서 이목을 끌려고 해도 쟁쟁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여의치 않지.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이유이지만, 이명헌 사장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주변 사람들과 상의 없이 귀국해 버렸죠.”
“흠, 그래서 한국 학생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진 거군요.”
수혁은 턱에 손을 괴고 이해가 간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맞습니다. 전부터 학교도 빼먹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거슬렸던 참이었는데, 말없이 학교를 나가 버리니 스미스 학장 입장에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와, 충격인데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명헌 사장이랑 느낌이 완전히 다른 것 같아요.”
찬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명헌을 재벌 3세 중에서는 떠오르는 신성으로 여겼는데, 이는 일송그룹이 표방한 이명헌 사장의 이미지가 스마트함과 완벽함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제 방식대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보이지 않게 불이익을 주는 교직원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래도 대표님께 호의적인 사람도 몇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듣던 중 다행입니다.”
수혁은 누군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에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케이턴 대학에서 한국대에 추천장을 다시 준 이유를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국제박람회 때 WG전자의 Z1이 플레티넘상을 타게 된 것이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세계 제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국가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거지요. 아마 케이턴 대학에선 WG그룹의 자제나 대표님을 영입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대표님께서 박람회 이후로 스타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결국, SH의 역량이 아니라 발표 때문에 뽑혔다는 걸 말하는 건가? 후, WG에 묻혀 가는 것 같아 괜히 찜찜하네. 미국에 있는 동안 이미지도 좀 바꿔야겠어.’
수혁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건우의 말을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3월에 세계적인 잡지에 실리셨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잘 이용하세요.”
“유명세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과 가까워질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이 바닥은 유명세도 중요한 자산입니다. 더 큰 성공을 원하시면 이것저것 따지시지 않는 편이 현명한 태도일 거고요.”
김건우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고려해 볼 만한 이야기지만, 제 성격과는 맞지 않은 것 같군요.”
“하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아파트를 보러 가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 집으로 가는 거지? 기대된다.”
찬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챙겼다.
“제 차로 이동하시죠. 아, 아파트 전용 주차장에 대표님이 타고 다니실 만한 차도 하나 마련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입학하기 전에 면허증 먼저 따야겠네요.”
“그런 부분까지 제가 세세히 알려 드릴 테니 내일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시면 됩니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어느새 차에 도착한 일행들은 새로운 주거지로 향했다.
“이곳이 대표님께서 머물 아파트입니다. 정확하게는 주상 복합 단지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이야,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도 그렇고, 앞에 강이 있는 걸 보니 전망도 끝내주겠는데요?”
“1년 전에 완공된 건물이라 신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곧 있으면 해가 질 텐데, 가장 꼭대기 층이라 야경이 끝내줄 겁니다.”
허드슨 타워에 도착한 건우는 궁금해하는 찬식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건물주랑 계약은 맺은 겁니까?”
“네, 일전에 대표님께서 보내 주신 착수금으로 1달 치 렌트 비용을 냈습니다. 일단, 들어가 보실까요?”
건우는 출입 카드로 출입문을 연 다음, 엘리베이터에 탔다.
“펜트하우스는 둘이 살기에는 과하지 않나요?”
“통상적인 펜트하우스라면 한 층을 통째로 쓰겠지만, 허드슨 타워는 면적이 넓어서 꼭대기 층도 적절히 분할 해 놨습니다. 자, 들어가시죠.”
그는 엘리베이터에 바로 앞에 있는 5001호라는 번호가 붙여진 와인 색 문 앞으로 다가가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와, 장난 아니다.”
“나쁘지 않은데?”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찬식은 럭셔리한 인테리어와 넓은 거실을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평수가 적어도 100평은 되겠어.”
“한국식으로 계산하면 아마 100평 좀 못 되는 면적일 겁니다. 지금쯤이면 야경을 볼 수 있겠네요. 이걸 보시죠.”
건우는 소파 위에 올려진 작은 리모컨을 들고 거실 커튼을 향해 버튼을 눌렀다.
‘이게 뉴욕의 야경이구나, 정말 예쁘다.’
커튼이 걷어지자 거실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화려한 뉴욕의 풍경이 펼쳐졌다.
“널 따라오길 정말 잘했다. 영화에서나 봤던 뉴욕 거리를 이렇게 볼 수 있다니…….”
“겨울에 눈이 온다면 더 좋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대표님, 마음에 드십니까?”
“네, 이 정도 집이면 살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수혁은 집 곳곳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대표님께서 오랜 기간 체류하는 만큼 좋은 집을 구해 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렌트비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요?”
수혁은 건우가 무슨 말을 할지 대번에 알아챘다.
“그렇습니다. 뉴욕은 세계적으로 집값이 높기로 악명이 높은데, 이곳은 특히나 가장 비싼 아파트라 한 달에 2만 달러를 내셔야 합니다.”
“흠, 그냥 이 집을 살 수는 없을까요?”
“아직 팔린 상태가 아니라 사실 수는 있지만, 시가로 90억에 달하는 집이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사장님, 90억이면 대표님께 큰돈이 아닙니다. 매입이 가능하다면 건물주랑 만나게 해 주세요.”
이야기를 듣던 찬식은 수혁에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일러 줬다.
“죄송합니다, 유학생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착각했습니다. 당장 내일 주인을 만나 계약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세부적인 사안들은 김찬식 팀장님과 함께 처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건우는 품속에서 명함을 꺼낸 뒤 곧바로 찬식에게 건넸다.
“벌써 10시가 됐네요. 피곤하실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고, 내일 뵙도록 하죠.”
“네, 대표님.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쇼.”
“감사합니다, 사장님.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수혁은 건우를 돌려보낸 뒤 찬식과 짐을 풀었다.
“냉장고에 마실 거랑 먹을 것도 다 넣어 주셨어. 여기 맥주도 있는데, 같이 마실래?”
“그래. 뉴욕에서의 첫날인데, 맥주 한잔은 해야지. 그전에 씻고 올 테니까 세팅 좀 해 줄 수 있어?”
“오케이.”
이날 밤, 수혁과 찬식은 뉴욕 야경을 배경으로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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