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방금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루나는 폴이 싫었지만, 잘못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호텔에서 주는 커피 맛이 어때? 마실만 해? 더 마실 거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휴, 됐다. 너한테 사과는 무슨, 그만 가 줄래? 수혁이랑 마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녀는 폴의 비아냥거림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야, 폴. 얘네들 꼬락서니를 보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다 거짓인 것 같은데?”
“상관없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니까.”
“이봐, 이쪽에서 정중하게 사과했으면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적당히 좀 하지?”
제이슨과 폴이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이죽대자 수혁은 이들을 쳐다보며 일갈했다.
“왜? 아까 찰리한테 한 것처럼 힘으로 하게?”
“힘으로 할 거였으면 애당초 너희와 대화를 하지 않았어. 제이슨, 개인적으로 너한테 피해를 준 기억이 없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야?”
“그냥 널 보면 괜히 기분이 나쁜 걸 어쩌겠어?”
“참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진짜 짜증 나 죽겠네.”
루나는 제이슨의 궤변이 듣기 힘들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우리가 싫으면 딴 데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네가 지금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여긴 내 호텔이야.”
“뭐?”
“풋, 이젠 못 들은 척을 하네? 너희들 지금 쉘턴 호텔에 있다고. 정 우리가 싫으면 너희가 다른 곳으로 가든가 사라져 버려.”
화가 잔뜩 난 루나와 달리 폴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루나, 우리 그냥 가자.”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녀는 수혁의 제안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회야 학기 중간중간에 계속 있는 거잖아. 굳이 이 녀석들이랑 말 섞으며 기분 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네 말이 맞아. 파티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첫 모임부터 빠지려고? 아주 자기들 멋대로고만,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제이슨은 겉옷을 챙겨 입는 수혁과 루나를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루나야 가자.”
“응, 수혁아.”
수혁은 그런 제이슨에 대꾸도 하지 않고 호텔을 빠져나갔다.
“아주 건방진 놈이야. 언제 한번 제대로 손봐 줘야 하는데, 무슨 수가 없을까?”
폴은 사라져 가는 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놈이 우리랑 같은 미국 사람이면 진즉에 수를 써도 썼겠지.”
“찰리 빈센트가 우리 쪽으로 합류해서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은데, 정작 저놈은 건들 수 없다니. 너무 아쉬운데? 미국에 회사라도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줬을 텐데 말이야.”
유명 총기 회사인 빈센트는 매출로만 봤을 땐, 수천억 수준에 불과하여 중견 기업 정도의 규모였지만, 쟁쟁한 로비스트들을 보유한 덕분에 어느 기업이든 쉽사리 무시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최근에 저놈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마냥 방법이 없는 게 아니더라고.”
“하긴, 네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지.”
폴은 제이슨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면은 있지만, 경쟁 상대를 제압하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MK이노베이션을 통해서 다각도로 압박을 줄 생각이야. 큰 피해를 주기는 어렵겠지만, 고생 꽤나 하게 될 거야.”
“혹시, 뭘 할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우리 회사가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시간도 됐는데, 이만 올라가.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해 줄게.”
“오케이, 오늘은 술이나 마시면서 강수혁 저놈을 어떻게 골탕 먹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제이슨과 폴은 시시덕거리며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 7시가 다 된 시각, 허드슨 타워에 도착한 수혁은 루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파티도 못 가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해.”
“아니야, 케이턴 대학 MBA는 다른 곳들과 다르게 하기 중간중간에 사교 파티가 많이 열리거든. 그리고 쉘턴 호텔에 있으면 폴이 우리를 계속 건들었을 거야.”
수혁이 미안한 마음을 표했지만, 루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찬식은 지금 집에 있지?”
“응.”
“다들 술 마시면서 파티를 즐기고 있을 텐데, 우리끼리라도 가볍게 놀까?”
“미안, 오늘 밤에는 화상 회의가 잡혀 있어서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정 심심하면 찬식이랑 근처 팝에서 노는 건 어때?”
수혁은 설사 연회에 참석했어도 일찍 돌아올 예정이었기에 놀 생각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면 그냥 내일 학교에서 보자. 마침 피곤했던 참이라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아니면, 난 내 방에서 회의하고 있을 테니까 우리 집에서 찬식이랑 놀고 있어. 나중에 일 끝나면 합류하든가 할게.”
“내가 있으면 업무에 방해가 될 거야. 날은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
“응,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수혁은 루나와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뭐야? 벌써 끝났어?”
“어차피 모임이 이걸로 끝도 아닌데,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싶더라고. 회의 자료는 준비해 놨어?”
“사장님들께서 보내 주신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책상 위에 올려놨어.”
“수고했어.”
“밥은 먹었어? 내가 장을 봐 놨는데, 토스트라도 해 줄까?”
“조금 있다 회의 끝나고 먹을게. 난 씻으러 간다.”
수혁은 회의에 앞서 샤워를 한 뒤 정장을 갖춰 입었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미국 생활은 어떻습니까?”
“언어만 다를 뿐 한국이랑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김찬식 팀장님께서 근근이 대표님의 근황을 알려 주긴 하지만, 한국에 계시지 않으셔서 그런지 마음이 허전합니다.”
박찬명 사장과 박유신 사장은 화면에 수혁이 뜨자마자 안부 인사를 물었다.
“하하, 사장님들 덕분에 제가 안심하고 미국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자, 시간도 다 됐으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최필재 사장님, 제가 준 콘셉트안대로 제품 개발은 잘되고 있습니까?”
“네, 현재 저를 비롯한 개발 1팀에서 지오스토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미 유사한 사이트가 있던데, 괜찮을까요?”
지오스토리는 수혁이 회귀하기 전에 가장 유행했던 SNS를 모티브로 만들고 있는 웹사이트였다.
“소셜 스페이스는 얼핏 보면 지오스토리와 유사점이 많은 듯 보이지만, 사람 간의 소통이나 네트워크 형성의 용이성 측면에서 크게 뒤지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 혹시 사이트 제작이 언제 완료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정확한 날짜까지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아마 3달 안에 완성이 될 것 같습니다.”
“연말쯤으로 생각하면 되겠군요.”
대답을 들은 수혁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서비스 자체의 탁월함만으로는 지오스토리를 성공시킬 수 없어. 사이트 홍보에 도움이 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없을까?’
지오스토리를 만드는 데 참고한 SNS는 하버드 대학 출신의 젊은 CEO가 개발했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사이트를 독특한 방식으로 홍보했는데, 일단 동문을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게 한 다음 자연스럽게 미국인의 일상에 스며들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첫 6개월은 유의미한 매출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1년이 지나자 SNS 최강자였던 소셜 스페이스를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저, 대표님?”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었습니다. 사장님, 제가 준 다른 콘셉트안도 살펴보셨습니까?”
고민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던 수혁은 필재의 호명에 정신을 차렸다.
“5일 전에 팀원들과 검토를 마쳤지만, 아직 제작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데일리 스타는 지오스토리의 론칭 후, 1년 정도 텀을 두고 발표할 예정이라 여유롭게 진행하셔도 좋습니다.”
데일리 스타는 자신의 일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이트로 이 또한 미래의 기억을 더듬어 만든 사이트였다.
“최대한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시기를 앞당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퀄리티라는 점을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실행할 수 있게 앱을 제작하세요. 지금이야 사람들이 컴퓨터로 SNS를 이용한다고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모든 중심은 스마트폰으로 옮겨질 테니까요.”
수혁은 앱 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표님께서 누차 말씀하셨던 부분이라 사이트 제작과 앱 개발을 동시에 들어갔습니다. 연말까지 앱 제작도 완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H소프트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다음은 박유신 사장님.”
“네, 대표님.”
“이전부터 추진하려 했던 명품 회사와의 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수혁은 오프라인 매장에 비해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부족한 온라인 쇼핑몰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유명 브랜드 회사와의 접촉을 지시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 임직원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1주일 전에 이탈리아의 의류 회사 관계자와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습니다.”
“회사 이름이 뭔가요?”
“대표님도 들으시면 바로 아실 겁니다. 남성 의류와 시계로 유명한 카르지오입니다.”
“나쁘지 않군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좋은 프로모션을 카르지오 제품에 붙여 주세요. 이번 기회에 온라인 쇼핑몰이 중저가의 제품만 취급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카르지오의 제품이 잘 팔리기만 하면 타 명품 회사에서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지오쇼핑에 명품 섹션을 개설하는 것이 불가능은 아닐 겁니다.”
“맞습니다. 하나의 기회를 잘 살리면 그 뒤의 일은 순조롭게 풀리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요. 다음은…….”
지오쇼핑까지 점검을 마친 수혁은 다른 회사들도 일일이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분, 제가 김찬식 팀장님 통해서 드렸던 기획안은 읽어 보셨습니까? 검토하셨다면 당연히 아시겠지만, 기획안에는 각 회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상품과 나아갈 방향들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먼저, 김용민 사장님.”
“네, 대표님.”
“회사 경영을 함에 있어 기획안의 내용을 어떻게 참고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는 미국을 가기 전에 작성했던 상품 기획안을 하나하나 물어봄으로써, 임원들이 오너의 공백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 화상 회의를 하느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저희보단 대표님께서 고생이 많으시지요. 저희야 각자 맡은 사안들만 챙기면 되지만, 대표님께서는 모든 걸 체크하셔야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일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건강 조심하시고 추가로 지시할 사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저,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준비해 온 안건을 모두 처리한 수혁은 임원들과 마무리 인사를 나누며 회의를 마치려던 그때, 스피커에서 박유신 사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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