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수혁아 일찍부터 일어나서 뭐 하는 거야?”
찬식은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오다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수혁을 발견했다.
“학교 가기 전에 미리 준비할 게 있나 알아보고 있었어. 잠은 잘 잤어?”
“매트리스를 좋은 걸 써서 그런가, 몸이 아주 개운하네.”
“조금 있다가 사장님 오시기로 했으니까, 나가서 브런치나 먹자.”
수혁은 노트북을 덮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알았어, 씻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천천히 해. 난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올게.”
김건우 오기까지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타워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저, 잠시만요.”
수혁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엘리베이터는 막 닫히고 있던 차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방금 엘리베이터에 있던 사람, 낯이 좀 익는데?’
“이봐요, 혹시 옆집 사는 사람인가요?”
문 사이로 보였던 장년의 남성을 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혁은 등 뒤에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네, 그런데요.”
“괜찮으시면 이삿짐 정리하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빠가 사람을 불러서 정리하라고 하는데, 조금 귀찮아서요.”
‘뭐지? 초면인데, 조금 무례한 거 아닌가?’
수혁은 금발에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외모를 자랑했는데, 청순함보다는 섹시함에 가까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제가 그쪽을 왜 도와줘야 하죠? 이삿짐 정리 정도는 본인이 할 수 있지 않나요?”
“가구들을 새로 주문해서 조금 있다 오기로 했단 말이에요. 싫으면 하지 마세요.”
“네, 수고하세요.”
‘잘생겨서 말 좀 붙여 보려고 한 거였는데, 되게 까칠하네.’
금발의 여성은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저기, 잠시만요.”
“네? 갑자기 왜요?”
수혁은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말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 여자가 아담 회장의 외동딸이라니,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어플은 이전에 수행하지 못한 퀘스트를 언급하며 그녀가 아담 힐즈의 딸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수혁은 그녀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큰 목표를 갖고 미국에 왔기에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자주 뵐 텐데, 도움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훗, 그럼 그렇지. 남자들은 역시 다 똑같다니까?’
아름다운 외모 덕에 이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온 힐즈의 딸은 수혁도 보통의 남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들어오세요. 제가 가구 놓을 곳을 알려 드릴게요.”
“여성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들어가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좀 있다 가구들이 도착할 때쯤 해서 친구랑 함께 가겠습니다.”
‘가구 배치야 배달하는 사람에게 시키면 되는 건데, 굳이 날 시키려는 걸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야.’
수혁은 그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좋아요, 번호 알려 주실래요? 제가 정확한 시간을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아, 저는 루나라고 해요.”
“저는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루나가 번호를 묻자 수혁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주었다.
“강수혁이요? 이민 오신 줄 알았는데, 외국에서 막 오셨나 보네요?”
“케이턴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돼서요. 전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녀는 수혁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이민 2세나 거주한 지 오래된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발음하기 불편한 이름을 계속 쓰는 것을 보고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음을 유추했다.
“케이턴 대학이면, 설마 MBA 과정을 수료하러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오. 왠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동기였네요.”
루나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아, 루나 씨도 케이턴 대학에 입학하시나 보네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끼린데, 너무 딱딱하게 말하지 말자. 이럴 게 아니라 네 친구랑 우리 집에서 가볍게 맥주라도 마실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로 확답은 못 주겠네? 좀 있다 상황 봐서 알려 줄게.”
영어는 존댓말이 없었지만, 처음 본 사이라 형식적인 표현을 쓰던 수혁과 루나는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알겠어, 일단 바쁜 것 같으니까 있다 보자.”
“응, 배달 시간 정해지면 나한테 연락해 줘.”
루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고, 수혁은 제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후, 산책은 그른 것 같네.’
잠시 고민하던 수혁은 건우와의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시간은 흘러, 오후 3시가 되었다. 김건우 사장은 약속대로 로비에 나와 수혁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차례대로 알려 줬다.
“수혁아, 뭐가 급해서 이렇게 바쁘게 이동하는 거야?”
찬식은 양손에 보따리를 잔뜩 든 채 땀을 흘리며 물었다. 수혁은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한 필기시험 등록과 대학원 공부에 도움이 되는 서적들을 사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김건우 사장은 온 김에 근사한 곳에서 이들과 점심을 먹으려 했지만,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새로 알게 된 친구가 있는데, 도와주기로 약속을 해서.”
“금세 친구가 생긴 거야? 누군데?”
“루나라는 여자앤데, 알고 보니까 나랑 케이턴 대학 동기더라고.”
수혁은 한 손으로 무거운 짐을 든 채,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약속 시간에 이미 10분가량 늦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사람들이 알아서 배치를 해 줘서 가구를 옮기는 데 별문제 없었어. 저분이 네 친군가 보구나?”
“아, 안녕하세요. 김찬식이라고 합니다.”
찬식은 루나의 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는 미국행이 결정된 이후, 영어공부를 부지런히 했기 때문에 회화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찬식? 그래도 수혁보다는 발음하기 쉬워서 괜찮네. 수혁이 친구라면서?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응.”
루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건네자 찬식은 경직된 자세로 손을 맞잡았다.
“찬식이는 나랑 룸메이트니까 앞으로 볼 일이 자주 있을 거야.”
“혼자 지내면 외로울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잘됐다.”
“심심하면 언제든지 불러 줘!”
“풋, 알았어.”
찬식이 큰 목소리로 말하자 루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너희들 오기 전에 심심해서 인터넷으로 서칭을 좀 해 봤는데, 꽤나 유명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데?”
“아직 한창 커 나가는 회사라 자랑할 것은 못 돼.”
“시가 총액, 50조에 달하는 기업을 자랑할 수 없다면, 대부분의 오너는 숨 줌이고 살아야겠는데?”
수혁의 겸손한 반응에 루나는 다소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농을 던졌다.
“레일로는 별다른 계열사 없이 포털 하나만으로 시가 총액 100조를 넘겼잖아?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조금은 뽐낼 수 있겠지만, 네 앞에서는 어림도 없지.”
“어차피 그 회사는 내 것도 아니고 아버지 회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도 아담 회장님께서 네 지분을 챙겨 주셨을 거 아니야.”
“지분이야 갖고는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본인 이후에는 전문 경영인을 쓰겠다는 마음이 확고하셔서 레일로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옛날에 접었어.”
미국은 전문 경영인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식이라고 해서 회사를 물려받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 점심은 먹었어? 약속에 늦은 것 같아서 사과의 의미로 피자를 좀 사 왔는데.”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는데, 피자였구나? 잠깐만, 맥주 좀 꺼내 올게.”
그녀는 피자라는 말에 반색을 드러냈다.
“대낮부터 마시자고?”
“그래? 뭐, 어때? 어차피 공부야 학교 들어가면 원 없이 할 거 아니야.”
“수혁아, 오늘 하루만 좀 어떻게 안 될까?”
루나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찬식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애원했다.
“후, 알았어. 대신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일과를 진행해야 하니까 조절하면서 마시자.”
“고마워,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밤부터 사장님들에게 온 메일도 점검하고 업무도 시작할게.”
“수혁이랑 같이 일해?”
“응. SH에 전부터 들어가고 싶었는데, 수혁이가 배려해 줘서 미국까지 함께 오게 됐어.”
“배려는 무슨,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일단 마시자.”
수혁은 찬식의 낯뜨거운 말에 눈을 질끈 감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학장님이랑 면담하는 시간이 있다던데?”
“응, 확인해 보니까 난 모레 하기로 되어 있더라고.”
MBA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개학 전에 의무적으로 면담을 해야 했다.
“원래는 이런 과정이 없었는데, 2년 전에 MBA 과정이 설립된 이래 최초로 자퇴생이 나와서 학생들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려고 마련됐데.”
‘후, 이명헌이 이래저래 많은 걸 남기고 떠났구나. 학장으로선 한국 유학생이 싫을 만도 하겠어.’
수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이틀 후에 있는 면접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냥 잠깐 딴 생각하느라고 그랬어. 피자 식겠다. 빨리 먹자.”
“그래, 맛있는 걸 앞에 두고 안 먹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찬식은 피자를 들더니 단숨에 베어 먹었다.
“기회가 되면 뉴욕 여행이나 하자. 맨해튼이 뉴욕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다른 곳들도 돌아볼 때가 적지 않거든.”
“좋은 생각이야. 1학기 끝나고 방학 때 시간 조율해서 함께 돌아보자.”
“뭐야? 1학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본분을 잊은 건 아니지? 여기를 놀러 온 건 아니잖아.”
수혁은 찬식을 보며 가볍게 핀잔을 줬다.
“참네, 알겠어. 알겠다고.”
“후, 난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하하하, 둘이 뭐 하는 거야? 자, 여행은 나중에 생각하고 맥주나 마시자.”
루나가 건배 제스처를 취하자 수혁과 찬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맥주 캔을 부딪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 * *
시간은 흘러 면접 날이 되었다. 수혁은 루나와의 술자리 이후, 교과 과정과 연관된 서적들을 읽거나 한국에 있는 임원들과 화상 회의를 하는 등 바쁘게 지냈다.
‘생각보다 엄청 가깝잖아?’
케이턴 대학은 허드슨 타워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밖에 되지 않아서 통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학교 정문을 통과한 수혁은 곧바로 스미스 학장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누구요?”
“오늘 면담이 잡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세요.”
학장실에 도착한 수혁은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세계 제품 박람회에서 발표하시는 거 아주 잘 들었습니다. 기자들 앞에서 떨지 않고 말씀도 잘하시던데요?”
‘뭐지? 생각보다 되게 호의적이신 것 같은데?’
스미스 학장은 예상외로 대화를 부드럽게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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